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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신화 속 세 여신을 통해 현대를 말하는 무대,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 리부트’ [공연]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세 여신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 리부트>

by 이다연 에디터
2026.09.23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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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단 산울림과 창작집단 LAS가 공동 제작을 맡은 창작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 리부트>가 2026년 9월 16일부터 10월 4일까지 서울 마포구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된다. 본 공연에 배우로 참여하기도 하는 한송희와 이기쁨이 연출과 기획을 맡은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리부트는 2016년 고전 재해석 프로젝트 중 하나인 ‘산울림 고전극장 시리즈’의 일환으로 초연되었고, 2017년과 2020년의 공연을 거쳐 ‘리부트’라는 이름을 덧붙여 6년만에 4연으로 돌아왔다. 이 연극은 고대 그리스 신화 속 여성 신들(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을 현대적 시각에서 재해석하며 이들의 각기 다른 입장과 위치성의 차이를 반영하는 대사를 통해 권력과 사랑, 자유라는 주제를 탐구한다.

       

      이 작품의 한 축인 헤라(Hera)는 크로노스와 가이아의 딸이면서 제우스의 누나이자 아내로, 제우스에게 결혼과 함께 최고 여신으로서의 자리를 보장받고 올림포스의 12신 중 최고 신인 제우스의 옆에서 군림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결혼과 가정을 상징하며, 제우스의 바람기로 인한 질투와 분노의 모습으로 자주 묘사된다. 아프로디테(Aphrodite)는 크로노스가 자신의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잘랐을 때 그것이 바다에 떨어져서 거품을 일으켜 태어난 사랑과 아름다움의 여신으로, (헤라의 아들이기도 한) 헤파이스토스의 아내이지만 아레스와의 불륜 관계로 유명하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는 주로 인간과 신 모두에게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의 상징이자 아름다움과 빈번한 육체적 관계를 통해 재현된다. 마지막 인물인 아르테미스(Artemis)는 제우스와 레토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태양의 신’인 아폴론의 쌍둥이 누나로, ‘달의 여신’이자 순결을 지키겠다고 서약한 ‘처녀신’으로서 사냥과 궁술도 관장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에서는 독립적이고 복수심이 강한 성격으로, 자신과 신성을 모욕한 이들을 용서하지 않고 처단하는 면모를 지닌 존재로 묘사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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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극은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의 탄생과 결혼 설화를 비롯해 그리스 로마 신화를 차용하고 있고, 아프로디테의 결혼과 불륜, 헤라가 이오와 레토 등 제우스의 바람 상대였던 여인 혹은 여신을 괴롭힌 이야기, 아르테미스의 독신주의 같은 유명한 에피소드가 무대 위에서 새롭게 펼쳐진다. 이러한 구성 위에 상대적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덜 알려진 이야기인 아프로디테의 연인 아도니스와 아르테미스의 연인 오리온의 죽음, 님프 아레투사와 알페이오스의 에피소드가 더해진다. 특히 이번 시즌에서는 아르테미스가 목욕하는 동굴에 들어왔다가 숫사슴으로 변한 악타이온의 에피소드가 삭제되고 님프 아레투사와 알페이오스의 이야기가 들어가면서, 기존 사료와 충돌이 적고 정합성은 높아진 구성을 보여준다.

       

      2016년, ‘페미니즘 리부트’라는 사회적인 맥락 속에서 처음 창작된 이 작품은 기존 신화의 서사를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과 해석을 덧입혀 현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기존의 고전 속 전형적이며 ‘상징적’인 여신들의 형상에서 어느 정도 이탈한다. 이 연극은 제우스의 ‘바람’으로 명명되었지만 대부분이 성폭력이었다는 사실, 아프로디테의 새 연인 아도니스를 죽이고 아프로디테에게 폭언을 하는 아레스의 모습 등 신화 속 남신들과 신과 인간이라는 비대칭한 위계 속에서 발생했던 남근적(phallus) 폭력의 역사를 여신들의 목소리로 다시 진술하며, 그 폭력 위에 세워진 신들의 세계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이는 곧 신화라는 이름의 신들의 역사가 표상했던 인류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신화를 통해 정당화되었던 가치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재검토하는 것이다.

       

      연극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 리부트>가 흥미로운 지점은, 신화 속 폭력과 위계로 만들어진 신들의 세계를 딛고 세 여신이 서 있다는 점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신들의 역사와 구조 위에서 여성 신들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동시에 모순을 경험한다. 아르테미스는 남신들의 성적 폭력과 위계를 혐오하고 경멸하지만, 자신 역시 그러한 폭력의 산물로 태어났다는 사실과 이를 통해 신으로서의 역능성을 얻었다는 점에 모순을 느끼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세 여신들의 모습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권력과 폭력의 구조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존재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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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적 권력의 구조 위에 서 있는 여신들의 모습은 지금 현재 사회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과 유비되고, 이 작품이 신화라는 이름의 고전을 소환해 현재의 우리 앞에 펼쳐 놓는 이유는 현대를 말하기 위해서다. 작품 속에서 등장하거나 언급되는 사건들은 현실 사회 속 여성혐오 범죄나 구조적 젠더 불평등에서 파생된 여러 담론을 직접적으로 연상시키며, 신화 속 여신들의 이야기는 고대의 서사에서 나타나는 인간(여성)의 보편적 원형(archetype)이라기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비대칭한 사회 구조와 다양한 권력 관계를 비추는 매개체에 가깝다. 헤라의 권력과 신의(fidelity)에 대한 믿음, 아프로디테의 성적 자유와 아름다움, 아르테미스의 독립심과 신념은 사랑과 아름다움, 권력, 주체성 같은 이 작품에 내재된 주제이자 현재 페미니즘이 마주하는 담론적 임계를 탐구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는 이전 시즌에 페미니즘 입문극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유일 것이다.

       

      헤라는 가부장제가 내포하는 가족 규범과 제도를 통해서 권력을 얻었고, 이러한 제도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이러한 제도를 이용하는 여신이다. (아르테미스가 지적했던 것처럼) 제우스의 바람은 사실 겁탈이었던 경우가 대다수이지만 헤라는 제우스의 불륜 상대인 여자들을 괴롭히면서 자신의 감정적 분열을 해소한다. 헤라가 ‘약속’과 ‘신의’를 중시하는 이유는 단순히 낭만적 사랑의 문제로 치환할 수 없으며, 제도와 권력의 구조 속에서 이해관계를 계산하며 자신의 위치와 자아를 지키려는 전략이다. 아프로디테는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존재로서 성적 쾌락을 자유롭게 탐닉한다. 과거 연인이었던 아레스가 새로운 연인이었던 인간 아도니스를 참살하는 모습을 목격한 뒤 아레스에게 비난과 위협을 받은 그는 이러한 관계가 폭력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새로운 관계에 해방감을 느끼고 사랑을 주고받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가부장제 하에서 성적 이중규범이 작동하는 상황에서 여성의 성적 주체성과 (타자와의 관계 맺음에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대상화 사이의 긴장, 그리고 성적 개방성과 ‘리스크’ 사이의 긴장 관계라는 주제를 환기시키는 캐릭터라고 말할 수 있다. 아르테미스는 독신 선언을 한 신화의 설정을 반영하듯 여성의 독립성에 대한 강한 믿음을 지닌 캐릭터로, 정의로움을 추구하며 때로는 부정의에 징벌을 가하거나 님프 아레투사의 사례처럼 성적 위협에 처한 다른 여성들을 돕기도 한다. 그는 어머니와 쌍둥이 동생 아폴론 같은 ‘친족’을 제외하면 다른 신들과 깊은 관계를 맺거나 활발하게 교류하지 않고, 다른 신들이 다 같이 모이는 만남을 피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아르테미스의 모습은 자신의 잠재적 피해 가능성과 잠재적 가해성을 모두 제거하려는 태도, 즉 ‘무해한 존재’로 남기 위해 독립성을 추구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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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 속에서 재현되는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의 모습은 직접적으로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각기 다른 유형의 여성상을 연상시킨다. (이는 일종의 ‘이념형’이라는 개념으로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무대 위에서는 가치관도, 위치도 다른 세 여신의 토론이 이어지고, 끝없는 확장과 수렴의 기나긴 과정을 통해서 각자의 이야기가 교차하고 경합하게 된다. 중요한 점은 세 여신들의 선택과 가치관에 내재된 제한적인 조건 속 삶의 맥락이 드러나며, 이들의 행위자성이 발휘되는 조건인 각기 다른 층위들이 전면화된다는 점이다. 복잡한 위치성과 이로 인한 ‘입장’의 차이를 인지하지 못한다면 ‘구조’역시 인식할 수 없다는 점, 페미니즘이 위치성과 관점의 학문인 이유를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이 연극에 대한 공통적인 감상평으로 많이 언급되는 것은 세 여신들의 말에는 ‘차이’가 있을 뿐, ‘틀린’ 말은 없다는 것이다. 이는 규범과 구조에서 완전히 자유롭고 무결한 존재, 즉 ‘결함’이 없는 존재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자아의 분열을 해소하기 위해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여자들을 괴롭히기를 택한 헤라, 그리고 자신의 탓으로 인해 폭력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님을 알지만 스스로를 ‘의심’하는 아프로디테, 그리고 오리온과 사랑에 빠졌다가 아폴론의 계략에 넘어가 연인을 곰으로 착각하고 화살을 쏴 죽게 만든 아르테미스가 ‘혼란’을 겪는 것처럼, 신념이 자신의 존재와 모순될 수 있다는 점, 믿음이 배반당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모든 존재에 내재된 근본적인 취약성에서 기인한다. 타자와 구분되어 존재하는 독립적인 주체성에 대한 믿음 역시 서구 근대의 ‘남성적’ 시각의 일환이며, 의존과 자립이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는 유효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보편적 조건으로서 상호 의존성이 출현한다는 것이 작금의 신자유주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는 현재 페미니즘의 담론적/실천적 전제이며, 장애학과 퀴어 이론 및 다양한 관점을 흡수하고 더욱 풍부해진 페미니즘이 마주하고 천착해야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2016년, ‘페미니즘 리부트’ 현상이 한국 사회에 발생하던 시기에 처음 창작된 이 작품은 ‘리부트’라는 부제가 새로 붙으며 지난 10년간 누적된 담론과 실천적 변화를 반영하며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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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은 올림포스 신전을 바탕으로 우연한 세 여신들의 마주침과 이로 인한 대화 속에서 세 여신들이 자신의 내면과 숨겨진 이야기를 털어놓고(자신의 ‘밑바닥’까지 보이며), 이들이 대화를 통해 서로 충돌하고 경합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재미있는 점은 (종종 쉽게 ‘임파워링’과 ‘주체화’라는 전개로 이어지는) ‘상호 이해’와 ‘연대’로 표상되는 규범적인 클리셰 직전에서 머뭇거리는 결말이다. 헤라는 헤르메스에게 제우스의 바람 소식을 전해 듣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떠나고, 아르테미스는 공연 초반에서 제시되었던 것처럼 다른 신들이 오기 전에 이 곳을 떠난다. 홀로 남은 아르테미스는 헤르메스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헤라와 아르테미스가 퇴장한 자리에서 헤르메스와 시간을 보내는 아프로디테의 모습을 보면 마치 이 작품의 첫 시작 장면인 세 여신들이 등장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규범적인’ 결말로 귀결되기 직전, 의도적으로 멈춘 상태로 모든 것을 유예한 이 작품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사라진다. 첫 장면과 비교했을 때 세 여신들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과연 그렇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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