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의 대상 수상작 『긴긴밤』, 코끼리로 살아가던 코뿔소 한 마리가 코뿔소와 살아가는 펭귄 한 마리를 지켜내는 이야기. 어린이문학에서 발견한 범인류적 위로의 한 마디. “수많은 긴긴밤을 함께했으니 ‘우리’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했다.”
*
그럴 때가 있다. ‘어른’이 된 것을 체감할 때. 정확히 말하자면, 어른이 된 것을 체감해야 할 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확신하지 못한 채로 사회에 내던져지는 때가 온다. 내가 사회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 준비 안 된 나를 사회에 데려다 놓는 것과 같은 시기가 말이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과거를 지워야 하고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과연 내가 어떻게 사회에 녹아들 수 있는지 그 무엇 하나 알지 못한 채 미지의 영역에 몸을 맡겨야 한다. 미숙함 속에서 진정으로 빛날 날을 위해서 노력하는 ‘어른이’들의 사회. 그들이 버텨낼 긴긴밤을 위로하는 이야기가 있다.
1. 한 발짝 내딛기
『긴긴밤』은 노든의 어린 시절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코끼리 고아원에서 코끼리처럼 살고 있었으나 자신이 코뿔소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무리에서 독립하여 코뿔소로서 살아가기 시작한다. 긴긴밤의 서막이 올랐다. 그는 자신과 같은 코뿔소를 만나기 위해 불안함을 가진 채로 미지의 세상에 뛰어든다. 독자는 그러한 그의 용기에 감탄하고 불안에 떠는 모습에 동감한다.
무모한 독립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코뿔소의 그 용기는 보답받는다. 반려를 만나 자식이 생기고 단란하게 살아간다. 바람보다 빠르게 달리면서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아간다. 미지의 세계는 그런 곳이다. 직접 내디뎌 보지 않으면 행복이 존재할지, 불행이 밀려올지 알 수 없는 곳.
코뿔소의 행복은 불안에 떠는 이들에게 용기가 되어 전해진다.
2. 그들을 이룬 것은 사랑
코뿔소 가족이 행복한 채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면 좋았겠지만, 그 행복은 이기적이고 잔인한 인간에 의해 부서진다. 이후 동물원에서 앙가부라는 친구를 만나지만 또다시 앙가부를 잃고 치쿠와 알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동물원에서 탈출하게 된다.
독자는 그들에게서 희생을 엿본다. 총성이 울리는 와중에 가족들을 지키고자 한 노든, 마음을 닫아버린 노든의 곁을 지키던 앙가부, 치쿠의 오른쪽에 서주던 윔보와 부리에 상처가 날 때까지 알이 든 양동이를 물고 이동하던 치쿠. 이 모든 이들의 희생은 사랑이라는 또 다른 이름을 지니고 있다.
치쿠와 윔보는 그 누구도 품지 않는 알을 데려다 누구보다 소중히 다뤄주며 조심스럽고 따뜻하게 알을 품었다. 부모의 사랑처럼 절대적인 헌신으로 알을 지켰다. 윔보는 커다란 철봉에 깔려 피투성이가 되면서도 다치지 않게 알을 품었다. 치쿠는 그의 몸이 마르고 부리가 해져도 바다를 찾아 나아가길 멈추지 않았다. 자신의 알이 아니라는 사실은 잊은 듯이 헌신적인 사랑을 쏟았다. 그리고 그 사랑에 보답하듯 치쿠의 힘이 다한 그날 밤, 펭귄이 무사히 태어났다. 그 사랑에 독자는 위로받는다. 아무도 지켜주지 않고 외면하던 못난이일지라도 그 언젠가는 누구보다 사랑해 줄 이를 만날 수 있다. 그 사실이 미지의 세계를 홀로 맞닥뜨려야 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외로움을 달랜다.
그렇게 태어난 펭귄을 노든이 키우고 지켜낸다. 치쿠가 말한 ‘바다’로 데려가기 위해 또다시 걷는다. 펭귄이 무료하지 않게 노든은 옛날이야기를 해준다. 그들이 함께하는 긴긴밤을 기나긴 이야기로 가득 채운다. 또다시 총성이 울리고 인간들의 냄새가 나도 노든은 펭귄을 지킨다. 그 마음과 행동을 사랑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까. 상처투성이였고 지쳤고, 엉망진창이었어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그들을 이룬 것이 그러한 사랑이었기 때문이리라.
3. 나의 여정을 응원하는 이
노든은 코뿔소였기 때문에 코끼리 고아원에서 나와 독립했고 ‘펭귄’은 펭귄이었기에 노든을 떠나 바다로 향했다. 제자리를 찾아간 듯한 모습을 훌륭한 코뿔소와 펭귄이 되었다고 표현한다. 어쩌면 본연의 ‘나’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은 것은 아닐까 싶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었다.”
- 『긴긴밤』 p.94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른 그들이 유일하게 같았던 것은 사랑하는 마음이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노든은 펭귄이 펭귄으로 살아가기를 누구보다 바랐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가 자신을 떠나 더욱 행복해질 수 있다면 기꺼이 그 등을 밀어주는 마음. 노든은 펭귄의 뒤에 든든하게 서서 그가 용기 있게 나아갈 수 있도록 등을 밀어주었다. 언젠가의 코끼리가 그랬던 것처럼 노든은 이별하는 슬픔보다 펭귄의 행복을 생각했다.
누군가의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은 바닥난 용기도 다시금 샘솟게 한다. 읽는 이들에게도 어디서든 펭귄을 알아보는 노든처럼 용기 있는 삶을 선사하는 이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한 다짐과 약속을 전하고 있다.
*
『긴긴밤』은 코끼리로 살아가던 코뿔소 한 마리가 코뿔소와 살아가는 펭귄 한 마리를 지켜낸 이야기다. 어린이문학상을 받았지만 어쩌면 어른에게 필요한 이야기가 아닐까?
모두가 미지의 내일을 맞이하며 살아가고 있다. 애써 어른스러운 척으로 ‘어른’의 잣대를 만들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두렵고 불안하여 외로운 긴긴밤을 보내고 있을 수 있다. 그 긴긴밤을 버텨낼 용기와 사랑으로 점철된 이야기. 놀라운 그들의 의지가 많은 이의 밤을 밝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