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이란 무엇일까?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사람의 입장에서 다수의 사람이 기이하게 생겼다고 보는 생명체. 괴상하게 생긴 물체. 괴상한 사람을 빗대어 일컫는 말. 잠깐, 괴상하다는 말은 또 무슨 뜻인가? 마땅한 도리나 이치에 벗어나 있는 것. 집약하자면 괴물이란 중심의 ‘정상’에서 벗어난 것들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이 교실에도 괴물이 있다. 남자주인공인 일명 하루, 요시다 하루가 그 ‘괴물’이다. 그는 입학 날부터 등교를 거부하고, 선배를 패버렸다는 피바람이 낭자한 소문을 풍긴다. 학생들은 그를 주의하고 조심한다. 그리고 다시 학교를 나오게 된 괴물은 사실 반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고 싶었지만, 그 마음과 다르게 반에 합류하지 못하고 겉돈다. 괴물이기에 고립되는 건지, 고립되기에 괴물인 건지 알 수 없다.
만화 ‘옆자리 괴물군’은 일본의 만화가 로비코가 연재한 순정 만화로, 이후 애니메이션과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주인공인 시즈쿠와 하루, 그의 친구들인 아사코와 쇼헤이의 사랑과 우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여느 순정 만화의 플롯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야기와 별개로 함께 주목해야 할 점은 따로 있는데, 등장인물과 그들을 둘러싼 ‘괴물’성이다.
애정과 사랑, 그리고 분노를 포함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대로 행동하는 하루의 모습은 괴물보다는 어린아이의 모습에 가깝다. 그런 하루는 스스로 정한 ‘정상성’에 부합하는 경로를 정직하게 걸어가는 모범생 ‘시즈쿠’, 미즈타니 시즈쿠를 만난다. 이 만화의 여주인공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괴물과 모범생의 조합이다. 누군가에겐 날뛰는 '괴물'의 목에 목줄을 채워 제어하는 '사람'의 조합으로 보일 지 모른다.
시즈쿠에게 애정을 느낀 하루는 직진으로 시즈쿠에게 마음을 고백한다. 평정심을 유지하고자 하는 시즈쿠지만,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두 사람이 사랑의 목표를 향해 빙글빙글 돌아가는 동안, 몇 개의 인연이 두 사람 곁에 쌓인다. 다른 맥락이지만 비슷하게 친구가 없는 다른 친구와 진정한 벗이 되기도 하고, 이어지지 못한 사랑 몇 개가 그들의 옆을 지나가기도 한다.
타인과 섞이지 못했던 두 사람에게, 결말이 쥐여주는 것은 인간관계의 확장과 세상을 향한 발걸음이다. 그 과정에서 작품이 주인공이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리는 ‘학원물’이기에, ‘괴물’인 하루 역시 보다 가볍게 표현된다. 하지만 순정 만화의 안전한 결말로만 이 작품을 해석하기에는 조금 더 궁금한 지점이 생기기 마련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옆자리 괴물군> 속 괴물(하루)은 왜 ‘괴물’이 되었던 걸까?
수많은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이기에 중심과 이치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가끔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맞고 그름을 따지는 것에 실증이 생길 때가 있다. 애초에 무엇이 맞는 것인지 누가 정하는 것일까? 그 수많은 이치가 수많은 괴물을 만들어낸다.
친애하던 어른을 잃은 외로움과 괴로움에 쫓겨 괴물이 된 하루도 그렇다. 생명과 소중한 것을 중요시하는 마음씨는 변함없이 갖고 있지만, 친구들을 만나기 전까진 사람들 사이에서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사실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괴물이라는 각인이 괴물을 만들고 있었던 셈이다.
획기적인 말이겠지만, 하루와 시즈쿠, 아사코와 쇼헤이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친구들은 하나하나 각기 다른 괴물이었을지 모른다. 그들은 그저 표면적으로 같은 점이 없기에 서로가 서로에게 공감할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니 그들이 존재 그 자체로 그들이 공명할 때, 비로소 친구가 되고 ‘괴물’은 그 자체로 친구가 된다. 옆자리에 앉은 친밀한 괴물이 된다. 만화 밖 우리의 모습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정상’과 사회의 중심을 중요시하며 그것을 따라왔던 시즈쿠도, 결국은 그것에 속박되지 않은 스스로를 만나게 되는 법을 배웠다. 사회가 괴물로 규정했던 하루로부터. 그것은 시즈쿠 자신도 깨닫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속박이었고, 그 한 끗 차이가 괴물은 괴물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세상에는 많은 ‘괴물’이 살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괴물>(2023)의 두 소년 미나토와 요리는 작품의 후반부, 그들 스스로에게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며 이런 대화를 나눈다. 그들의 이야기 역시 “괴물”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있는 작품이다.
우리는 새로 태어나는 걸까?
그런 일은 없는 것 같아.
없다고?
없어. 원래 그대로야.
그래? 다행이네.
영화 <괴물>(2023) 중, 미나토와 요리의 대화
무사히 시즈쿠와의 사랑과 우정을 얻게 된 하루 역시, “새로 태어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건 누가 누군가를 이해해 주었기 때문이라는 시혜적인 감각이 아니다. 그 대신, 그저 그 자체로, 타인과 닿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또 그들은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괴물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런 사실은 살아가는 데에 그다지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의 모든 괴물이-에디터를 포함하여- ‘정상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날을 꿈꾼다.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들은 그다지도 꼼꼼하게 괴물과 괴물이 아닌 것을 구분해 낸다. 너무 빡빡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다. ‘이 정도 하면 평균은 따르겠지…’ 하는 마음이 또 다른 괴물을 만들어낼지 모른다. 사실, ‘괴물’이라는 건 그저 이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만들어낸 값싼 이름표일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