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우는 수호를 보며 그의 삶이 자신의 이상적인 미래라고 어렴풋이 생각했을 것이다. 이미 자신을 둘러싼 주변부 모든 것에 익숙해진 듯 움직이는 성민을 봤을 땐 부러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호, 성민 두 사람은 모두 창우가 예상했던 삶의 궤도에서 이탈했다. 수호의 장례식장에서 검은 정장을 입고 서 있는 성민을 마주한 창우는 이 궤도가 어딘가 틀어졌음을 직감한다.
이른 나이에 아버지를 잃게 된 것, 내신 성적이 좋지 않음에도 급작스레 회사로 출근하게 된 것, 인생은 원체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 어떤 어른도 이 아이들에게 이러한 현실에 어떤 식으로 대응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이들은 사회에서 흔히 일컬어지는 주류 집단으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채 이전 세대가 구축해 놓은 견고한 메커니즘의 주변부에서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모색 중일 뿐이다.
언뜻 보면 창우는 성민의 부재가 만들어낸 공백을 큰 노력 없이 차지한 것처럼 여겨지기 쉽다. 우리는 앞으로 창우가 성민이의 발자취를 그대로 이어갈 거라 예상한다. 사회는 너무나도 쉽게 구조적 폭력의 대물림을 상상하고 이를 불가피한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앞으로 이어질 창우의 선택을 함부로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프레임 속 청소년 노동자의 주체성을 보호한다. 영화는 그저 인물과 어느 정도 적당한 거리감을 둔 채 그의 행적을 절제된 시선으로 포착할 뿐이다. 창우가 기타로 연주하는 헨델의 '울게 하소서'는 영화가 그려내는 담담하면서도 투박한 연출에 감정적인 선율을 더하며 조화를 이룬다.
'나를 울게 하소서, 이 잔혹한 운명을 슬퍼하게 해 주세요'
지금까지 신파를 억누른 채 정제된 형태로만 표현한 영화는 창우가 기타를 치는 장면에서 노래 가사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감정을 드러난다. 이를 연주하는 창우의 팔에는 곳곳에 상처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의 손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악은 사고 현장에서 무차별하게 희생된 어린 넋들을 기르기 위한 추모의 선율을 닮아있다.
그동안 우리는 미디어가 노동자를 하나의 집단적 이미지로 성급하게 재단하거나 이들의 불행 서사를 전시하려는 시도를 수없이 목격했다. 프레임이라는 사각형 틀 안에서조차 그들은 존엄성이 짓눌린 채 정형화된 인물로서 드러났다. 노동자는 본질적으로 선해야 하며, 비극적 삶을 사는 존재라는 스테레오 타입 역시 오랜 시간 생산되었다. 영화 <3학년 2학기>(2025)는 이러한 한국 영화의 고전적인 신파의 관습을 의도적으로 해체한다.
영화는 제조업체에서 일하는 청소년 노동자의 현실을 다루지만, 죽음이나 극단적 비극에 서사를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명확한 안타고니스트나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할 극적 반전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들을 다그치던 송대리가 창우와 우재를 위해 안전 장비를 요청하는 장면만 보아도 그렇다. 이 영화가 인물들을 단선적인 선악 구도로만 소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영화는 섣불리 노동자의 죽음이나 현장의 위험을 전시하듯 보여주기보다 감정을 절제한 거리두기를 통해 그들을 바라본다. 연민을 쏟아낼 준비를 마친 관객은 끝내 큰 비극이 등장하지 않자 어딘가 무안함마저 느끼게 된다. 영화는 제3자의 감정이 스며들 여지를 최소화할 만큼 정교하고 단단하다. 그와 동시에 불행 서사를 당연시하는 시선으로부터 한 발 떨어져, 사회가 규정한 평범함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하여 특정 집단을 불행으로 속단하는 태도를 경계한다.
아마도 창우는 떠난 이들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다. 여전히 안전장치조차 갖춰지지 않은 작업장을 마주하며, 맨손으로 그라인더를 다루는 실습생들을 상대하는 동안 성민과 수호는 창우에게 사라지지 않는 존재로 남을 것이다. 매일 사람의 이름이 지워져 가는 곳에서 창우를 비롯한 인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버텨 나간다. 우리는 도대체 언제까지 '사람은 직장이 있고 직업이 있어야 한다'라는 폭력의 언어 속에서도 자리를 개척해 나가는 (혹은 개척해야 한다는 선택지밖에 주어지지 않은) 청소년을 그저 기특하고 대견한 존재로만 소비해야 하나. 청소년의 이름을 지우는 것은 특정 기업만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작동하는 사회 전반의 차별적 시선이다. 여러 번 요청됐음에도 끝내 묵살당한 안전 장비 요청은 어느 시선으로 보아야 하는가. 우리는 한때 죽은 이의 친구였을, 혹은 동료였을 창우를 바라볼 자격이 존재하는가.
그럼에도 사회 속 이들을 직시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부채감 사이에서 우리는 애써 외면할 틈을 찾아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