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칼럼·에세이

 

 

버킷리스트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기억 저편 어딘가에 묻혀있던 게 휙 하고 떠올랐다. 수능을 앞두고 있었던 열아홉의 여름과 가을 사이에서, 지나치게 두꺼운 몇 권의 문제집 사이에 파묻혀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을 홀로 달래야 했었다. 그때 잠깐이나마 불안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게 해주었던 건, 반짝이는 미래를 상상하는 일이었다. (이후엔 반짝거리기만 했던 상상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뤄야 했지만 말이다) 하고 싶은 일들을 상상하고, 나이나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적어 내려갔었다. 열아홉의 버킷리스트였다.


소개는 꽤 거창하게 했지만, 그 몇 가지의 ‘버킷리스트’를 적어두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채로 살았다. 고작 8개를 적어두고 다 완성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다시 바쁘게 지냈으니, 당연히 그걸 이뤘는지 다시 체크조차 하지 못했다. 꼬박 몇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다시 찾기 위해 메모장을 뒤적거렸더니 기특한 아이클라우드가 그때 그 버킷리스트를 저장해둔 것 아닌가. 그러니 이건 그 열아홉의 내가 적어 내려간, 조금 우스울지도 모르는 버킷리스트에 대한 회고록이다.


 

타투 받기 (핸드포크로)

어렸을 때부터, 성인이 되면 할 수 있는 것들을 꼭 다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다. 성인이 되면 꼭 술도 마시고, 담배도 피고, 타투도 받고 싶었다. 성인이 되고 막상 그것들이 모두 해금되자 나는 조금만 술을 마셔도 얼굴이 토마토가 되는 체질에, 담배 냄새는 그렇게 좋지도 않고, 생각보다 겁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스스로 알게 되었지만.


사실 이 항목은 지금도 버킷리스트를 쓴다면 그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열아홉의 버킷리스트가 한 해씩 뒤로 미뤄지다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지금도 받고 싶지만 받지 못했다는 얘기다. 당장 며칠 전만 해도 마음에 드는 타투이스트의 SNS 계정을 발견해 예약창까지 들락날락했던 걸 생각하면, 버킷리스트에 첫 번째로 들만 하다고 스스로 평가를 내려주고 싶다.



y와 술 마시고 밤새우기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성인의 합법적인 일탈에 대한 열렬한 환상을 가진 학생이었다. y는 같은 중학교에서 만나 졸업 후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여전히 단짝처럼 애틋한 친구다. 통하는 점이 많아 y와 몇 개의 맥주캔과 함께 이런저런 얘기를, ‘우리가 이렇게 어른이 되었다’라는 감각을 그렇게도 느끼고 싶었나 보다. 정작 열심히 써두고 버킷리스트의 존재조차 까먹어버렸으니, 이룬 걸 체크하는 것조차 잊어버렸지만.


y와는 스무 살이 되기 직전의 12월 31일에 만나, 24시간 카페에서 자정을 기다리다가, 술집으로 향하는 길바닥에서 어정쩡한 20대의 첫 1월 1일을 맞이했다. 그리곤 몸에도 맞지 않는 술을 열심히 마셔댔으니 이 항목은 이룬 셈이다.



운전면허 따기

흔히들 대학 입학을 기다리는 20살의 1~2월이 인생에서 가장 할 일이 없는 시기라고 하지 않는가. 나도 나름 계획이라는 걸 세웠다. 이 시기를 활용해 운전면허를 따두는 것이었다. 문제는 계획은 있었지만 실행이 없었다는 점이었지만. 쌓아둔 피로가 많아서 자느라 바빴고, 눈을 뜨면 놀러 나가기에 바빴다. 내가 그렇게 놀러 다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리고 또 하나, 나는 겁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 수능 직후는커녕, 아직도 따지 못했다.

이번 연도의 할 일이 하나 더 추가된 것 같다.



휴대폰은 꼭 프로로 바꾸기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인가 하겠지만, 수능이 끝나면 고등학교에 다니는 3년 내내 썼던 휴대전화를 바꿔 달라고 요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래도 고등학교에 입학하며 휴대폰을 고를 때 기본 모델을 선택했었던 게 여러 가지 이유로 불만이었던 것 같다. 일단 기본 모델의 외형이 그다지 내 취향에 들어맞지 않았다. (그 당시 사용했던 폰은 아이폰 11 기종이었다.)


이건 이뤘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당시에는 ‘인덕션’이라며 우스갯소리가 돌았던 프로 기종으로 휴대폰을 바꿨다. 조금 부주의한 덕에 몇 번이고 떨어트리면서 꽤 험하게 다루고 있지만, 지금까지 튼튼하게 버티고 있는 걸 보아 이건 꽤 쓸모 있는 항목이었던 것 같다. 이게 뭐라고 버킷리스트라는 거창한 이름 아래에 휴대폰은 프로 기종으로 바꿀 것을 적어두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지만…



사토미 필모 깨기

여기서 사토미는 일본의 여배우 이시하라 사토미를 말하는데, 학생 때 ‘인생 일드(일본 드라마)’로 사토미가 출연한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를 꼽을 정도로 그 작품을 좋아했었고 지금도 그렇다. 나와 같이 잡지 에디터를 꿈꾸는 주인공의 모습이 어딘가 멋져 보이기도 했고, 주인공인 ‘에츠코’를 연기한 사토미의 연기가 극의 흐름을 주름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드라마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렇기에 수능이 끝나고 시간이 많아진다면, 그의 필모그래피 속 작품을 모두 시청해 보고 싶었다.


이후에 사토미가 출연한 또 하나의 유명작인 <언내추럴>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걸 ‘깨지’ 못했으니, 이 항목도 이루지는 못했다. 일본의 탑배우인 그의 작품을 모두 보겠다는 열 아홉의 패기어린 열정도 웃기지만, 그때는 그만큼이나 진하고 선명했던 애정이 팔랑팔랑 기억의 저편으로 날아가 버린 것도 같아 어딘가 신기하다. 지금도 그를 애정하는 마음은 남아있지만 말이다.



모동숲 열심히 하기

뒤로 갈수록 버킷리스트가 조금씩 소박해지는 게, 아무래도 대입 스트레스가 컸던 것도 같다… 아니면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걸 적는 게 버킷리스트의 뜻이라고 오해했던가….


아무튼 대입이 끝난 직후 스위치를 구매해 <모여봐요 동물의 숲>을 하며 많은 시간을 보냈으니, 이것도 이뤘다. 그 당시 나의 낙은 전기장판이 틀어진 침대 위에서 왼쪽엔 고양이, 오른쪽에는 닌텐도 스위치를 끼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때 열심히 해두었던 걸 토대로, 지금까지도 까먹을 만하면 ‘모동숲’에 접속하므로 이건 완벽히 이룬 셈이다.



에어팟 맥스 사기

믿기지 않겠지만 이게 이 버킷리스트의 마지막 항목이다. 심지어 하나를 더 적고 싶어 칸을 만들었다가 그대로 잊어버렸다. 당시 에어팟 맥스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었는데, 휴대폰은 물론 이어폰, 노트북, 워치, 패드까지 모두 애플을 사용하던 진성 사용자인 나는 이제 헤드셋을 가지고 싶었다. 문제는 내가 헤드셋을 자주 끼지 않는 사람이라는 점이었지만.


결과만 보자면 이 항목도 이루었긴 했다. 하지만 원래도 헤드셋을 잘 착용하지 않는 터라, 에어팟 맥스의 무게가 꽤 되는 점 때문에 목에 부담이 되기도 해서 몇 번 많이 쓰고 다니지는 않았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몇 번을 이사하면서 착실하게 가지고 다녔지만, 지금도 그다지 자주 착용하진 않는다.

 

 

Group 8.jpg

문제의 버킷리스트

 

 

수능도 끝나지 않은, 성인도 되지 못한 열아홉의 버킷리스트는 그 거창한 이름에 반해 너무나도 소소한 것들이었다. 심지어는 어이없는 웃음이 나기도 하는 항목들이 대다수다. 그렇지만 차라리, 그렇게 소박한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꼭 이루고 싶은 것들’과 ‘이뤄야 하는 것들’ 사이에서 그것들의 무게가 점점 무거워지는 걸 느낀다. 거창한 것을 이뤄야 할 것 같고, 누가 보아도 납득이 돼야만 할 것 같은 것을 써야만 할까 봐 마음이 축 처지기도 했었다. 아무도 보지 않는데 보여줘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이었다.


어쩌면 열아홉의 보잘것 없는, 하지만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의 집합인 버킷리스트처럼, 그렇게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여전히 단순할지도 모른다. 이뤄야 하는 것들이 무거울 수 있지만, 그 뒤로 달콤한 행복감이 따라온다는 것도 배웠다. 물론 그렇게 이뤄낸 것들은 생각보다 별로일 수도 있고,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에 모든 것이 퍼즐처럼 맞춰질 수도 있다. 뭐가 됐든 실행되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버킷리스트라는 거창한 이름 아래 적는 한 자 한 자가 소중해진다. 열아홉의 버킷리스트처럼, 열정을 가득 안고 별 소박한 것들을 적어 내려가던 그때처럼 반짝반짝 꿈꿀 수 있기를. 생각하면 이루어진다는 말을 여전히 믿는다. 오늘은 오랜만에 다이어리에 새롭게 적어볼 것이 생긴 것 같다.

 

 

 

정현승 tag_아트인사이트.jpg

 

 

정현승이 에디터의 다른 글 보기
고개를 넘고 넘어서!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