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은 성인용 기저귀를 입은 13명의 배우에게서 시작된다. ‘노인박멸’이라는 강렬한 제목만큼이나 당황스러운 장면 앞에서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생각하고 있으면, 한 배우가 머리에 밀가루를 뒤집어쓴다. 얼굴을 새하얗게 만들고 머리카락을 희게 만든 뒤, “이 사람은 80대 노인입니다.”라고 선언한다. 이후 차례로 중년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얼굴에 밀가루를 바른다. 그렇게 배우들은 노화의 과정을 겪고 있는 이들이 된다.
‘노인박멸’이라는 제목은 노인과 노화를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사회의 모습을 꼬집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우리 안에 있는 노화를 외면하고자 하는 마음을 떠올리게 한다. 극은 80대 노인 정복이 나이를 먹으며 인지증을 겪고, 가족들의 돌봄을 받다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그 이후를 다룬다. 정복을 비롯한 배우들은 각자 자신의 실제 나이와 조금씩 어긋나는 나이의 배역을 연기한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아이처럼 기저귀를 차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인처럼 얼굴에 밀가루를 바른다. 아이와 노인, 청년의 이미지가 한 몸에 겹치는 이 모습은 노화가 사회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도록 만든다.
평생을 택시 기사로 일하며 4남매를 키우고, 60대의 홀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정복은 어느 날부터 여러 차례 교통사고를 낸다. 이를 계기로 자식들은 정복에게 은퇴를 종용하고, 정복은 자식들의 걱정에 못 이겨 택시 기사를 그만둔다. 은퇴 이후에도 애인을 만들고 트럼펫을 배우는 등 자신의 삶을 살아가던 정복은 조금씩 인지증 초기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가족들은 처음에는 ‘우리 아버지가 그럴 리 없다’라며 이를 부정하지만, 증상이 심해지며 결국 정복의 부양을 두고 갈등하기 시작한다.
연극은 노화와 돌봄을 둘러싼 여러 사회적 문제를 하나씩 깊게 파고들기보다는, 가능한 많은 현실을 한꺼번에 병치한다. 동의 없이 설치한 홈캠과 감시, 인지증 환자의 성추행, 그리고 돌봄노동과 그에 따르는 비용 등의 문제가 가족과 정복의 삶에 연이어 등장한다. 정복이 네 자식의 집을 오가는 동안 자식들은 각자의 삶이 너무 바빠 아버지를 충분히 돌보지 못하기도 하고, 점점 심해지는 증상에 감정적으로 지쳐가기도 시작한다. 결국 가족들은 정복을 요양원으로 보내기로 하지만 그곳에서도 문제는 끊이지 않는다. 폐렴을 반복해서 앓던 정복은 결국 병원에서 죽음을 맞고, 죽음 이후에도 가족들은 복잡한 장례 절차를 치르느라 분주하다.
그 과정에서 눈에 띄는 부분 중 하나는 정복이라는 인물의 위치가 변해가는 모습이다. 처음의 정복은 가족들 사이에서 하나의 단단한 주체로 존재하며,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인지증이 심해질수록 정복의 가족들은 정복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묻기보다는, 무엇이 필요할지를 대신 판단하기 시작한다. 정복의 삶을 위해 내린 결정이지만, 그 결정이 반복될수록 정복의 의사는 점점 뒤로 밀려난다. 정복은 어느 순간부터 가족의 구성원이라기보다는 돌봄이 필요한 대상으로 존재하게 된다. 노화는 신체의 변화만을 가져오는 일만이 아닌 주체의 자리에서 점차 밀려나는 과정으로도 그려진다.
연극의 제목은 정복이 인지증의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는 1장 ‘노인’과, 정복이 죽음에 이르고 그 이후의 장례까지를 다루는 2장 ‘박멸’로 나뉘어 제시된다. 이 과정을 지나는 자식들의 모습은 무조건 옳다고도, 그르다고도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들은 정복을 돌보고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정복을 최대한 배려하고자 하며, 극 중 계속해서 맺어지는 갈등 역시 결국 아버지에게 조금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하기 위한 마음에 기반한 것이다. 그렇다면 ‘노인박멸’이라는 제목에서 ‘박멸’이 향하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
자식들은 늙어가는 정복을 최선을 다해 부양하며, 동시에 노화를 맞고 싶어 하지 않는다. 피부 시술을 받고 운동을 하며, 닥쳐오는 노화를 없는 셈 치고 젊은 시절 모습을 오랫동안 유지하고자 한다. 한편 20대에 가까운 인물들은 노화 자체에 아직 큰 관심이 없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노화는 이들에게 ‘언젠가 내가 맞이할 일’이라기보다 ‘최대한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일’에 가깝다.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자신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는 쉽게 생각하지 않는다. 바로 눈앞에서 늙어가는 아버지를 돌보면서도, 자신 역시 언젠가 같은 자리에 놓일 수 있다는 사실은 외면하는 일, 노화를 자신의 삶에서 완전히 없애버리는 태도. 이 작품의 ‘박멸’은 바로 그 모순적인 태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이러한 태도를 비판이 연극에서 제시되는 문제들의 해결책은 아니다. 노인 돌봄의 문제는 제도, 경제적 조건, 돌봄노동, 가족관계, 개인의 감정과 욕망이 복잡하게 얽혀 만들어진다. 제도의 개선만으로 해결할 수도 없고,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일만으로도 해결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이 연극은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 수많은 문제를 관객 앞에 남겨놓는다. 연극을 보고 나온 뒤 관객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적어도 노인과 노화, 돌봄과 죽음에 대한 논의의 기회만큼은 ‘박멸’하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연극을 본 이후 관객에게 남는 가장 작은 실천일지도 모른다.
끝으로, 이 연극에서 눈에 띄었던 부분 중 하나는 다양한 연령대의 관객이 함께 극장을 찾았다는 점이다. 20대의 청년 관객도 있었고, 다른 연극에 비해 중장년층의 관객도 많이 보였다. 각자 인생의 다른 순간에서 정복과 그 가족의 이야기를 마주하고 있었을 테고, 이야기를 각자의 삶과 연결하며 바라보았기에 공연 중간중간 흐느낌이 들려왔던 게 아닐지 생각한다. 우리는 언젠가 늙어가고, 결국에는 모두 죽음을 맞는다. <노인박멸>이 우리에게 남기는 의미는 그 당연한 사실을 다시 한번 바라보게 하는 일, 우리의 삶에서 ‘박멸’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