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플리백의 이야기가 낯선가?
플리백이 자신을 감추기 위해 겹겹이 두른 포장지를 모두 뜯어보면, 정말 당신과 그렇게 다른가?
플리백의 문제는 섹스를 너무 좋아한다는 데 있지 않다. 만약 그랬다면 이야기는 오히려 간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플리백의 이야기—무용담처럼 펼쳐지는 애널 섹스, 섹스팅(sexting), 원나잇, 야외플 등등등—를 듣다 보면 그녀가 사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니, 단 한 가지만 빼고. 외로움. 플리백은 엄청나게 외로워하고 있다. 매 순간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 절규하고 있고, 찢어지고 있다. 자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 없는 사람은 사라지지 않기 위해 매 순간 싸운다.
플리백은 갖은 수단을 동원해 치열하게 싸운다. 쓰레기처럼 살며 남들이 자신을 미워해 주기를, 버려주기를, 함부로 대하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아주 비겁한 짓인 동시에 아주 용감한 짓이기도 하다. 비겁한 이유는 자신이 사랑받을 수 없다고 믿는 탓에 정말로 아무도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고, 용감한 이유는 그럼에도 여전히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이를 부정하겠지만.
플리백은 수십 번, 수백 번 자신을 내던지고 또 내던진다. 그리고 사람들이 떠나가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는다. 예상 범위 안의 일인 것처럼. 자신이 연출한 스탠드업 코미디의 각본인 것처럼. 하지만 모순되게도 자신을 내던지는 행위 자체에는 희망이 실려 있다. 떠나지 않을 누군가를 언젠가는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말로는 ‘없을 거야’라고 하면서도 플리백은 영원히 누군가를 찾고 있다.
나는 플리백의 이야기가 낯설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모순된 욕망이 낯설지 않다. 사랑받을 수 없을 거라 믿으면서도 사랑받길 원하고, 한없이 가볍게 행동하면서도 누군가 그 이면을 봐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 익숙한 욕망을 무대 위에서 지켜보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플리백은 감추는 것에 서툴다. 교란이라도 시키려는 듯 무대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내뱉는 일관성 없는 이야기와 과감하고 산만한 행동은 오히려 그녀가 쓴 얇디얇은 가면의 존재를 부각시킬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조각난 플리백의 일상 속에서도 그녀의 가면을 벗겨내고, 정신없이 흐르던 시간을 원래의 속도로 돌려놓는 사람이 있다.
그는 카페의 단골손님 ‘조’다. 플리백이 운영하는 카페에 들어설 때마다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라도 하듯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손님이다. 플리백은 매일 같은 시간 카페를 찾는 조의 요란한 등장을 자신도 모르게 기다린다. 끊임없이 바뀌는 플리백 주변의 사람들 사이에서 조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 존재다. 무엇보다 플리백은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섹스를 통해 그와의 관계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버릴 수도 없다.
조는 자그마한 우쿨렐레를 자주 들고 다닌다. 플리백이 어디서 난 거냐고 묻자, 조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우쿨렐레를 주곤 한다고 답한다. 어느 날 플리백은 거리에서 우쿨렐레를 연주하는 조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된다. 플리백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선다. 색색의 조명이 조를 바라보는 플리백을 비추고, 객석에서 바라본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외로워 보인다.
조를 바라보는 플리백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아마 질투였다고 생각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 하는 플리백은 정작 그 증명에 가장 필요한 타인의 마음을 얻는 법을 모른다. 어쩌면 모든 외로운 사람이 그렇듯이. 그런 플리백에게 밤거리에서 마주한 조의 모습은 더없이 슬픈 장면이 아니었을까. 조용히 노래하면서도 자연스럽게 사람들을 자신의 곁으로 불러 모으고, 그들 사이에서도 오롯이 자신으로 존재하는 사람. 플리백이 ‘unfuckable(섹스할 수 없는)’ 노인이라고 여겼던 조는 그렇게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고도 사랑받는다. 그렇다면 충분히 ‘fuckable(섹스할 수 있는)’한 자신은 왜 사랑받지 못하는가.
이후 조 앞에서 상의를 벗고 자신과 섹스하자고 소리치는 플리백의 행동 역시 나는 그 질투의 연장선처럼 느꼈다. 자신이 아는 유일한 방식으로 조를 끌어내리고 싶은 마음. 당신도 나처럼 비참해졌으면 좋겠다는 못생긴 마음. 조 역시 자신과 같은 욕망을 가진 사람임을 확인할 수 있다면, 적어도 자신만 홀로 실패한 사람은 아니게 될 테니까.
플리백의 얼굴에는 습관처럼 조소가 떠올라 있지만, 그 순간 발가벗겨져 추락하는 것은 조가 아니라 플리백이다. 조는 플리백의 몸에서 얼굴을 돌리며 움츠러든다. 그러나 조의 거절은 단순한 거절인 동시에 관계의 지속을 뜻하기도 한다. 조는 플리백과 섹스하지 않음으로써 그녀가 익숙한 방식으로 관계를 망가뜨리는 것을 거부한다. 플리백이 스스로를 내던졌는데도, 조는 떠나지 않는다. 어쩌면 플리백이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것은 이런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반드시 그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해 주는 일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그 사람이 자신을 미워해 달라고 애써 증명하는 것들을 믿어주지 않는 것,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방식에 동참하지 않는 것, 그럼에도 곁에 남아 있는 것이 사랑일지도 모른다. 조는 플리백을 구원하지 않는다. 다만 플리백이 자신을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다.
그러니 다시 묻고 싶다. 당신은 플리백의 이야기가 낯선가?
사랑받을 수 없다고 믿으면서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 주기를 기다리고, 떠날 이유를 잔뜩 만들어놓고도 그 모든 이유를 무시하고 남아줄 사람을 기대하는 마음. 자신을 내던지면서도 누군가 받아주기를 바라는 마음. 겹겹이 두른 포장지를 모두 뜯어낸 뒤에도, 플리백은 정말 당신과 그렇게 다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