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 시간이 지나고 ‘과거’가 되어서야 알 수 있다. 현재와 미래의 본인은 가늠할 수 있을 뿐 체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일까? 현 사회에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조가 있다. 그것에 어느 정도는 공감하는 편이다.
유·아동 시기에는 학교나 시립 도서관에서 빌려 읽거나 사촌의 책을 물려받아서 동화책을 쉽게 접할 수 있다. 특히나 안데르센의 작품과 같이 매우 유명한 경우라면 그것을 접할 확률은 더욱 높았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인어공주>를 좋아한 기억이 있다. 그 이유까지 상세히 기억하고 있진 않지만, 아마도 <인어공주>가 담고 있는 사랑과 희생이라는 소재가 굉장히 낭만적이라고 느꼈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워 가며 어른이 된 지금도 똑같이 느낄 수 있을까? 아니라고 확언할 수 있다. 세상이 어떤지 체감하며 나름의 신념이 생긴 지금에서는 인어공주의 선택을 마냥 낭만적이라고 감동할 수 없다. 희생을 논리적으로 짚어 보게 되고 그것 말고 다른 선택지는 없었을지 따져 보게 된다. 타산적인 태도를 쉽게 버릴 수 없다. 순수했을 시절의 생각을 온전히 되풀이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성인이 된 후에 <인어공주>를 처음 읽게 된다면 어떨까? 순수하게 느낄 수 있는 사랑과 희생이 부재한 감상이 될 것이다. 하지만 희생적인 사랑에 대해 곱씹으며 그 순수한 감정에 관해 생각할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어린 시절 그 연령대에 맞는 도서를 읽는 것은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그러니 어릴 때 다양한 경험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 동감하지만, <인어공주>를 크고 나서 읽어도 괜찮은 것처럼 ‘때가 늦은 경험’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생각을 이어가는 요즘, 다시금 동화를 읽고 싶었고 그러다 우연히 어느 그림책 한 권을 읽게 되었다. 시립 도서관에서는 아동도 아닌 유아 도서로 분류해 놓은 책이었다. 권정민 작가의 <당신을 측정해 드립니다>, 이걸 읽은 유아들의 생각, 혹은 다른 성인들의 생각이 궁금해지는 내용이었다.

권정민 작가의 <당신을 측정해 드립니다>는 사계절출판사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협업으로 출간하는 논픽션 그림책 시리즈인 ‘민주인권그림책’ 중 하나다. 이는 차별과 불평등, 이주노동, 성역할, 폭력의 감수성 등 민주주의와 인권의 의미를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일상 속에서 공감하며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책에 담아냈다고 한다. 책에서 측정의 주인공은 ‘고양이’다. 기초, 심화, 종합 단계에 맞춰 측정을 수행하는 삶을 엿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먼저, 생물학적인 특징을 파악하는 기초 측정이 진행된다. 마치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받던 신체검사처럼 키와 몸무게, 허리둘레를 잰다. 하지만 코의 길이와 너비로 성격 유형, 어쩌면 운명까지도 구분하고, 꼬리 길이로 균형 감각과 의사소통 능력을 측정한다. 어떤 조상의 피가 흐르고 있는지 조사해 두면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피도 뽑는다.
언뜻 보기엔 간단한 신체검사처럼 보이는 과정이 조금씩 불편해지고 있었다. 코의 크기나 모양으로 성격, 운명을 구분 지을 수 없고, 어떤 조상의 피가 흐르고 있는지 아는 것을 ‘쓸모’라고 칭할 수 없다. ‘나’는 ‘나’일 뿐인데 남에 의해 성격이 재단되고 조상으로 구분되는 것이 과연 맞는 일일까? 기초 측정의 마지막은 ‘색깔’이었다. 고양이의 털 색깔, 인간으로 따진다면 피부색에 해당하는 요소에 대해서 ‘앞으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라고 말한다. 사람을 피부색으로 구분하고 차별하는 현 사회의 양상이 떠올랐다. 그렇게 다소 불편함을 느낀 채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심화 측정 단계에서는 체력, 순발력, 지구력 등 더 정밀하고 체계적인 방법을 통해 능력을 측정한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오래달리기, 윗몸일으키기로 지구력이나 근력, 체력을 측정했던 때가 생각난다. 하지만 이것 또한 점차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정해진 시간 안에 정답을 고르는 능력을 측정합니다. 이 능력은 끝까지 우리를 따라다니죠.”
과열된 입시 경쟁, 행복은 성적순이 된 세상이 떠오른다. 같은 사다리를 오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녹슨 사다리를 오르고, 누군가는 다른 이를 밟고, 또 다른 누군가는 처음부터 오를 필요도 없이 높은 곳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빈익빈 부익부, 부의 양극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측정에 능숙해진 우리는 스스로 모든 것을 측정하기에 이른다. 종합 측정 단계다. 근무 시간, 식사 시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흘린 땀의 양, 품위 유지 비용, 타인의 관심 등을 측정한다. 이 밖에도 자리에 누워 여러 요소를 측정하면서 잠 못 드는 시간을 가늠한다. 종합 측정의 마지막은 ‘자신에 대한 만족도 측정’이 장식한다.
우리는 흔히 ‘갓생’이라 칭하며 시간을 쪼개어 부지런히 사는 삶을 동경한다. 그것은 강박과 부담으로 이어지기도 하지만 이미 형성된 기조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SNS에 담아내는 것은 기록과 공유보다는 과시에 가까워졌고, 타인과의 비교에 깊이 고민하게 되는 밤이 점점 길어지게 되었다. 잠 못 드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에 대한 만족도는 떨어질 것이고 이것이 우리가 익숙하게 살아가는 현실이다.
유난히 불편했던 측정들을 되돌아보면 지금껏 살아오는 과정에서 압박이나 결핍이 존재했거나 원치 않은 감정을 느꼈던 부분이었다. 자연스럽게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싶었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무언가를 측정한 수치보다는 성취감이나 기쁨 등 뒤따라오는 감정이 중요했고, 사회가 원하는 속도에 맞추기보다는 제 속도를 찾아 지키는 것을 원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책장을 넘길수록 마냥 귀엽게만 보이던 여러 고양이에 점차 우리의 모습을 투영하게 되고 그들의 표정에 따라 점점 미소를 지워가게 된다. 지나친 측정은 때로는 삶의 기쁨을 빼앗아 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던 말처럼 그것에 지나치게 매몰될 필요는 없다. 삶은 유한하나 본인의 것이기에 타인과 비교하거나 빠른 속도에 맞추지 않아도 된다.
사회의 차별, 불평등의 문제를 이 얇은 그림책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유아 도서로 분류되어 있지만, 어쩌면 성인들에게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 통해 ‘나’를 되돌아보고 되찾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