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에 대한 연극
영화에 대한 영화가 언제나 흥미롭듯, 연극에 대한 연극은 언제나 흥미롭다. 그것은 아마 연극 자체가 흥미로운 장르이기 때문일 것이다. 저녁 8시 대학로에서는 수백 개의 세계가 동시다발적으로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그 말처럼, 객석 조명이 암전된 뒤 조명이 켜지면 극장에서는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이 세계는 연출이 계획하고 배우가 선언하는 대로 굴러간다. 이 세계는 마땅히 대본대로 흘러가야 한다. 이 세계를 마땅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침묵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관객은 관찰자이다. 그들은 숨죽여 세계를 관찰한다. 세계를 구성하는 소품에서도 소음이 나서는 안 된다. 그들은 조용한 배경으로서만 존재한다. 주연은 주연답게, 조연들은 조연답게 대사를 쳐야 한다. 대본에 웃으라고 적혀 있으면 웃어야 하고, '사이' 라고 적힌 순간에는 침묵해야 한다.
극장 안에서 관객이 소리를 내면 그것은 ‘관크’가 되고, 배우가 대본대로 연기하지 않으면 그것은 ‘참사’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규칙을 지켜야만 연극이 성립하는가? 관크와 참사가 가득한 공연, 매끄러운 공연에서 존재해서는 안 되는 ‘노이즈’로 가득 찬 연극은, 연극일 수 없는 것인가?
막이 내리고, 연극을 시작합니다
그나그 프로젝트의 '노이즈'는 마땅하다고 생각되었던 이런 극장의 규칙들을 유쾌하게 전복한다.
이 연극의 주인공들은 매끄러운 연극에서 존재해서는 안 되는 노이즈들이다. 이들은 수년 전 끝난 연극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캐릭터 –혹은 존재- 들이다. 이들은 오래 전 마땅히 퇴장했어야 하는 존재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연극을 하고 싶어 남았다. 어쩌다 찾아온 것인지 모를 관객들 앞에 자신들을 소개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극장 권력’이, 다시 말해 말할 수 있는 것들만 남기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은 침묵하게 만드는 그 ‘암묵적인 규칙’이, 그들의 연극을 시작하지 못하게 한다. 스피커에서 강압적으로 흘러나오는 ‘사이’ 라는 명령은 주인공들에게 침묵을 강요한다.
그러나 완벽한 사이, 완벽한 침묵은 존재할 수 있는가? 암만 조용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소음들은 생겨나게 마련이다. 극장 안에서의 침묵이 아무리 마땅하다 한들, 그것을 완벽히 지켜낼 수는 없다. 완벽한 침묵, 완벽한 사이는 존재할 수 없다. 관객 중 누구 하나는 움직일 것이고, 헛기침을 할 수도 있다. 오퍼레이터에서 실수가 나오는 것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자연스러운 소음들은 주인공들로 하여금 극장 권력의 명령을 어길 수 있도록 해 준다. 이들은 무대와 객석을 넘나들며 음악에 맞추어 놀이를 한다. ‘사이’라는 명령어를 비웃으며 관객 사이를 뛰어다닌다. 웃으라는 명령에는 웃지 않는다. 그들은 마침내 막이 올라야 연극이 시작된다는 규칙마저 부숴 버린다. 그들은 관객과 배우의 사이를 구분하는 ‘막’을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그리하여 막이 내렸고, 노이즈들을 침묵하게 만드는 극장 권력은 침묵하게 된다. 연극은 시작된다. 동시에, 연극은 끝이 난다.
번데기 상태의 극장
연극이 시작하기 전, 그러니까 관객 입장 전의 극장에 들어가본 적이 있는가? 관객들을 맞이하기 전의 극장은 참 어수선한 매력이 있는 공간이다. 그 순간의 극장은 현실과 가상 세계의 중간 지대로서, 찰나의 가상 세계로 탈바꿈하기 위한 문지방에 위차한다. 아직 새로운 세계로 출발하지는 않았으나 이전의 세계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일종의 번데기와 같은 상태라고 볼 수 있겠다.
그나그 프로젝트의 <노이즈NoEase: 잡음으로 살아내기>는 이 상태의 극장을 무대로 삼는다. 연극을 올려야겠다는 목적성은 갖추고 있으나 어떤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어야 할지는 결정되지 않은 상태, 무엇을 숨겨야 하고 무엇을 드러내야 하는지 규칙으로 정해지지 않은 상태.
그러므로 이들의 극장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는다. 노이즈인 주인공들이 어떤 연극을 올릴지, 어떤 규칙을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지 관객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알지 못한다는 것은 곧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 자유 속에서 관객은 공백을 무한히 채울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극장은 마침내 자유로운 공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