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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사라진 공동체와 시대에 대한 애도 (불)가능성 -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공연]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속 애도, 계급/젠더, 가르침/배움, 미래

by 이다연 에디터
2026.07.31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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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12일부터 7월 26일까지 서울 블루스퀘어 우리은행홀에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 라이선스 4연이 공연되었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1980년대 대처 정부의 탄광 민영화 정책으로 인해 파업에 돌입한 영국 탄광촌을 배경으로 발레를 통해 꿈을 찾아가는 소년의 성장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2000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2005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초연되었다. 원작 영화의 감독이었던 스티븐 달드리(stephen daldry)와 각본가 리 홀(Lee Hall)이 연출가와 대본으로 참여했으며, 엘튼 존(Elton John)이 음악을 맡아 창작된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에서 토니상 10개 부문을 휩쓸었고, 웨스트엔드 올리비에상을 수상했다. 한국에서는 신시 컴퍼니에 의해 수입되어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2010년 아시아 최초로 라이선스 초연을 올렸고, 2017년 재연과 2021년 3연을 거쳐 이번에 4번째 시즌을 맞이한다. 빌리 역을 맡은 (아역) 배우는 ‘빌리 스쿨’을 통해 발레, 탭댄스, 아크로바틱, 연기 등 장기간 훈련을 받고 공연에 서며, 작품 속 춤과 노래, 서사는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이끌어 가는 핵심 축이 된다.


 


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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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시작은 스몰 보이(Small Boy) 역할을 맡은 어린 소년의 등장과 함께 무대 위 스크린에 전후 영국 탄광 산업의 국유화부터 대처 정부의 국영 탄광 폐쇄 정책까지 거대한 역사가 흐르는 장면이다. 이어 무대 공간은 뮤지컬의 배경이 되는 영국 북부 탄광촌 더럼 마을로 전환되며 파업의 시작을 알리는 와중, 이 작품의 주인공 빌리와 파업을 알리는 마을 사람들이 등장한다. 파업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아버지 재키는 빌리에게 복싱을 가르치기 위해 50펜스의 수업료를 주고, 복싱 수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빌리는 이를 복싱 수업이 아니라 같은 마을 센터에서 하는 발레 수업 수강에 사용한다. 발레에 흥미를 느낀 빌리는 가족들의 반대와 경제적 어려움이라는 현실의 장벽에 부딪히지만, 발레에 깊이 빠져들며 발레를 하겠다는 꿈을 품게 된다. 빌리의 춤에 대한 열정은 주변을 감화시키고, 아버지는 빌리의 꿈을 지지하게 되며 빌리의 오디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파업 중 홀로 직장에 복귀한다. 발레에 대한 꿈을 가진 빌리를 향해 마을 사람들이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돈을 모아주며, 빌리는 왕립 발레 학교 오디션에 합격하여 홀로 마을을 떠나게 된다. <빌리 엘리어트>는 발레를 진로로 선택하기에는 경제적 문제가 발목을 잡는 노동자 계급 출신이라는 점, 아버지의 반대와 남자가 발레를 한다는 편견을 재능과 노력으로 ‘극복’하는 뛰어난 개인의 이야기(영웅 혹은 위인 서사)로 단순하게 환원되지 않으며 그 당시의 시대적 맥락과 역사적 상황이 담긴 텍스트로 확장된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시작은 파업의 시작이며, 끝은 로열 발레 스쿨(왕립 발레 학교)에 합격해 런던으로 향하며 마을을 떠나는 빌리와 파업이 끝나고 다시 탄광으로 복귀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다. 당시 영국 보수당의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는 1970년대 오일 쇼크 이후 실업률과 물가가 동시에 상승하는 스태그플레이션을 해결하기 위해 공공 복지를 줄이고 노동시장을 유연화하는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추진했고, 국유화된 탄광 산업이 비효율적이라는 계산 하에 일부 탄광을 폐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며 반대하는 노조를 강경 진압하고 일자리를 감축하는 등 노동운동을 탄압했다. 자본주의가 ‘역사의 종말’을 불러오며 탄광 민영화라는 대처의 정책이 표상하는 신자유주의적 질서(레짐)이 사회를 지배하기 시작하던 시점에서, <빌리 엘리어트>는 한 시대와 공동체의 끝을 다루는 역사적 표상이다. 탄광(촌)의 몰락이라는 이 작품의 역사적 배경이 함의하는 것은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에서 신자유주의로의 이행을 알리는 역사적 분기점이자, 전투적 노동 운동에 투신해 경찰들과 무력 투쟁을 벌이기도 했던 빌리의 형 토니가 주로 입고 있는 ‘체 게바라 티셔츠’가 함의하는 것처럼 대안적 세계를 꿈꾸었던 투쟁(혁명)의 종말에 대한 기록이다. 그렇기에 빌리의 로열 발레 학교 합격 편지를 통해 모든 가족이 기뻐하는 와중 토니와 재키에게 들려오는 파업이 실패로 끝났다는 소식은 단순한 극적 우연이 아니라 기묘하게 인과적인 장면이다. 빌리라는 소년의 비상은 결국 탄광 공동체의 희생을 조건 혹은 담보로 가능했고, 그렇기 때문에 파업에 실패하고 다시 어두운 탄광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는 노동자들의 뒷모습과, 새로운 세상을 향해 런던으로 떠나는 빌리의 움직임이 겹쳐지는 엔딩은 이러한 주제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 극의 핵심을 관통하는 ‘킬링 넘버’는 미세스 윌킨슨의 지도에 맞추어 발레걸들이 동작을 익히고 대열을 맞추는 일상의 공간 위로 탄광 노동자들과 경찰들의 격렬한 대립이 교차하는 'Solidarity'로서, 빌리가 발레를 배우는 몇 달 간의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표현하는 독특한 연출은 원작 영화의 장면을 무대의 문법에 맞게 변화시키며 새롭게 재해석한 것이다. 넘버의 이름인 ‘Solidarity’(한국어 가사의 경우 ‘모두 다 같이’)는 단어 그대로 해석하면 '단단함(고체성)'과 '연대’라는 뜻을 가지며, ‘연대’의 힘과 위력은 공동체에 대한 헌신과 공동체(성)이 드러나는 장면으로 이 작품 내에서 산재되어 나타난다. 파업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에 위치해 있지만 빌리의 꿈을 위해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으고 이에 ‘배신자’로 취급받는 탄광에 복귀한 이들 역시 동참하는 장면, 오디션 현장의 심사위원들이 재키에게 파업의 성공을 비는 대사처럼 파업에 참여했던 노동자와 예술가 간의 사회적 연대 등 빌리가 자신을 꿈을 키워가는 과정에서 다양한 개인들이 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은 지속해서 환기된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시대적 변화의 전조에 대한 일종의 ‘징후’로서 ‘연대’의 (불)가능성 또한 암시하는데, 고체(성)의 이미지는 곧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혹은 이에 반하는 흐름 모두) 초기 근대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무대 위에서는 계급(노동자와 경찰)과 젠더(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완고한 경계들이 대면의 과정을 거치며 섞이는데, 이때 흥미로운 점은 모두의 몸이 규율에 의해 배치/배열되지만 두 공간의 병치로 인해 엉키는 과정에서 노동자의 안전모와 경찰의 모자가 발레걸즈의 움직임으로 인해 서로 교체된다는 점이다. 단단하게 고정된 것처럼 보이는 근대적 규범과 질서는 이러한 대면적인 ‘마주침’ 속에서 점차 용해되고 희석되며, 이는 발레를 배우며 미숙했던 동작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빌리의 성장 과정과 병치된다. 하지만 이러한 혼종성을 통한 ‘섞임’은 동시에 '운동' 자체의 동력 또한 침식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액체 근대』에서 ‘액체성’을 근대 초기와는 구분되는 후기 근대의 성격으로 규정하며 논했던 양면성처럼, 이는 과거의 결집과 집단적 의식화를 통해 작동했던 전통적인 좌파의 투쟁 방식이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는 '후기 근대로의 이동'을 함축한다.

 

이 작품은 이미 지나간 시대와 사라진 공동체에 대한 애착과 향수를 보여주는 텍스트라는 점에서 ‘좌파 멜랑콜리’로 명명된 정동 구조에 대한 논의와 맞닿는다. 정신분석학에서 이미 상실된 대상을 보내주지 못하는 애도의 실패로 인한 멜랑콜리(우울증)는 대상과 내면적으로 합치된 병리적 상태를 의미하며, 이를 정치적인 의미로 확장한 것은 혁명의 가능성이나 사회적 이상이 상실된 후 변혁적 힘에 대한 냉소 혹은 무력감 같은 정동으로 나타나는 좌파 멜랑콜리(Left-Wing Melancholy)라는 개념이다. 20세기 학자 발터 벤야민에 의해 비판적으로 다루어진 이 개념은 세계대전과 냉전, 그리고 동구권 사회주의의 붕괴와 신자유주의적 전환을 겪으며 다양한 논의를 촉발했고, ‘좌파 멜랑콜리’가 함의하는 다양한 병리적 정동을 생산적인 것으로 전유하거나 새롭게 독해하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빌리 엘리어트>를 본다면, 서사의 전반을 지배하는 상실과 죽음의 코드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주된 주제인 한 시대와 공동체, 변혁의 상상력의 종말을 비롯해, 이미 죽었지만 빌리에게 남긴 편지 속에서 환영으로 나타나는 ‘데드 맘(dead mom)’이라는 역할에 대한 이야기가 또 다른 요소다. 빌리는 자신이 발레하는 것에 반대하는 아버지에게 ‘엄마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라고 응수하며, 크리스마스를 맞이한 마을 센터에서 빌리의 아버지는 죽은 어머니가 좋아했던 음악인 ‘Deep into the ground’를 부르기도 한다. 죽음과 상실의 분위기가 빌리의 가정과 흩어져 있는 상황에서, 치매에 걸린 빌리의 할머니는 빌리의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죽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망각하고 빌리에게 그들이 어디 갔냐고 물으며 상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상실이 인지되지 않기에 애도가 불가능한 할머니가 이미 죽은 할아버지를 회고하며 부르는 ‘Grandma’s Song’은 빌리에게 춤의 가능성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나타나는 시대의 재현은 소비 자본주의 내에서 단순히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상품으로 전락하거나 섣부른 ‘종언’이 선언됨으로써 지금까지 제대로 ‘애도’되지 못한 ‘과거’의 가치, 즉 공동체와 시대에 대한 애도 불가능성으로서의 ‘멜랑콜리’의 정동 구조를 연상시킨다. 그렇다면 지나간 것에 대한 진정한 ‘애도’는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는가? 동시에, ‘애도’가 단순히 과거와 현재의 경계 긋기로만 남지 않고 그 정신을 연속적으로 계승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후속 작업이 동반되어야 하는가? 빌리가 떠나기 전 죽은 엄마와 마이클, 그리고 더럼에게 하는 마지막 작별 인사는 자신을 위해 희생했던 고향 공동체와 그 시대를 애도하는 것이다. 시대가 끝났다는 감각 속에서 희생과 실패의 기록에 다시금 접속하면서, 이러한 ‘우울’의 정동은 어떻게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힘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 파업이 끝난 뒤 모든 사람이 무용수가 될 수 없다는 토니의 씁쓸한 말은 여전히 유효한데, 그 대안적인 가능성을 예술이라는 미학의 영역에서 온전히 찾을 수 있을까? ‘연대’의 동력이 과거와 같지 않은 상황에서의 이질적인 것들 간의 ‘연대’는 어떻게 가능한가? (같은 시대를 다루며 탄광 노동자의 투쟁과 성소수자 민권 운동의 연결을 다룬 영화 <런던 프라이드> 같은 것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절대적이며 본질적인 것으로 재현되는 ‘예술’을 낭만화하지 않고, 과거에 대한 피상적 향수를 넘어 이를 어떻게 창조적인 동력으로 쓸 수 있을까? 미학과 정치는 어느 지점에서 접점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러한 코드로 이 작품을 읽는다면 답해져야 할 질문이 무수히 많다.

 

 


계급과 젠더라는 이중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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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의 핵심적인 소재인 ‘발레’는 젠더화되고 동시에 계급화된 예술이다. 이 작품 내부에서 계급과 젠더 간 경계와 분할의 대표적인 요소는 ‘복싱’과 ‘발레’의 차이로서, 생존과 투쟁, 그리고 강하고 거친 남성성을 증명하기 위한 노동계급 남성성을 상징하는 ‘복싱’과 상류층의 교양이자 우아한 신체적 정제성을 요구하는 ‘발레’는 대립적으로 재현된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장(field) 내부에서 개인의 사회경제적 위치가 체화되어 신체적 습속, 취향, 행동 양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아비투스(Habitus)’라 칭했다. 자신의 사회자본과 경제자본에 의해 영향을 받은 ‘취향’에 대한 부르디외의 논의는 20세기 프랑스 사회에 대한 경험 연구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사회의 맥락과 완벽히 들어맞지는 않지만, 유럽 사회를 기준으로 상당한 설명력을 가지고 있다. 198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빌리 엘리어트>에서 빌리가 처한 환경은 이러한 구조가 계급과 젠더의 분할을 통해 어떻게 신체를 규정하는지, 그리고 빌리가 이러한 이중구조를 초월하려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발레라는 장(field) 내부에서 계급적 타자인 빌리는 발레에 점차 빠져들면서 동시에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기 시작한다.

 

이때 노동 계급 출신 소년이 발레를 한다는 것의 여러 장벽을 인지하기 시작한 빌리에게 다가온 것은 그의 친구 마이클이다. 게이라고 직접적으로 명시되는 마이클은 사회적 규범으로서의 남성성/여성성에 ‘균열’을 내는 존재로서, 빌리가 발레에 흥미를 느끼고 이를 욕망한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누나의 옷을 입고 화장하는 것을 좋아하는 마이클은 빌리에게 ‘개성’과 ‘자유’의 감각을 알려주며(‘expressing yourself’), 마이클의 ‘퀴어한’ 성향을 눈치챈 빌리는 클래식 튀튀를 주는 등 그를 존중하며 우정을 나눈다. 이 작품의 마지막 장면 역시 빌리가 마이클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것으로, 원작 영화에서는 성장한 뒤 드랙퀸이 된 마이클의 모습이 등장하며 빌리의 형과 아버지가 마이클을 알아보는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빌리의 아버지 재키는 노동계급 남성성 특유의 자부심이 강하고 가부장적으로 아들 빌리를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 묘사되지만, 그는 빌리를 지원하기로 결정한 이후부터 ‘자존심’을 내려놓게 된다. 첫 번째 오디션 기회를 날려버린 뒤 빌리의 재능을 발견한 재키는 뒤늦게 윌킨슨 선생님을 찾아 도움을 청하고, 윌킨슨은 경제적 도움을 받지 않으려고 하며 마지막 자존심을 세우는 재키에게 조언을 건넨다. 오디션 비용을 위해 파업을 포기한 재키의 도움 속에서 빌리가 런던 왕립 발레 학교 오디션에 가서 겪는 일들은 오디션에 응시한 다른 전공생들과는 차별화되는 계급적 배경으로 인한 충돌과 긴장의 연속이다.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며 공손해진 재키와 달리 빌리는 예민해진 상태에서 이번에 떨어져도 다음에 다시 도전하면 된다는 ‘나이브’한 위로를 던지는 중산층 출신 남자 아이(‘톨 보이’ 역 아역이 담당)에게 ‘주먹을 날리고’, 이러한 돌발 행동으로 인해 주의를 받기도 한다.

 

이때 아이들의 오디션을 위해 따라온 중산층 출신 어머니들 사이에서 이질적으로 존재하던 재키는 담배를 피우던 토트넘 출신 발레리노를 본다. 프로 발레리노로 자랐음에도 여전히 거친 말투를 구사하는 그는 재키에게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하다는 말을 건네고, (탄광 마을 더럼처럼 주로 노동자들이 거주했던 토트넘에서 자란) 그가 빌리와 유사한 성장 배경에서 자랐음이 암시된다. 일종의 ‘선례’로서 발레의 계급적 장벽을 극복한 이가 있다는 점, 그리고 단순히 자신의 문화적 배경이자 자신의 삶의 한 요소였던 계급적 유산을 잃고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유지한 채 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은 계급을 횡단함에 있어서 수반되는 혼종적인 면모를 함의한다.

 

원작 영화는 어른이 된 빌리가 매튜 본(Matthew Bourne) 안무의 <백조의 호수>에서 강인한 이미지의 남성 백조를 맡아 공연을 시작하며 도약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클래식 버전과 달리 남성 무용수에게 ‘백조’(그리고 ’낯선 남자’)를 맡기고 백조를 일종의 ‘군집’으로 묘사하며 재해석을 시도한 작품이다. 당시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의 안무감독을 역임한 안무가 유리 그리고로비치는 매튜 본이 재해석한 <백조의 호수> 안무를 ‘발레가 아니다’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클래식함을 중시하는 일부 발레계 인사 사이에서 반발을 사기도 했다. 매튜 본은 기존의 발레사에서 고전적인 아름다움의 코드를 해체함으로써 <백조의 호수>라는 대표적인 클래식 레퍼토리에 대한 새로운 재해석의 장을 열며 현대 발레의 흐름에 한 획을 남겼다. 이때, 매튜 본이 재해석한 남성 백조의 위협적이고 강한 이미지는 노동자 계급 출신인 빌리에게 체화된 ‘노동계급 남성성’, 즉 거친 몸짓과 태도, 투박함, 강인함과 호응하는 속성이다. 귀족과 왕실의 문화에서 기인한 초기 발레의 역사와 중산층 이상이 주로 택할 수 있는 장르였던 발레의 위치를 생각해 본다면, 예술에서 기존의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시도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질적인 것’의 유입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영국 내) 퀴어 민권 정치를 향한 연대감, 혹은 초기 고전 발레사(史) 내부에서 ‘퀴어한 것’을 발굴하려는 시도와 친연성이 있다. 이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백조의 호수>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 그리고 중반에 언급되는 러시아 출신 무용수이자 안무가 루돌프 누레예프(Rudolf Nureyev), 그리고 누나의 옷을 입는 것을 좋아하는 빌리의 친구 마이클로 이어지는 흐름과 그들의 게이 정체성이다. (원작 영화를 포함한다면, 매튜 본 역시 이러한 흐름 속에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보편화된 안무인 프티파와 이바노프 버전을 기반으로 수많은 재안무와 재해석의 역사를 이어 온 발레 <백조의 호수>라는 작품은 클래식 발레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서, 작곡가인 차이코프스키의 예술 세계에서 그의 소수자성이 차지하는 역할은 음악사적 맥락에서 분석 대상이 되어 왔다. 또한 윌킨슨의 호명, 경찰의 웃음, 그리고 빌리와 아버지의 대화 등 이 작품에서 누레예프는 ‘무용수’로서 언급되지만, <백조의 호수>와 ‘안무가’ 누레예프 간의 관계는 더욱 흥미롭다. 현재 파리 오페라 발레단(POB)이 채택하고 있는 누레예프 안무의 <백조의 호수>는 서사의 흐름과 안무 구성의 차원에서 주로 클래식한 버전을 따르지만, 러시아에서 주로 공연되는 버전과 달리 ‘광대’ 역할이 부재하고 미성숙한 왕자의 내면을 전면에 부각함으로써 그 이후 (대표적으로 앞서 언급했던 매튜 본의 안무처럼) <백조의 호수>에 대한 퀴어한 독해(queer reading)를 수행한 다양한 현대 발레 작품들이 나오게 하는 초석이 되었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탄광 산업의 흥망성쇠라는 배경을 통한 영국의 역사와 발레사 내부에서 소수자의 (숨겨진) 역사가 내재되어 있는 텍스트다. 그렇다면 뮤지컬의 막이 내린 뒤 더럼에 남은 이들의 삶은 어땠을까? 빌리가 마을을 떠나고 그곳에 홀로 남은 게이 소년 마이클은 어떻게 살았을까? 민영화된 산업으로 인한 실업을 공공 부조 없이 개인이 온전히 떠안아야 한다는 것이 사실상 예정된 상황에서 탄광에 복귀한 노동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미래를 감당해야 했을까? ‘미래가 없는’ 고향을 떠나는 빌리는 자신의 어린 시절과 단절하게 될까? 원작 영화를 참고한다면, 이러한 질문에 답할 수 있다. 런던으로 떠나는 빌리가 더럼 마을에 ‘두고 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빌리에게 체화된 다양한 역사의 유산 속에서 빌리가 날아오를 수 있었다고.


 


가르침과 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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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는 ‘춤’이라는 주제를 활용해 가르침과 배움의 복잡하고 상호적인 과정이 나타나는 작품으로서, 빌리에게 발레를 가르쳐 준 ‘미세스 윌킨슨’과 그를 통해 춤을 배우고 성장하는 빌리의 모습은 스승과 제자라는 (인격적) 관계와 그 사이의 역동적 과정을 상기시킨다. 빌리와 윌킨슨의 교류는 ‘춤’이라는 조건이 매개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극적이며, 이 텍스트에서 춤을 춘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자아와 관계 맺는 방식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춤’에 대한 본질을 잘 보여주는 넘버는 윌킨슨과 빌리, 그리고 피아노 반주자 브레이스 웨이트가 구성하는 ‘Born to boogie’다. 외부적인 힘(규율)을 자신의 신체에 체화시키고 내 몸을 통제하는 '테크닉'적인 측면, 그리고 본능, 감정, 무의식의 에너지를 자신의 신체를 통해 표현하고 외재화하는 창조적인 능력을 동시에 함양해야 ‘춤’은 완전해질 수 있다.

 

전자가 감각을 스스로 통제하는 이성의 측면이라면 후자는 본능과 창조의 에너지로서, 춤을 배운다는 것은 자신을 통제하면서도 동시에 파괴하고 폭발하게 만드는 변이의 영역이다. 파업 투쟁 당시 토니가 다치는 상황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윌킨슨과 함께 몰래 가려던 로열 발레 스쿨의 오디션에 참석하지 못하게 된 빌리가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인 ‘Angry dance’에서는 후자, 즉 춤의 본능적이고 창조적이면서도 스스로의 자아를 파괴함으로써 발전하는 특성이 분노한 빌리의 춤을 통해 나타난다. 또한 이는 런던에서의 오디션에서 빌리를 향한 마지막 질문, 즉 춤을 출 때 어떤 감정이냐고 묻는 심사위원에게 ‘감전’이라는 단어를 활용해 답하고 언어 대신 춤(몸짓)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빌리의 말과 연속된다(‘electricity’). 빌리가 이야기하는 나(자아)를 잃어버리는 ‘매몰’의 감각은 역설적으로 자기충족적이고 일체가 되는 감각과 연속되고, 이는 자신의 이성에 의해 예술적 감각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전염/오염되듯 발레라는 새로운 세계가 몸으로 침투(침입)함으로써 가능하다.

 

빌리가 춤을 출 때 느끼는 감정을 전기가 흐르는 감각으로 표현했던 것처럼, 오염, 침입, 침투, 전염, 그리고 고통의 모티프는 (춤과 예술이라는 소재를 통해 더욱 극화되어 표현되긴 하지만) ‘배움’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가지는 속성이기도 하다. 배움은 단순히 지식의 축적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자아와 타자의 경계를 파괴함으로써 다른 세계와 맞닿고 이를 통해 나의 세계가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훈련을 통해 이러한 인지적 과정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빌리가 윌킨슨의 발레 수업 속에서 얻은 것은 춤을 출 때의 열정적인 감각에 대한 인지와 이를 창조적인 힘으로 전환시키는 방법이다.

 

딸 데비와 불륜으로 해고당한 알코올중독자 남편을 두고 발레 수업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것이 암시되는 윌킨슨은 첫 등장부터 시니컬하고 냉소적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빌리라는 ‘원석’을 알아보고 그를 열정적으로 가르치는 스승이다. 런던에 가야 하는 빌리와 마지막 인사를 할 때 윌킨슨은 크게 기뻐하거나 놀라는 모습 없이 마치 처음 만났을 때의 시니컬한 모습으로 자신이 가르쳐준 것이 얼마나 쓸모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며, 런던의 발레 학교에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곳으로 다시 돌아오지 말라는 첨언과 함께. 윌킨슨의 이러한 태도는 ‘더 큰 세상’을 향해 나아가며 작별이 예정된 제자가 떠날 수 있도록 벅찬 감정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마음 혹은 겸손의 표현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러한 윌킨슨의 대사를 가르침과 배움의 상호성이라는 틀을 통해서 본다면, 배움과 앎의 과정이 기존의 지식 체계를 부정하면서 갱신된다는 것, 그렇기에 스승인 자신도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이미 인식하고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윌킨슨의 이러한 교육 태도는 단순히 스승과 제자 간 위계를 기반으로 한 지식의 주입이 아닌 배우는 이의 의지를 일깨움으로써 해방적 주체로 기르는 것을 강조하는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생각나게 한다. 윌킨슨이 떠나는 빌리에게 마지막으로 건네는 ‘행운을 빈다’는 대사는 뛰어난 제자에 대한 애착과 스승의 자질에 대한 그의 태도를 함축한 말이다.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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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서만 볼 수 있는 장면 중 공연예술이라는 장르적 특성이 극대화된 ‘드림 발레(Dream Ballet)’ 장면은 2막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가족에게 발레를 한다는 것을 들킨 1막의 마지막 장면 이후, 시간이 흐르고 크리스마스 날 밤이 된 상황에서 빌리는 모두가 떠나고 남은 빈 마을 센터에서 미래의 자신을 상상하면서 ‘성인 빌리’와 함께 춤을 춘다. 차이코프스키가 작곡한 발레 <백조의 호수>에서 성에서 빠져나온 왕자 지그프리트가 향하는 호숫가 장면과 마지막 결말이 합친 음악을 사용하는 드림발레에서는 서로가 서로의 환상이자 ‘그림자’다. 어른이 된 빌리의 환상은 현재 빌리를 지탱하고, 마치 클래식 발레에서 발레리노가 발레리나를 ‘리프트’하듯 빌리가 하늘에 닿도록 들어 올리고, 최종적으로 빌리를 날아오를 수 있게 한다. ‘꿈’을 꾸는 현재의 빌리와 윌킨슨에게 배웠던 것처럼 의자를 돌리면서 균형을 잡고 등장하는 미래의 빌리는 서로를 지탱하고 의존하는 역-관계이면서, ‘현실’와 ‘환상’을 구별할 수 없는 공간적 만남이다.

 

‘드림 발레’ 장면의 마지막이 인상적인 이유는 연출상 아버지 재키가 빌리와 대각선에 서 있는 그림자이자 환영인 성인 빌리의 모습을 겹쳐보게 된다는 점이다. 재키는 빌리의 춤 실력, 열정, 재능을 통해 미래의 빌리의 모습이자 환상이면서 희망을 본다. 그 이후 빌리가 발레를 하는 것을 반대하던 재키는 윌킨슨에게 찾아가서 발레 오디션에 대한 정보를 묻고,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파업 대열에서 이탈하여 탄광에 다시 나가기를 선택한다. 불확실한 미래이지만 미래에 대한 환상은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며 현재의 시간에 개입한다. 프로 발레리노가 된 빌리의 미래를 보여주는 원작 영화와 달리 뮤지컬은 빌리의 미래를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은 채, 탄광에 복귀하는 노동자들을 뒤로 하고 죽은 엄마(‘데드 맘’)의 환영에 작별을 고한 뒤 마이클을 남겨 두고 떠나는 빌리의 미래로 막을 내린다. 다만 ‘드림 발레’ 장면에서 꿈이자 환상으로서 등장하는 ‘성인 빌리’의 존재가 마치 예언적 실체로서 빌리의 미래를 증명하며, 이때 현재와 미래의 공존은 비동시적인 것을 병치하는 무대 연출의 특수한 문법을 반영한 것이다.

 

내가 보았던 회차는 <빌리 엘리어트> 초연에서 ‘빌리’ 역으로 참여했던 ‘1대 빌리’ 출신이자, 올해 유니버설발레단(UBC)에서 수석 무용수로 승급한 임선우 발레리노가 ‘성인 빌리’를 맡았다. 임선우 발레리노가 맡은 ‘성인 빌리’의 특징은 자신의 과거이기도 했던 빌리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어준다는 점이다. 어린 빌리와 교감하며 환상의 ‘비현실적인’ 이미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구현된, 생생하게 숨쉬고 있는 것 같은 웃음을 짓는 성인 빌리의 모습을 통해서 앞으로의 어린 빌리가 살아갈 삶의 궤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의 첫 넘버인 ‘The stars look down’에서 빌리가 부르는 가사처럼, 어둠을 지나 날아오를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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