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들은 손에 닿는 것을 원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는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영화를 본 뒤에 읽는 각본집은 보여주었던 것을 도로 숨겨둔 책 같다. 카메라가 움직이는 대신 내 시선이 움직이고, 문장이 스치는 동시에 머릿속에서 장면이 그려진다. 배우를 통해 어느 정도 온도가 정해진 채로 기억되던 장면이 지문 몇 줄로만 남겨졌을 때, 대사의 온도는 이제 내 안에서 매겨진다. 배우가 그저 스치듯 뱉은 문장이었는데 갑자기 확 델 듯이 느껴지기도 했다. 화면도, 인물도 없이 오롯이 나의 생각으로만 상상하고 믿으며 장면을 가꾸어갔다. 각본집을 읽는 일은 상자 속의 양을 들여다보는 일과 닮아 보였다.
영화 속 오토네는 차분해 보였다. 책 속의 오토네도 마찬가지로 차분해 보였지만, 그 아래로는 훨씬 많은 감정이 지나가고 있었다. 표현이 부족한 느낌과는 다르다. 차분함에는 감정이 모자라서 나오는 차분함이 있고, 넘쳐서 차마 표현되지 못해 만들어지는 차분함이 있다. 영화의 오토네는 안에서 자라나는 감정의 가지들을 모두 쳐내고 골라, 제일 적절한 표현 하나만 살며시 놓아두는 인물이었다.
오토네는 어린 아들을 잃었다. 아픔은 크기를 가늠해볼 수는 있어도 내 것이 언제나 가장 커서, 누구도 그녀의 것을 온전히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바라게 된다. 내 상처를 알아주기를 바라고, 잊히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고통도, 아들이 살았던 시간도, 우리가 함께였다는 사실도. 이웃들이 아들의 일을 조금씩 잊어간다는 생각에 착잡해하는 아내에게 켄스케는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잘못이 없는데 아이가 죽나?"라는 그의 대사에서, 그 역시 시간 속에서 흐려져가는 아들을 힘주어 붙잡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켄스케 범인을 찾고 싶어….카케루 아무도 잘못 없어.
켄스케 제발 카케루, 부탁이야….
켄스케는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라고 말하는 사람이고, 원인이 있어야만 견딜 수 있는 사람이다. 오토네가 아들을 닮은 로봇으로 물리적 빈자리를 채우는 방식으로 버틴다면, 켄스케는 아들이 없어진 이유를 붙잡는 방식으로 버틴다. 둘 다 아들을 보내지 못하고 붙잡으려 하는 데에는, 갑자기 삶에서 비어버린 아들의 자리를 감당하지 못하는 슬픔과 함께 그 죽음이 내 잘못인 것 같다는 죄책감이 녹아 있었다.
카케루 요전의 그 일은 신경 쓰지 마. 엄마 역할 관둔다고 말했던 거…. 좀 알아봤는데 68%의 엄마들이 그렇게 말한 적 있대. 그러니까 카케루는 그 말 때문에 죽은 게 아니야.
오토네 그럴까?
카케루 응.
오토네 그렇다면… 어째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68%는 위로가 되지 못한다. 통계는 죄책감의 반대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숫자는 카케루가 학습할 수 있는 최선의 다정함이지만, 오토네가 원한 건 확률이 아니라 사면이었다. 그래서 곧바로 되묻는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유를 요구하는 그 문장에서 그녀는 자신이 그토록 답답해했던 남편과 같은 자리에 서 있다.
그리고 사실, 그 안에는 그녀의 과거가 아주 많이 담겨 있었다.
오토네 사실 나… "엄마 역할 관둘래"라고 엄마가 말할 때마다 괴롭고 두려워서 잠도 못 잤어. 그때는 잘못했어요, 관두지 마세요 라고 울며 매달렸지만… 지금은 반대야. 제발 가끔 나타나서 엄마처럼 굴지 마.
노부요 엄마가 엄마처럼 구는 게 뭐가 나빠?
오토네 그날도 그랬어. 엄마가 오지만 않았어도 내가 애 데리러 갈 수 있었다고!
노부요 아참, 단호박 물러지겠네.노부요, 사라진다. 오토네, 혼자 남는다.
각본에는 노부요가 나간다고 쓰지 않고 사라진다고 쓰여있다. 오토네에게 어머니란 언제나 그렇게 왔다가 없어지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세 살 무렵부터 그녀는 네 엄마 노릇 따위 안 하겠다는 말을 반복해 들으며 자랐고, 여동생은 그 말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고 했다. 아이에게 그 문장이 어떤 상처가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오토네였다.
그리고 카케루가 행방불명되던 날, 그녀는 아이에게 말해버린다. '이제 엄마는 카케루의 엄마 그만할 거야.' 그것이 아들에게 건넨 마지막 말이 되었고 남편에게도 끝내 하지 못한 이야기가 되었다. 68%가 아무 소용없었던 이유는 사실 그 문장의 무게라기보다는 가장 닮고 싶지 않았던 사람과 똑같아졌다는 사실의 무게 탓이 아니었을까.
*
로봇 카케루는 그런 집으로 들어와 조금씩 현실에 적응해 간다. 그만의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으며 세상과 연결되고 있었다. 다만 그 적응은 원래의 카케루를 닮아가는 방향이 아니었다. 카케루의 시간은 멈췄고, 로봇 카케루의 시간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한 얼굴로 겹쳐 보이던 두 존재가, 분명하게 갈라지고 있었다.
카케루 내 방에 집을 만들 거야. 그러니 완성될 때까지는 들어오지 마.
오토네 알았어.
카케루 절대 안 돼.카케루, 방을 나간다. 웃으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오토네.
비밀을 갖는 순간이 곧 내면이 생기는 순간이다. 들어오지 말라고 말할 수 있게 된 존재에게는 이미 열어 보일 수 없는 안쪽이 있다. 카케루는 자기 방에 또 하나의 상자를 짓기 시작한 셈이다. 그리고 오토네는 그 뒷모습을 웃으며 바라본다. 같은 자세의 뒷모습이 곧 한 번 더 반복되리라는 것은 아직 아무도 모른다.
카케루 엄마는 내가 없는 편이 행복해?
오토네 마음대로 속을 들여다보지 마…. 그런 짓을 하는 아이는 엄마 애가 아니야.
카케루 그 말은, 나를 돌려보낸다는 거야? 계약을 종료하겠습니까?
오토네 응, 그럴게…. 이제 엄마 역할 관둘래.
카케루 알겠습니다.카케루, 작업실을 나가 집으로 돌아간다. 그 뒷모습이 쓸쓸하게 보인다.
그 문장이 세 번째로 발화된다. 어머니가 세 살의 오토네에게, 오토네가 아이를 잃던 날의 카케루에게, 다시 오토네가 로봇 카케루에게. 반면교사로 삼겠다던 다짐은 문장 앞에서 아무 힘이 없었다. 상처는 이해된다고 끊어지지 않고, 가장 미워한 방식과 가장 닮은 모양으로 그렇게 대물림된다.
그리고 지문은 그 뒷모습이 쓸쓸하게 보인다고 적는다.
쓸쓸함은 누구의 것일까. 보인다는 건, 누구에게 보이는 걸까.
오토네 …괴로움이나 슬픔 같은 건 없나요?
오사나이 마음이 없으니까요. 만약 그런 식으로 보였다면 그건 당신의 감정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차피 이 애는 당신 과거의 산물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로봇에게 쓸쓸함이 입력된 적은 없다. 업로드된 것은 얼굴과 목소리와 회사가 받아준 몇 장의 사진뿐, 슬픔은 애초에 선택된 파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토네가 본 쓸쓸함은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 뒤에서 울며 매달리던 세 살의 자신, 엄마의 등을 바라보던 오래전의 오토네였다.
뒷모습은 사람이 유일하게 볼 수 없는 자기 형상이다. 안이 보이지 않는 상자와 같은 이미지다. 그녀는 아들의 등을 통해서만 자기 등을 볼 수 있었다. 상자 속의 양은 카케루가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자리에 웅크린 채 누군가 알아봐 주기를 기다려온 것은 오토네였다.
엔지니어의 말이 영화가 내린 판결로 보고 싶지는 않다. 보인 감정이 전부 보는 사람의 것이라면, 우리가 타인의 마음을 아는 방식 전부가 같은 처지가 되어 버리니까. 우리는 언제나 상대의 표정 위에 내 것을 얹어 읽는다. 그래서 오토네의 깨달음도 정답이 아니라 그녀가 도달한 하나의 해석일 뿐이다. 우리는 그렇게 정답 없이 해석만 가득 쥐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같은 대물림이 켄스케에게도 있다. 그는 아버지를 반면교사 삼아 다른 아버지가 되려 했지만 파친코와 술까지는 어쩌지 못했고, 선대의 은혜와 직원들의 생계에 묶여 자신에게 주어진 프로그램 밖으로 한 번도 나가보지 못한 사람이 되었다. 카케루와 아이들이 인간이 정해둔 설계 바깥으로 걸어 나갈 때 그가 응원을 보내는 이 여기에 있었다. 헤어지게 되더라도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는 말은, 자기가 하지 못한 일을 대신 해주는 존재에게 보내는 뒤늦은 응원이었다.
*
상실은 되돌려질 수 있을까. 영화가 내놓는 대답은 복귀는 실패할지라도 회복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남은 사람에게는 떠난 사람을 완전히 보내주기까지의 시간이 필요하고, 기술이 벌어줄 수 있는 것은 딱 그만큼이다. 하지 못한 사과와 건네지 못한 인사를 위한 시간.
카케루 어쩌다가 늦었어?
켄스케 파친코를 했는데 구슬이 끝없이 쏟아져 나왔거든…. 미안하다, 잘못했어…. 미안해….
카케루 괜찮아.
범인을 찾아 헤매던 사람이 마침내 숨겨뒀던 죄책감을 사과와 함께 꺼낸다. 그는 이 말을 아내가 아니라 아이에게 먼저 한다. 오토네가 마지막 말을 아무에게도 옮기지 못한 것과 대칭된다. 부부는 서로에게 못 한 고백을 각자 로봇 카케루 앞에서 꺼내놓는다. 두 사람이 집에 들인 건 아들이 아니라 고백의 상대였다.
오토네가 마음에 두었던 건축가의 문장에서 목적과 기능에 편중된 건축은 인간을 부자유하게 만든다는 말. 그리고 언젠가 빈틈이 있는 건축을 하고 싶다는 바람. 죽은 아이를 완벽하게 복원해주겠다는 서비스야말로 목적과 기능에 편중된 건축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녀를 자유롭게 한 것은 정확한 재현이 아닌, 재현되지 못하고 어긋난 틈이었으니까.
켄스케가 편백나무 욕조만큼은 고집을 부린 것도 같은 이유다. 아버지와의 유일하게 좋은 기억이 냄새와 촉감으로 남은 자리, 남자가 혼자 울어도 되는 유일한 장소. 기능으로 환산되지 않는 그런 틈들에서 사람은 숨을 쉬고, 삶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다. 빈틈없이 메워진 집은 튼튼하지 않으니, 우리는 바람과 햇빛이 드나들 틈을 곳곳에 두어야 한다.
노부요 (산을 보고) 산에서 할아버지 만나면 안부 전해줘.
카케루 ……응. (이해할 수 없다)
노부요 어서 가.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건 1년에 한 번이면 충분해.
카케루 …… (검색해 보곤) 백중날 말이지요? 잘 알았어요.고개를 숙이고 차에 올라타는 카케루.
켄스케와 히다카 다녀올게요.
달리기 시작하는 트럭. 말없이 바라보는 노부요. 손을 흔들려다 관둔다.
할머니의 상자 속에서 할아버지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1년에 한 번 우리를 보러 오지만 우리는 볼 수 없는, 그러나 분명 어딘가에서 함께 호흡하고 있는 사람. 카케루는 그 말을 검색해서야 알아듣는다. 믿음은 학습되지 않는다. 그리고 오토네가 그토록 미워한 어머니 역시 자기 몫의 상자를 오래 안고 살아온 사람이었음이, 흔들려다 만 손 하나로 드러난다. 이 집에서 대물림된 것은 상처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방식도 함께 내려오고 있었다.
카케루 걱정하지 마. 보이지 않아도 곁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계약은 종료하는 거로 해요.오토네, 그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끄덕인다.
정교하게 재현된 형상 앞에서는 계속 만져지지 않던 카케루의 부재가, 어둠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 하나로 가까워진다. 보이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있다고 믿게 되는 것. 각본집을 덮고서야 알았다. 보이지 않는 상자 속의 양은, 보이지 않는 채로 두겠다고 결심하는 사람 앞에서만 머물러 있다.
오토네 고마웠어. 이제는… 가도 돼.
'가다'에 쓰인 한자는 죽어서 떠난다는 뜻을 품고 있다. 세 번이나 관두겠다는 말로 등을 떠밀었던 사람이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배웅의 문장을 찾아낸 장면이었다. 상자는 여전히 닫혀 있고 그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우리는 끝까지 알지 못한다. 다만 오토네는 그 안에 웅크려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자기 몫의 해석 하나를 손에 쥐었다.
우리가 상자를 들여다보려 애쓰는 마음에는 그 안이 정말 궁금한 마음보다, 내가 보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말이 거기 들어 있기를 바라는 내가 더 많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니 끝내 확인하지 못한 채 믿어온 것들은 대개 우리를 많이 닮아 있다. 조금 부끄럽지만 인간의 꽤 다정한 생존법이기도 하다. 우리는 완전한 끝인사를 하지 못하니까,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헤아리며 내게 주어진 남은 삶을 견뎌야 하니까.
보이지 않아도 곁에 있다는 그 말을 붙잡고, 열지 않을 상자 하나를 계속 품에 안고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