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소년의 초상>은 귀족 가문의 초상화 의뢰를 받은 화가 공방을 배경으로, 그 그림을 실제로 그린 인물이 누구였는지를 둘러싼 이야기를 펼친다. 이 극은 역사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간 수많은 여성 화가들의 삶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한 듯했다. 질문에서 시작한 이 극에 대해, 나 역시 관람 후 이 극의 제목에 대해 역으로 두 가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두 가지 의문점이 들었다.
첫째, 왜 <로지나>가 아닌가? 이 뮤지컬이 시대적 편견과 곤궁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삶과 시선을 새긴 여성 화가에 대한 서사 구현을 주 목적으로 삼았다면, 그 여성 화가의 이름을 따 <로지나>로 뮤지컬의 제목을 붙였을 법하다. 하지만 이 극은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
둘째, 왜 <소년의 초상화>가 아니라 <소년의 초상>인가? 로지나는 귀족 가문의 소년에 대한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마르첼로 공방으로부터 받고 나서 그 소년에 대한 초상화를 그렸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소년의 초상화’라는 제목도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극은 굳이 '화'를 떼어낸 채 '소년의 초상'이라는 제목을 택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은 서로 다른 곳에서 출발해 결국 하나의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먼저 첫 번째 질문과 관련하여, 이 극은 그림들의 '진짜 화가가 누구인지'에 초점을 두고 있지 않다. 관객은 극 초반부터 이미 로지나가 진짜 화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극을 이끌어가는 동력은 '누구'가 아니라 '어떻게'에 있다. 다만 이 '어떻게'는 로지나가 살아가던 시대에서 완성되지는 않는다.
극은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개의 시간대를 나란히 두는 구조를 취하고 있고, 관객이 이미 예감한 진실, 즉 '명성을 얻은 그림의 진짜 화가는 로지나'라는 사실이 실제로 밝혀지는 것은 훗날 현대의 비올라가 그 흔적을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서다. 극의 중점은 바로 이 시간을 건너뛴 발견의 과정, 다시 말해 당대에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던 밝힘이 어떻게 현재에 와서야 완성되는가에 있다.
이 지점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으로도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시작한다. 로지나가 그린 것은 분명 '초상화(Painting)'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캔버스와 피사체인 소년을 매개로 그녀가 세상을 바라본 시선과 가치관을 담아낸 '초상(Portrait)'이기도 하다.
그림은 정지된 한순간을 포착한 결과물이지만, 그 안에는 화가만의 고유하고도 연속적인 시선이 새겨져 있다. 로지나는 피사체를 사실적으로 재현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인물이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며 웃음 짓는 순간을 캔버스에 그렸다. 그 그림 속엔 자신의 피사체가 가장 빛나는 찰나를 알아보는 로지나의 따뜻하면서도 예리한 시선이 담겨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두 번째 질문에서 얻은 답이 첫 번째 질문의 답을 완성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소년의 초상화' 속 피사체는 사실 귀족 가문의 소년이 아니었다. 진짜 피사체는 야코포라는 소년으로, 귀족 소년을 대신해 캔버스 앞에 선 '대역 소년'이었다. 로지나 역시 탁월한 재능을 지녔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마르첼로의 이름 뒤에 숨어야 했던 '대역 화가'였다. 그럼에도 로지나가 고단한 삶 속에서 자신의 시선과 온기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친구 마르타 덕분이었다.
여기서 이 극의 결정적인 구조가 드러난다. 제목 속 '소년'은 캔버스 앞에 서 있던 피사체인 야코포 한 사람만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 이 극에서 '소년'이라는 단어는 단수가 아니라 다중적이었다. 즉, 진짜 자신을 숨긴 채 대역으로 서야 했던 야코포, 마르첼로의 그늘에 가려져 제 이름을 빼앗긴 채 붓을 잡아야 했던 로지나, 그리고 그 곤궁한 시절을 함께 견디며 살아낸 마르타까지, 이 인물들 각자는 저마다의 형태를 띤 '소년들'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극이 그려내는 것은 로지나 한 사람의 자화상이 아니다. 야코포가 대역으로 서야 했던 자리, 로지나가 스승의 이름 뒤에 감춰야 했던 붓끝, 마르타가 곁에서 지켜낸 시간, 그리고 훗날 비올라가 되짚어간 발자취까지, 저마다 자신을 숨긴 채 살아낸 이들의 얼굴이 결국 하나의 캔버스 위에 겹쳐진다. '소년의 초상'은 그래서 여러 겹의 자화상이 포개진 한 장의 그림에 가깝다.
이 단어의 다중성은 곧 극의 제목이 <로지나>가 될 수 없었던 진짜 이유와 맞닿는다. 이 작품은 한 천재 화가의 단독 서사가 아니라, 고단한 시대를 통과해 간 '소년들' 전체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소년들의 고단했던 삶은 과거 속에서 스스로 구원받지는 못했다. 비극은 사라지지 않았고, 당대의 억압과 가난도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마르타를 연기했던 배우가 현대의 비올라로 다시 등장하며 서사는 전환을 맞는다. 수백 년의 세월을 건너뛴 비올라의 추적은 마르첼로 뒤에 지워졌던 로지나의 존재를 밝혀내고, 마침내 그녀에게 그녀의 작품들을 되돌려줌으로써 말이다.
과거의 비극 자체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현대의 비올라가 진짜 이름을 찾아내는 과정이 더해지면서, 이들의 고단했던 삶은 비로소 세상에 제 자리를 얻는다. 결국 캔버스 위에 남는 것은 각자의 위치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낸 '소년들'의 흔적,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야 지워진 이름을 되찾기까지의 그 과정 전체 그 두 가지다. 그리고 이것이 합쳐진 것이 바로 '소년(들)의 초상(Portrait)'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