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하는 무대를 위해 [공연]
-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셰익스피어의 희곡, <햄릿>의 명대사이다.
이 대사를 무대에서 발화할 배우를 상상해 보자. 그 배우의 성별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성 배우를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문화예술계에서는 이러한 통념을 다른 시각에서 보는 시도가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바로 '젠더프리'이다.
우선, 젠더프리라는 용어를 직역해 보면 젠더가 없다는 뜻이다. 즉, 배역에 성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거나, 배역에 맞기만 한다면 배우의 성별에 상관없이 캐스팅이 이루어진다는 개념이다.
마리끌레르 젠더프리 2021 영상 - 출처 : 마리끌레르 유튜브
젠더프리라는 용어가 대중적으로 보편화된 계기는 2018년 패션 잡지 마리끌레르의 기획 영상에서부터였다. 여성 배우들이 남성 배역의 대사를 연기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이 많은 관심을 받았고, 이를 계기로 대중들이 젠더프리라는 개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흐름은 공연 예술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후로 수많은 젠더프리 캐스팅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뮤지컬 <미드나잇 : 앤틀러스>에서는 초연 당시 남성 배우가 연기했던 비지터 역에 여성 배우 유리아를 캐스팅했다. 같은 대본을 공유하는 <미드나잇 : 액터뮤지션>에서도 여성 배우가 비지터를 연기하며 꾸준히 관객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뮤지컬 <해적>에서는 남성과 여성을 넘나드는 캐스팅을 보여준다. 배우 한 명이 여성 배역과 남성 배역을 모두 연기하는 1인 2역의 형태로, 관객들에게 일명 여배 페어, 남배 페어로 나눠 불리고 있다. <해적>은 4연을 맞은 지금까지 관객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리고 글의 시작에서 언급했던 <햄릿>. 지난 2024년 국립극단의 <햄릿>에서는 여성 햄릿이 등장했다. 배우 이봉련이 연기한 햄릿은 원작과 달리 공주로 각색되었다. 고전에 동시대성을 더해낸 극은 관객들이 새로운 시각에서 기존의 텍스트를 볼 수 있게 했다.
뮤지컬 해적 공연사진 - 출처 : 콘텐츠플래닝 공식 트위터(@kontentz)
젠더프리는 이제 공연 예술계에서 하나의 흐름으로 자리 잡았지만, 이 용어가 모든 개념을 포괄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다. 위에서 언급한 사례들을 천천히 들여다보면, 각기 다른 맥락과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드나잇 : 앤틀러스>의 여성 비지터의 경우에는 배역 자체가 성별과 무관하게 설정된 캐릭터였다. <해적>의 경우에는 남성 배역을 여성이 연기하거나, 혹은 그 반대도 가능한 작품이다. 마지막으로 <햄릿>은 기존에는 남성이었던 캐릭터를 여성으로 바꿔 원작 자체를 새롭게 각색한 경우이다. 이렇게 세부적인 맥락에서는 차이가 나는 사례들을 지금은 젠더프리라는 용어 아래 묶어 부르고 있다.
사실 이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용어는 이미 존재하며, 해외에서는 꾸준히 쓰이고 있다. 예를 들어 <해적>과 같이 배우와 다른 성별의 배역을 연기하는 경우는 '크로스젠더 액팅'이라고 부른다. <햄릿>과 같이 성별을 바꿔 원작 자체를 재해석하는 경우는 '젠더 스와프' 혹은 '젠더 벤딩'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국립극단 <햄릿> 공연사진 - 출처 : 국립극단 공식 트위터(@ntck_)
점점 더 많은 여성 서사극이 시도되고, 관객들 역시 여성 배우가 더 많이 등장하는 작품들을 기대하는 지금. 여성이 더 많은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하는 한 명의 관객으로서 용어를 더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젠더프리라는 이름만으로는 모든 시도를 담기 어렵다.
젠더프리가 처음 큰 호응을 얻었던 이유로 돌아가 보면, 우선 여성 배우가 설 수 있는 자리가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성녀와 악녀로 나뉘는 전형적이고 평면적인 역할을 벗어나 더 다양한, 입체적인 캐릭터를 연기할 기회가 생겼고, 남성 중심의 기존 작품에 새로운 해석과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이는 남성 중심의 공연 예술계에서 큰 변화였다.
등장하는 인물들을 성별로 나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있기 떄문에 누군가는 남성이어도 약할 수 있으며, 또 누군가는 용기가 부족할 수 있다. 여성도 마찬가지로 용기가 부족한 사람도 있고 맞서 싸울 수 있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 마리끌레르 젠더프리 2021 고민시 배우 인터뷰
이제는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이다. 지금보다 더 다양하고, 많은 여성이 등장하는 극을 위해서는 이제 젠더프리라는 단어뿐만이 아니라, 더 세분된 용어들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단순히 더 많은 젠더프리를 원한다는 말을 넘어, 관객이 자세히 인지하고 있는 만큼 창작자들도 이러한 요구에 반응하는 극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더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들을 만나볼 수 있을 미래를 향한 길이 아닐까?
[노미란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위로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