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의 클래식 발레 <백조의 호수>에 대한 설명은 국립발레단과 유니버설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두 버전을 비교한 관련 기사를 참고하시길 권합니다.
순백색의 클래식 튀튀를 입은 백조의 형상이 등장하는 발레계의 고전, <백조의 호수>라는 작품을 성공적으로 재해석한 ‘매튜 본(Matthew Bourne)의 <백조의 호수>’가 탄생 30주년을 맞아 내한하며 서울 마곡에 위치한 LG아트센터에서 2025년 6월 18일부터 29일까지 공연된다. 뉴 어드벤쳐스 프로덕션(New Adventures)의 수장인 매튜 본은 <백조의 호수> 외에도 <로미오와 줄리엣>(프로코피에프 작곡), <호두까기 인형!>(차이코프스키 작곡) 등 다양한 고전 발레 혹은 고전이 되어가고 있는 발레 작품을 재해석하려는 시도를 이어오고 있는데, 그가 이렇게 강력한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잡고 꾸준한 작업을 이어오도록 하는 것에 1995년 영국에서 초연을 올린 이 작품이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마 위 검은색 삼각형과, 하얀 색 깃털을 연상시키는 하의만 입은 남성 무용수가 연기하는 백조 무리의 모습은 고전적인 발레 속 우아한 백조 이미지도, 역할도, 동작과 전형에서도 벗어난 것이었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초연되자마자 발레계는 물론 문화 산업에 많은 충격을 불러일으켰고, <빌리 엘리어트> 영화에서 성인이 된 빌리가 이 작품 속 백조를 연기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등 장르와 매체를 넘나들며 다양하게 영향을 미쳤다. ‘댄스 뮤지컬’이라고 명명되기도 하는 매튜 본의 작품은 고전 발레의 기본적인 토대 속에서 현대 무용의 파격적 시도를 차용하고, 연극적 서사성이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그의 작품 안무 경향은 장르의 구분마저 가로지르는데, 주로 연극이나 뮤지컬이 공연되는 장소인 웨스트엔드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이력이 있으며, 토니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원작에 대한 ‘창조적 파괴’
클래식 발레의 대명사인 <백조의 호수>의 다사다난한 창작 및 성공 과정을 고려한다면 ‘원작’과 ‘원 안무’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일수도 있지만, 이 작품을 성공시킨 안무가 마리우스 프티파 기반으로 수 없이 재안무되어 공연되고 있는 다양한 버전의 공통적인 특성은 (‘완벽하게 정의된 원작 안무’는 부재하더라도) 오데트와 오딜/로드바르트의 대립, 백과 흑으로 표현된 이분법적 선악구도, 화려한 궁정과 어두운 호숫가 같은 요소로 표현되는 ‘원작’의 이념형을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추출할 수 있도록 만든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의 특징은 차이코프스키 음악과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와 기본적인 설정을 공유한 채로 배경과 인물의 설정을 바꾸었고, 그 사이 교집합으로 인해 작품 속 왕자(고전의 지그프리드)가 겪는 환경 변화와 장 구분이라는 흐름이 고전과 유사하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고전 속 지그프리드 왕자의 성과 호수로, 그리고 다시 성에서 호수로 이어지는 공간 변화는 이 작품 속에서 왕실이 묘사되는 현실과 백조와 함께하는 환상이 반복되는 것과 유사하다. 그래서인지 차이코프스키의 음악 역시 약간의 부분적인 수정을 거쳐 거의 그대로 활용되고, 러닝타임 역시 기존 고전과 동일하다. 이는 매튜 본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호두까기 인형!>이 러닝타임을 창작 의도에 맞게 대폭 줄이고 전면적인 서사의 수정에 따라 음악을 전반적으로 재배치한 것과 대조된다. 그리고 기존의 흑조(오딜)과 백조(오데트)를 같은 발레리나가 맡는 전통 역시 이 작품에서는 백조와 무도회에 찾아온 낯선 남자(the stranger)를 한 무용수가 연기하는 것으로 유지된다. 고전에서 오데트와 오딜이 선과 악의 대립을 표현하는 상징이라면, 매튜 본의 작품에서 1인 2역의 차이는 단순한 도덕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고전의 창조적 파괴, 성공적인 재해석을 위한 요건은 원작의 본질을 파악한 후 그것을 영리하게 반전시키거나 뒤틀고, 변주를 주는 것이다.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에서 갓 성년이 된 왕자 지그프리드의 알 수 없는 공허함, 그리고 미성숙함이 어떻게 백조라는 환상적인 존재와 조우한 후 파국으로 치닫는지에 관한 분위기를 포착한 후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고전을 비틀었다. 비극적인 사연으로 인해 신비한 동물성을 가졌지만 동시에 인간성을 지니고 있는 가련한 백조 오데트의 이미지가 신비하고 강력하면서 위압감을 지닌, 다소 ‘야만적’으로 느낄 수 있는 동물성을 지닌 남성 백조의 이미지로 전환되었고, 환상으로의 도피라는 고전과의 공통분모 속에서 왕자는 백조 무리와의 합일, 조화를 희망하는 것까지 나아간다. 자신에게 무관심한 어머니 여왕과 압박을 주는 왕실 생활, 여자친구가 수행 비서에게서 돈을 받는 모습을 본 후 느끼는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없다는 두려움 속에서 왕자는 유서를 쓰고 자살하기 직전 호수에서 백조들을 만나고, 현실의 제약 조건에서 벗어난 백조의 강력한 환상적인 이미지에 이끌리게 되는 것이다. 고전 <백조의 호수>의 호숫가 장면이 우아하고 신비로운 발레 블랑(ballet blanc)의 정수라면, 이 작품은 백색의 이미지 뒤의 질료를 반전시키며 역동적인 남성 군무를 선보인다.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나타나는 매튜 본의 백조 무리들의 춤은 고전을 배반하면서 동시에 고전을 갱신하는 창조의 과정이 그대로 녹여져 있는 장면이다.
매튜 본이 고전을 현대 무용과 서사극이 뒤섞인 복잡한 작품으로 재안무하면서 다소 난점이 되곤 하는 형식 상의 차이를 영리하게 극복한 지점 역시 이 작품을 성공적인 재해석으로 만든다. 고전 속 1막 지그프리드의 성 내부 장면 속 ‘파 드 트루아’는 그 음악과 안무의 아름다움과 별개로 서사의 흐름과 크게 상관이 없는 전형적인 ‘디베르티스망’이지만, 고전 발레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지 않는 이 작품에서는 고전의 파 드 트루아에 연주되는 음악이 사용될 때 ‘극중극’이라는 장치를 사용하여 나방과 나무꾼, 숲 속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웃음을 주면서 동시에 그 극중극의 ‘시청자’로서 왕자와 여왕, 여자친구와 수행비서의 관계를 무대의 배경으로 등장시킨다. 서사의 진행에 필요한 왕자의 나약함과 여자친구를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여왕의 상황을 전달하면서 객석의 집중력을 유지시키기 위해 고전 발레의 특정한 환상성을 패러디하며 ‘개그 포인트’로도 작용하도록 치밀하게 장면을 설계한 것이다.
이처럼 디베르티스망이 등장하는 기존의 장면에 새로운 맥락을 부여하는 방식의 변용은 고전 <백조의 호수>에서 흑조 오딜이 등장하는 궁정 무도회 장면 속 각 나라의 민속춤에 사용되는 음악과 그 음악이 사용되는 장면을 변화시키면서 또 한번 반복되는데, ‘낯선 남자’가 각 나라의 공주들과 여왕, 그리고 왕자와 같이 추는 2인무의 연속으로 표현하며 그 안무 속에서 주요 인물들 간의 복잡한 관계의 역학을 드러낸다. 왕자는 백조에게 그랬듯이 낯선 남자에게 이끌리지만, 낯선 남자는 참석한 다른 나라의 공주들뿐만 아니라 왕자의 어머니인 여왕과 여자친구를 유혹하고 결국 정신적 불안으로 폭발한 왕자는 모두 있는 자리에서 총을 꺼내는데, 낯선 남자와 다른 캐릭터들의 춤은 그 과정으로 가기까지 감정선의 빌드업 과정으로 기능한다.
강렬한 백조의 이미지가 가지는 일탈성
<백조의 호수>를 볼 때 지그프리트의 아버지가 부재하고 어머니인 여왕이 성을 통치하고 있다는 설정은 의심을 하자면 참 흥미로운 부분이다. 마법사 로드바르트의 딸이 하필 오데트와 똑같이 생긴 오딜인 것처럼 말이다. 고전의 빈 틈 혹은 상상할 빈 곳을 파고드는 것이 고전 ‘이후’의 작품들이 해야 할 일이다. 매튜 본은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에 내재한 은폐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좌절 혹은 실패라는 주제를 전면화하면서 규범적인 남성 되기에 실패한 왕자를 중점으로 작품을 전개하며, 여왕의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해 계속해서 압박감을 느끼는 왕자의 상황 속에서 백조를 왕자 내면의 불안과 정신병리의 상징물이자 감정적인 대립항으로 제시한다. 사실 작품에 대한 해석이나 창작에 있어서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동화의 재해석 혹은 현대화 방식이고, 고전적인 러시아 발레의 계승자였던 볼쇼이 발레단의 전 예술감독 故 유리 그리고로비치의 재안무 버전에서 로드바르트가 수행했던 역할이나 지그프리드 내면의 반영이라는 해석 역시 비슷하다. 그렇지만,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가 이러한 고전의 전형적인 해석과 차별화되는 것은 남성 백조와 왕자의 관계를 성애화함으로써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규범성 밖으로 더욱 나아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 속 강렬한 백조의 이미지가 고전 발레 속 지그프리드와의 애정의 대상인 오데트와 지그프리드를 위협하는 로드바르트를 합한 이미지로 재현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강인함과 유해한 로드바르트식의 ‘남성성’의 이미지는 매혹과 호기심의 대상으로 기능하며, 왕자를 향한 동성애적 성적 에너지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해석의 연장선상에서, 3막에 등장하는 ‘낯선 남자’라는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위협적인 에너지와 성적 매력은 단순히 도덕적 이항 대립의 한 축을 담당하는 흑조 오딜의 평면적인 사악함과 등치되지 않는다. 백조와 같은 무용수가 맡는 ‘낯선 남자’가 여왕과 여자친구, 다른 공주들에 이어 왕자를 매혹하고, 그와 어머니 여왕과의 관계에 분노한 왕자가 총을 들고 난동을 부릴 때 왕실에 있는 이들은 비서의 오인사격으로 인한 여자친구의 죽음이라는 필연과 우연이 뒤섞인 파국을 맞이한다. ‘낯선 남자’라는 명칭에도 알 수 있듯이 이방인,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인 그는 왕자의 환상 속에서 부리를 그리고 백조와 같은 행동을 하기도 하고, 왕자를 포함한 모두를 유혹하지만 이 결말에는 명시적인 책임이 없기에 사라진 것 뿐이다. 이방인이 주는 낯섦에 대한 공포는 흥미롭게도 비인간 백조의 형상에도 그대로 재현되어 반복되고, 선과 악이 아니라 인간과 비인간, 현실과 환상의 경계만 작동하는 것이다.
이 작품의 강력한 성애적 에너지는 왕자의 불안과 외적 조건들과 뒤섞여 혼탁해진 상태의 드라마에서 분출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양한 해석도 가능하지만, 왕자의 백조를 향한 감정을 단순히 (성애를 배제한) 동경 혹은 이상적 모델, 부성애에 대한 갈망으로’만’ 독해하는 것은 이 작품의 많은 부분을 놓치는 것이다. 고전 발레가 엄격한 젠더 구분과 그것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형식적 미학으로 이루어졌다면, 매튜 본의 이 작품은 규범적인 아름다움 바깥의 미학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오픈리 게이이기도 한 매튜 본의 안무 속 고전적인 백조 이미지의 해체와 재구성은 이 작품이 초연된 이후 퀴어 문화와의 연관성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남성 동성애를 주된 서사와 주제로 삼는 발레작품으로 꾸준히 언급되고, 분석되도록 했다.
작품에 삽입된 1980년대 이후 영국이라는 외적 맥락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속에서 강력한 여왕과 왕자의 관계, 왕자를 감시하듯 하는 수행 비서의 존재, 그리고 왕자의 여자친구의 모습은 20세기 후반 영국 왕실 스캔들이라는 외적인 배경을 반영한다. 왕실의 일원들은 왕자의 삶을 감시하듯 하며, 다른 남자들에게 구애를 받는 여왕은 마이요의 <로미오의 줄리엣> 속 줄리엣의 어머니 레이디 캐퓰릿이 연상될 만큼 강한 카리스마를 지녔으며 자신의 후계자로 성장하지 못한 아들을 차갑게 대한다. 이상적이지 않은 모자 관계는 물론 왕자의 미성숙함과 무능력함이라는 차원에서 엘리자베스 2세와 찰스 황태자의 모습이 연상되는데, 실제로 무대 배경과 의상 등이 현재 영국의 왕실과 매우 닮아 있다. 작품 중간에 등장하는 SWANK 바(bar) 역시 왕실의 ‘뒷이야기’와 지속해서 발생하는 스캔들을 구체화한 공간처럼 보인다. 또한 왕실 규범을 지키지 못해 실수를 연발하고, 미국의 하이틴 드라마에서 튀어나온 듯한 여자친구의 이미지와 그녀의 운명은 마치 영국 왕실 스캔들에서 등장한 여성들을 응축해 놓은 버전 같다. 영국 왕실에서 인정되지 않은 만남을 이어 왔다는 점에서 카밀라 파커 볼스와 계속 사건사고를 만들고 다녔던 엘리자베스 2세의 여동생 마가렛 공주의 모습이 연상되기도 하고, 비서의 오인 사격으로 여자친구가 죽은 이후 그 사고의 광경을 사진만 찍는 기자들의 모습에서는 노골적으로 다이애나 비의 죽음이 떠오른다.
매튜 본은 이 작품에서 노골적으로 왕실에서 벌어진 스캔들이 연상되는 장면을 배치함으로써 영국 국민의 신뢰를 잃은 왕실의 모습과 황태자의 무능을 풍자하고 있다. 그래서 매튜 본이 지금은 왕이 된 찰스가 황태자이던 2016년 무용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그에게 기사 작위를 받았다는 점은 최고의 아이러니다. 또한 <빌리 엘리어트> 영화에서 성인이 된 빌리가 ‘백조’를 연기하고 있다는 것으로 명시되었는데, 이 작품과 <빌리 엘리어트>의 상호 텍스트성을 생각해보면 여왕의 이미지는 더 의미심장해진다. 마거릿 대처 정권의 탄광 폐쇄 정책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은 <빌리 엘리어트>가 동시에 (대처 정권의 성소수자를 탄압하는 정책 방향을 생각해보면) 젠더 규범 위반자에 대한 혐오에도 저항하는 텍스트라는 점은 관련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창작자에 의해 만들어진 이 작품 역시 관련된 방향으로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
전반적으로,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는 당시 영국의 시대상이라는 외적인 맥락이 짙게 개입된 작품이며, 따라서 당시 영국의 상황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제되어야만 깊은 이해가 가능한 텍스트이다. 이러한 특징이 이 작품을 새로운 ‘발레계의 고전’으로 만드는 것에 걸림돌이 될 지, 혹은 보리스 에이프만의 <붉은 지젤> 같은 작품처럼 시대적 상황과 그러한 사회에 대한 반항과 저항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는 문화적 창작 시도가 담긴 역사적 텍스트로 오히려 생명력을 불어넣을지는 후대에 달린 일이다.
* 이 기사문에 쓰인 사진의 출처는 LG아트센터(@lgartscenter)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