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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재조명]

어떤 대상의 의의나 가치를 다시 들추어 살핌


익숙한 대상과 사건들이 다시 새롭게 보이는 중입니다

이 글은 당연함에 가려졌던 그 가치를 재조명한 작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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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콤 <순풍산부인과>를 정주행하고 있다. 한동안 시청에 소홀했다가 머리 식힐 겸 몇 편 챙겨 봤는데 역시 명작은 명작이다. 순풍 식구들의 좌충우돌 사는 이야기는 지금 봐도 마음 한 켠을 건드리는 데가 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엉뚱한 상황과 사고 수습에 바쁜 인물이 주는 웃음은 정말 중독적이다.

 

순풍산부인과에서 미달이와 의찬이가 캐치볼을 하다 공이 과자트럭 안으로 들어가서 어쩔 수 없이 올라탄 트럭에 갇히고 마는 에피소드가 있다. 둘은 그저 공원에서 재밌게 놀고 싶었을 뿐인데 일이 그렇게 말도 안 되게 흘러가 버린다. 그리고 그 엉뚱한 기운은 과자트럭 못지않게 유별났던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아래의 글은 순풍이 쏘아올린 공이다.

 

 

Thanks to

0. 고생했다 친구야 (기억나니)

1. 뚜벅 1의 동네 아파트 정자에서 인터뷰에 응해주신 할머니 (감사합니다)

2. 그 옆에서 도움 주셨던 어떤 아주머니 (복 받으실 거예요)

3. 초코파이 받았는데 줄 게 없어서 어떡하냐고 하셨던 할아버지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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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준비로 숨막히는 대학생 3학년 둘은 2인 1조가 되어 설문지를 들고 동마다 있는 경로당을 전부 돌기로 한다. 목표는 어르신 백 분. 하루 만에 가능할지 모르겠다. 원활한 인터뷰를 위해 초코파이와 요구르트도 잊지 않는다. 뭐든 맨입으로는 힘들다. 알랑방구용 간식 봉지를 나눠 들고 두툼한 설문지 더미를 옆구리에 낀 채 활동을 개시한다.

 

길을 걷다 이른 아침부터 화단에서 잡초를 뽑고 계신 어르신을 뵙게 된다. 봉지를 부스럭대며 간식을 꺼내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호미질하는 할머니 옆에 찰싹 붙어서 묻고 체크하기를 반복한 끝에 첫 설문지를 완성한다. 순간 어지러운 멀미를 느낀 둘. 이걸 어떻게 백 번을 하나. 갈 길이 바빠 자리를 뜬다.


뚜벅이 둘은 다른 동에 있는 경로당에 도착한다. 문을 열고 공손히 인사드린 곳에 할아버지 두 분이 계신다. 준비한 멘트를 전달했으나 신문을 읽고 계시던 어르신이 “우린 그런 거 안 합니다” 단호하게 거절하셔서 뻘쭘한 채로 나온다. 초코파이와 요구르트를 그래도 챙겨 드렸는가에 대해선 기억이 흐릿하다.


점심 무렵 또 다른 동네로 넘어간 뚜벅 1, 2. 경로당에 가까워질수록 북적북적한 기운이 느껴진다. 식사 준비 중이신 할머니들이 뚜벅이 둘의 장황한 설문지 설명을 듣고서 이렇게 요약하신다.


“우리는 이제 밥 먹어. 들어와. 밥 먹고 숙제 해.”


그렇게 밥부터 먹는다. 커다란 밥상에 모두가 둘러앉아 좀 더 사적인 얘기를 나눈다. 학교에서 무슨 공부를 하고 있고, 왜 이런 숙제를 하게 됐고, 방금 어느 경로당에서 넘어온 건지도 알려 드린다. 친절한 할머니들과 함께 있으니 말문이 트인다. 요구르트를 후식으로 먹으면서 모두 다 같이 경로당 이용 노인의 스트레스 정도를 파악하는 설문지에 집중한다. 먼저 숙제를 마치신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에게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해 주신다. 감사의 뜻으로 뚜벅이들은 설거지를 하고 할머니들의 배웅을 받으며 경로당을 빠져나온다. 배가 불러서 잘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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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심으로 파워 워킹을 해서 조금 먼 동네로 건너간다. 정신없음과 막연한 궁금증이 번갈아 드는 상태다. 도착한 경로당 입구에서 찰싹찰싹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화투다. 뚜벅 1, 2는 은근슬쩍 껴서 할머니들의 경기를 구경한다. 화투를 아예 모르는 1과 달리 그쪽으로 빠삭한 2는 점수가 잘 안 나는 할머니 곁에서 조력자를 자처한다. 이곳 대장처럼 보이는 할머니가 그걸 왜 알려 주냐며 호통을 치신다. 집중하는 분은 그냥 두고 요령껏 다른 분들과 설문지를 완성해간다. 어느 분이 이겼는지는 아직도 헷갈린다.


바로 아래서 경로당을 또 하나 만난다. 오늘 뵌 어르신 중에서 가장 연로하신 분들이 계신 곳이다. 우리가 너무 반가워 “아가”라고 하신다. 다른 분들보다 좀 더 큰 목소리로 천천히 질문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린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기호 몇 번 OOO입니다!”


국회의원 선거철이라 선거 운동 중인 사람들이 경로당에 우르르 몰려온 것이다. 난리다 난리. 설문지가 눈에 띄었는지 전공이 뭐냐고 그쪽에서 먼저 물어온다. 복지 학도 둘을 살짝 의식한 듯한 느낌이다. 마지막은 언제나 그렇듯 잘 부탁드린다는 인사와 함께 재빠른 퇴장. 그들이 가고 나서 우리는 참았던 얘기를 한다.


“할머니. 저 사람 뽑지 마요. 다 거짓말이야.”

 

어쩌면 설문지보다 그렇게 말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둘이다. 피곤한데 애매하다. 설문 조사 백 명이 어디 쉬운 일인가. 벌써 저녁 7시다. 하지만 이대로 끝내기엔 아쉽다.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편의점 앞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먹자골목으로 향하는 어르신 무리를 발견하게 된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붙잡은 마지막 구세주의 대답은 이렇다.


“우리 보리밥 먹을 건데 올려구? 오고 싶으면 와라?”


뚜벅이들은 그렇게 남의 계모임에 따라간다. 마지막 엔딩은 경로당이 아닌 보리밥집이 된다. 일면식도 없는 어르신들의 계모임 자리에 따라와서 민망한 와중에 배는 또 고프다. 밥상 가운데서 설문지를 작성하다 보리밥 그릇들에 점점 밀려난다. 할머니 한 분이 “너네 배 안 고파? 하나 시켜줄까?” 하고 저녁을 사주려 하신다. 둘은 절대 그러지 마시라고 강력히 손사래를 친다. 이번에 얻어먹으면 진짜 염치 밥 말아먹은 거라고 생각한 1, 2다. 식사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 둘은 서둘러 일을 마무리 한다. 잊지 않고 요구르트도 놓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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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당을 이용하는 노인의 스트레스 정도가 아무래도 더 낮지 않을까 하는 추측과 설문지의 유의미했던 값들이 얽히고설킨 끝에 완성된 우리의 숙제. 어르신들은 숙제 속의 내용처럼 정말로 그러셨을까. 멍멍이 같이 고생했으나 놀랍게도 논문에 대한 기억이 없다.

 

떠오르는 건 딱 두 가지. 첫째, 논문은 두 번 못할 짓이다. 둘째, 숙제를 못해가서 혼난다고 하면 처음 보는 할머니(할머니 by 할머니)의 일일 손녀가 될 수 있다. 유의미한 건 아무래도 후자인 듯하다. 그분들의 기억에 가끔 우리가 등장했으면. 밥도 먹고, 숙제도 같이 하고, 설거지, 화투 등등을 함께한 바람 같은 손녀로 추억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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