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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인문학의 쓸모와 멋진 신세계2 [사람]

나의 세계와 자유

by 서상덕 에디터
2026.08.01 12:55

 

그리고, 그리고 바로 여기에다가 비트겐슈타인 인용을 미리 붙여두고 싶습니다. ‘세계의 한계는 주체의 한계이다, 그러므로 세계란 곧 나의 세계이다.’ 내게 세계란 스스로 이해하는 만큼의 양감으로써 다가와 뚜렷하게 감각되고, 선명하게 인지되며, 그만큼 분명하게 구획되는 것. 그 너비와 깊이가 곧 내 세계의 크기이며, 나의 그것은 과거와의 비교를 통해 공간적으로 감각됩니다. 이렇듯, 개인의 내면에 저마다의 세계가 있다는 말을 나는 공감각적으로 느끼어 동의합니다. 그 닫힌 세계엔 각자가 수집한 경험과 기억의 표상들로 채워져 있고, 그 세계의 너비와 높이가 곧 인식의 크기일 텝니다. 그러나 우리가 표상한 것들이 허다할진대 그 모든 것들은 스스로 잘 정리되어 있었겠습니까, 결단코 아니일 테고, 나는 나의 표상들을 가지런히 정리합니다. 진실로 이 글 또한 내 인식의 정리 작업이 되었습니다. 백지 위에 모두 쏟고, 모순되는 것은 지우고 합당한 것에는 순서를 부여한 뒤 연결하는 작업. 곧바로 접 붙지 아니하려는 것들에는 손수 논리의 얼개를 짜, 그 사이에 끼우겠습니다.


- 인문학의 쓸모와 멋진 신세계 1편

 

     

 

III.


 

비트겐슈타인의 명제를 좀 더 명료하게 하기 위해, 쇼펜하우어의 문장을 빌립니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 그러나 이 두 명제가 등장한 배경인 문제의식을 짚어야 이 명제의 필요와 이해가 좀 더 선명해질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세계를 하나의 사실로써 간주하고, 실상 서로 다른 표상으로 가리키고 있음에 따라 끝없이 오해가 반복되고 있다’라는 이해가 저기 선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 명제의 최종선언인 “세계란 곧 나의 세계이다”에서 세계라는 것은 물리적 실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네 세계니 네 멋대로 살아도 된다’라는 식의 어리석음을 한 톨만큼도 보증하지 않습니다. 차라리 ‘이미 제멋대로 살아오고 있었다’라고 바꾸어 해학적으로 표하겠습니다. 여기에 ‘언어란 개인의 주관적 기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라는 문제의식은 동행합니다. 여전히 부족한 설명은, 지난 자유 독서 모임 때 우리의 ‘젊은 요조’가 말한 ‘장님 코끼리 만지기’ 문제와 데리다의 ‘차연’ 개념으로 보충하고 대충 넘어가십시다.


세계가 사람에 저마다 다르게 인식된다는 것, 즉 표상에 대해 내가 미리 공감하고 있던 까닭은 그것이 뿌리내린바 문제의식인 몰이해에 있습니다. ‘왜 같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어 경험하면서 가리키는 바가 각 다른가. 또한 왜 내가 느끼는 이것, 내 심상 속에 뚜렷한 이미지로 빛나는 이것을 전달할 수 없었던가’ 하는 기막힌 단절의 경험, 그 타는 목마름으로부터 표상의 개념에 이를 기나긴 사유는 자라납니다. 그리고 이제 표상의 개념에 도달하였으니, 비로소 다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새삼, 언어란 참으로 피로한 도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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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이해의 본질이 하나의 공유된 세계가 저마다 다르게 표상되는 데에 있다면, 그 인과에 대해 자문해 왔습니다. 이 의문을 세계가 표상되는 과정에 관한 질문이라 합시다. 언급했듯 세계는 개별자에게 경험되고, 이해되고, 해석됨으로써 하나의 인식이 된다고 나는 봅니다. 나아가 하나의 인식이 뒤이을 표상 과정에 전적으로 영향을 끼친다고 봅니다. 한편 인식이란 개별적이므로 상호 모순적인 인식이 동시에 그 세계 안에 존재할 수 있으며, 또 그 사이에 상대성이랄 게 있어 어떤 인식이 다른 인식에 비해 더 우월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할 것입니다. 내가 소위 ‘믿음’이라 부르는 것은 ‘어떠한 주제에 있어 가장 우월한 인식’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도전자가 등장하기 전까지 그는 가장 우월한 지위에서 뭍 인식 가운데에 왕처럼 군림하게 됩니다만, 애석하게도 도전자를 반기는 왕이 없고, 스스로 관을 내려놓는 겸허한 왕이 없으므로 믿음은 권위주의처럼 오래지는 것이라고 나 여깁니다. 믿음이 곧 경험과 이해와 해석 모든 부문에서 자신의 대적자가 접근하는 것을 방해하니까요. 그 자체로 문제 될 것은 없겠습니다만, 사정이 이럴진대 믿음과 실재가 반목하는 때는 어찌해야 하는가, 이것이 실질적인 질문 되시겠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믿음은 표상의 제일 과정, 즉 경험에 영향을 끼치며 그 자신에 대립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왜곡합니다. 심지어 그 경험이 나 자신의 소망에 걸맞은 것, 변화와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것일지라도요! 세상에나, 짜증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아, 믿음의 역설이라. (도스토예프스키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이제 인식 일반의 행태를 묘사하며 그것과 나 사이의 변증을 전개한다면 이 논의는 좀 더 적확해지며 약간의 깊이와 정당성을 획득할 듯도 싶습니다만, 슬슬 피로합니다. 그러니 납작하게나마 내 것만 논하겠습니다. 내 사유가 인식의 세계를 열렬히 누비매 그 안의 뭍 요소를 가능한 한 많이 밝혀두었더라면, 또한 어떠한 필요가 임해 사유가 스스로 공고한 것을 해부하는 데 신실하였더라면,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내 인식의 세계 속에 모순을 이루는 것은 가능한 한 해부되었으며, 여전히 거기 남은 것이 있더라면 무지의 경계 바깥의 것입니다. 작금 하나의 무지가 새로운 영감의 별빛으로 화하여 속삭이기 시작하였음을 느끼고 있습니다만, 인식의 경계로 제단을 쌓아 올리는 것이 피로해 잠깐 쉬고 있습니다. 만약 거기 신이 있어, 그 신이 내 무지를 향해 재촉하는 벼락을 떨구지 않는다면 한동안은 파업할 듯싶습니다. (호메로스 - 일리아스, 단순 차용)


인식 속의 모순을 가능한 한 모조리 탐색해 해부했고, 그 과정에서 더욱 자명한 것과 덜 자명한 것의 위계를 나누고, 가능한 한 나름의 체계와 정식을 갖춰왔습니다만 그 결과로써 나의 세계가 이런 모습을 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 결과 나는 믿음이 공고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를 어찌 표해야 좀 더 자명하게 전할까요. 그릇된 인식과 믿음을 깨부수고 위계를 부여하자 단 하나의 우월한 것이 남고 다시금, 아니 전보다 더 강렬한 믿음이 되었다고 하면 이해하려나요. 사람 사이의 믿음에도 상대성이 있다면, 내 그것은 공고하기 견줄 데가 없고 그건 그리 좋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외로움 때문. 내 나름으로는 “인식적 지도 그리기”를 마친 것 같은데, 어느새 주변엔 ‘반-믿음’으로 가득한 것 같습니다 그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잘 모르겠다”라고 말해오는 듯한, 그런. 그 원인에의 추정은 함께 읽고 토론했던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 논의로 대체하고 넘어가십시다. 프레드릭 식으로 말하자면 “방향 감각의 상실”이고, 니체 식으로 말하자면 “노예 도덕” 같은 이것. 내가 전적으로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변을 둘러보면 모호함 또 모호함 뿐이라 대화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인식 상 남아 있는 모호함이 없는 한, 그런 식의 교착은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다만 대화를 위해 그리 애써볼 뿐입니다. (프레드릭 제임슨 -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


물론 여전히 내 인식의 세계 속 모든 주제에 있어 믿음이 강고하진 않습니다. 믿음이 싹트기엔 허약한 주제라거나 반대되는 믿음, 즉 강한 불신의 영역도 내 안에 넘치도록 발견됩니다만, 어쩜 내 사유가 정면으로 겨눈 채 벼르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려. 어쩌다 보니 인식론을 두고 외로움의 두 가지 가능성을 도출했군요. 그대에의 편지를 빙자해 내 인식의 지도에 더 큰 진전이 생겨 기쁩니다. 이를 각각 무엇을 경험하고 어떻게 인식하는가의 문제라고 요약하자면, 뭐, 여러모로 두루두루 외롭습니다만 그렇다고 내 살아온 방식을 그칠 것 같지도 않습니다. 통용되는 것을 경험하고, 공감될 수 있게 해석하고, 이해되는 방식으로 인식하는 것, 즉 ‘유행’에의 합류가 외로움이라는 문제의 본질이라고 생각건대, 내가 그럴 작자가 못 되리라 여기니까요.


말했듯 나는 인식의 저편을 꿈꿉니다. 그리고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이르러,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어느 임계점을 넘어, 이해받고 환대받는 자가 되기를, 그 전에 모든 것을 이해하는 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을 위해 개척한 것을 뒤엎고, 나아온 길을 되짚거나 하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그건 애초 되지 않도록 정해진 일이니까요. ‘안락한 과거와 이별함으로써, 참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것.’ 오래 참고 견디며, 내가 진정 바라는 나로서 온전하기를 소망합니다. 나는 10년을 방황하였고, 남은 10년을 더 헤맬 것 같습니다. (호메로스 - 오뒷세이아)

 

 


IV.


 

인간을 바라보는 나의 뭇 해석관 중 하나는 메커니즘, 즉 기계 장치로써의 비유적 관점을 따릅니다. 이때 그 비유의 원형 이미지는 아-까 언급했던 사유의 윤전기처럼 구시대적이면서도 정교한 기계 장치이자, 무수한 톱니바퀴. 그 성분이 철이 아닌 뼈와 살점으로 되어있을 뿐인 정교한 아날로그 유기체로서의 인간을 생각해 왔습니다. 한편 이 설명을 그대의 가슴으로서는 즉각 환대하지 못할 것임을 헤아리나, 왜냐하면 그대는 인본주의자니까, 그러나 여전히 우리가 전혀 다른 곳으로부터 출발해 같은 곳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피스톤이 움직이며 무수한 톱니바퀴의 연쇄를 낳고 그것의 주동력이 시스템 전체를 순환하는 듯이, 하나의 결과적 사유나 행동은 기폭제가 되는 원인과 내재한 무수한 구성 인과의 결과물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즉 나는 한 인간을 그가 내포하는 세계의 인과율로써 바라보고, 그러므로 어떤 결과인 행위를 바꾸어내거나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그 목적물이 아니라 그 이전에 있을 원인과 인과에 달려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나를 비롯해 모든 인간 속에 있을 인과의 톱니바퀴를 관찰합니다. 어떤 톱니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알면,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서요. 한편 앞서부터의 이러한 표현들은 잘 공감되지 않는 것으로써 자칫 우스운 것이 되어있으리란 염려는 늘상 내 측두 안에 매달려있고, 그러나 그게 내가 그대를 좋아하고 또 친밀히 여기는 까닭이며, 그 원리요, 나아가 그렇게 되도록 정해진 하나의 인과인즉 결정된 미래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대를 알지 못했다면 몰라, 알게 된 이상 이렇듯 친밀해지는 것도, 나아가 생일을 빌어 이런 기나긴 글을 쓰게 하는 것까지도 미리 다 정해진 바입니다. 이것을 단호히 선언할 수 있을 만큼은 나 자신을 굳게 이해합니다.


앞서 외로움을 짙게 언급했습니다만, 그 고독을 받아들인 것은 그것이 피할 수 없는 막다른 길이었기 때문. 내게 주어진 선택지가 이뿐이었겠습니다만, 이제의 나는 기쁩니다. 그것을 불가피함으로부터 필요로, 즉 하나의 쓸모로 역전시켰으니까요. 그게 자기기만이라도 좋습니다. 그 덕분에 나는 이리도 무겁고 육중한 글에 매진할 수 있게 되었음이 자명합니다. 본디 약속이 많고 삶이 신명으로 가득 차면, 이런 글은 좀체 안 나오는 법입니다. 나로선 ’때려죽여도 안 나온다’ 하겠습니다.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삶이 온통 평안하였더라면 사람이 자기 안의 그 무엇을 빌어 사유하겠습니까. 이 귀치도 않은 사유와 늦은 밤 꼬박 새워 글 쓰게 하는 마음이란, 그것의 까다로움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먼저 필요로 합니다.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모든 사유, 말하자면 몰이해와 외로움의 사유란 것은 내 안으로부터 저절로 시작돼 바깥으로 뻗어 나간 것이 아니라, 달리 말해 내 이지적 열망이 스스로 피어난 것이라기보단 일단 바깥에서 일어나 강철의 비처럼 내게로 쏘아져 내리는 사건들을 내 안에서 간추려 해석한바, 그것들이 모여 이룬 결과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요. 이 또한 인과. 그 원인의 자리에 놓인 불편과 불안과 불행을 곧 한 마디 고뇌라고 해두자면, 고뇌가 먼저 있고 나서야 대안은 언제나 뒤늦게 서는 것. 사유란 이 뭇 대안 중 한 가지 얼굴에 불과합니다. 그대는 능히 자기 삶을 통해 공감하고 있을 줄로 압니다.


명랑함이라면 살면서 딱히 누려본 적이 없습니다. 젊은 날의 몰이해는 오직 지혜의 문제려나 했으나, 생각은 행동을 죽이고, 사유할수록 내 존재는 가벼움이 아닌 무거움이 되어갑니다. 어쩌면 한 인간이 품은 활자만큼 그 영혼의 무게는 산술적으로 비례해가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사유를 멈출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는 비우고 버리기를 애쓸 바엔, 극한을 생각합니다. 지금의 내 세계가 꾀할 수 있는 것은 내 지혜의 한계라면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경지, 인식의 저편을 향해서 화려하게 투신할 텝니다. 기다리는 미래가 몰락이라면 그것까지를 나는 긍정합니다. 그것까지가 이 점프대의 입장권이니까요. 인과의 흐름 위에 그저 몸을 맡길 뿐입니다.


내 과거의 경험이 사유하는 나를 낳았고, 내가 사유하는 인간으로 거듭나 그에 걸맞은 또 다른 인과적 미래로 나아가는 것까지를 나 헤아리고 있습니다. 여기에다가 참존가의 무거움과 가벼움이라는 테마까지 곁들였다간, 또 다른 가지로 글이 터무니없이 무거워질 것 같으니 그쪽 편 가지는 별도로 써둔 연작 오피니언으로 대체합니다. 이쯤 소주제를 한 번 정리해 갈음하자면, 삶의 행로인즉 운명은 그저 인과의 나무이고 나는 무수히 뻗은 가지의 하나요, 내 사유와 행위는 어떠한 결과물로서 그 가지 끝에 맺힌 열매에 불과합니다. 어쩌다 보니 나는 사유하고 인식하는 자가 돼 있었고, 하나의 결과는 다시 그 다음 결과의 원인의 자리에 놓여, 열매가 떨어진 자리 위로 우듬지 싹이 피어나 가지는 하늘을 향해 끝없이 생장하는 것 같습니다.


‘인문학의 쓸모’라, 나는 인식의 저변이 확대되는 것으로부터 느껴지는 놀라운 확장감과 고양감이라는 열매에 더불어, 열매 떨어진 자리로부터 끝없이 새로 나는 생장의 기쁨을 논하겠습니다. 나는 멈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새 과거는 아득히 멀어져 있습니다. 그대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나아가 독서라는 행위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을 때, ‘아직도 자신의 이해와 인식 너머에 무언가 더 나은 것이 있으리라 기대하는 자’들은 모두 개별자로서, 외따로이 떨어진 길로부터 같은 곳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말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몰이해와 외로움은 이 여정으로의 최초의 입장권이자, 그 여정을 유지하는 조건이며, 앞선 인식론에 따르면 이 여정이 수반하는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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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그대가 말했듯, ‘마치 스토너에서 매스터스가 대학을 두고 말한 것처럼, 우리 독서 모임은 "현실 세계에서 성공할 수 없는 불구자들과 부적응자들을 위한 안식처”’라는 자조적 우스개는 그대와 나를 필두로 한 소위 “책친놈” 몇 명을 위와 같은 의미로써 가리키고 있습니다. 인식적 개별자들. 나아가 거기 변죽을 맞추어 내가 뱉은 말도 매한가지, ‘정상적인 모임원들로부터 우리 같은 책친놈들을 스스로 격리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말도 실상 같은 것을 겨누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안에서 조금은 덜 외롭게 가십시다들. (존 윌리엄스 - 스토너)


 

 

V.


 

허허, 벌써 묵직한 글이 돼버렸군요. 아직 토요일 하루의 일상 소묘는 시작도 안 했습니다만, 이거 참 난감합니다. 꼬박 이틀에 걸친 사유. 걸으며 생각한 것들로 틀을 잡고, 그 틀 위에 사유는 제 멋대로 뻗어나 기어이 이 지경까지 왔습니다. 글은 뻗어나기 시작하는 순간 스스로 그칠 자리를 마련하는 딴은, 이게 순전 내 의지는 다 아닐 겁니다. 서론 단 2문단을 써두는 것이 마치 대지에 모종을 심는 것과 같아, 그 후로부터는 언제나 글이 저 알아서 증식하곤 합니다. 나는 글과 사유 사이의 매개이자 펜을 쥔 손에 불과하고, 그러므로 그 순간 내게 이 의지에 봉사할 만큼의 열정과 끈기가 존재하느냐만이 글이 끝맺을지 여부를 가릅더이다. 이번 것엔 꽤 신실한 것 같습니다.


이제 슬슬 사변은 쳐내고 본론으로 넘어가십시다. 대충 이런 늘 같은 사유 속에 잠긴 채 나는 안암으로 갔습니다. 머리를 하고, 점저를 먹고, 햇살이 눈 부신 참살이길 한 복판에 서서 잠시 고민합니다. 왼쪽으로 갈지, 오른쪽으로 갈지, 가야 할 곳이 분명치 않을 때 나는 그리 유쾌하지 않습니다. 담배를 피며 나는 고민하다간, 느닷없이 광화문에 가기로 합니다. 그대에게 책 선물을 할 심산이었습니다.


지하철이 훨씬 빠르다지만, 버스를 선호합니다. 정해진 약속이 없어 시간이 넉넉하다면 이건 누려볼 사치라 봅니다. 더구나 바깥이 훤하다고 말했잖습니까. 정말이지 눈이 부신 오후였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온통 건물의 유리창 하며 도로의 차창에 직사광선이 번쩍번쩍했습니다. 버스를 타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세상이 훤했고, 마치 분칠한 얼굴에 조명마저 덧대본 양 그 모습이 새삼스러워 보면서도 더 보고 싶은 오후입니다. 101번 노선은 안암오거리를 지나 곧 신설동 오거리를 끼고 꺾으면, 종로 일대를 시원하게 관통합니다. 동묘를 지날 즈음부터 그리운 거리 위에, 익숙한 밤 풍경 대신 낯선 대낮의 정경이 보이는 게 좋습니다. 종로5가를 지나고, 광장시장을 지납니다. 다만 오늘은 종로 어딘가에 대규모 시위집회가 있대서 버스 기사는 종로4가에서 그만 내리라고 합디다. 사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느닷없이 시작됩니다.


종로4가 버스 정류장은 세운상가와 종묘 가운데 뻘쭘하니 서 있는데, 그 형국이 기묘한 것이 마치 조선 것과 미제 것의 기싸움 같은 느낌이랄까요. 다만 그 미제 것도 이미 닳을 대로 닳은 퇴물이라 묘하게 밸런스가 맞습니다. 아니 왜, 신-구의 대립에서 보통 옛것이 새것에 일방적으로 밀리던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 밸런스가 새삼스럽거니와 편하게 다가오는 것도 얼추 설명될 텝니다. 거기서부터 걷기로 했습니다. 시간은 3시, 태양은 절정, 거리는 샛노란 빛에서 약간 주홍으로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여전히 나는 일전의 상념 속에서 걷습니다. 다만 종로 거리마다 내 옛 모습과 옛 생각이 배 있어, 나는 내 과거와 함께 걸었습니다. 오묘한 기분, 말하자면 약간의 고뇌와 약간의 기쁨이 적절히 버무려진 기분으로 종로3가를 지나고, 해커스 어학원을 지나고, 탑골공원을 지나며 땀에 흠뻑 젖었습니다. 종각에 들어서 지난 독서 모임을 기억하고, 보신각 앞을 건너자마자 있는 영풍문고에서 아마 그대도 기억할 여느 일화를 떠올리며 계속해서 걷습니다. 이렇게 오래 걸은 게 얼마 만인가 생각합니다. 근래 사유가 멎었더랬는데, 그건 내 사유가 퇴화한 것이 아니라 내 걸음이 부족했던 것임을 깊고 올올이 체험합니다. 그러니 오늘 글의 분량은, 내가 걸은 길이만큼 깁니다.


광화문 교보문고에 도착합니다. 사람이 참 많습디다. 도서 검색 컴퓨터를 오래 차지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것저것 책 위치를 인쇄했더니 영수증 길이가 발끝에 미칩디다. 그 자리를 찾아가다 보면, 중간중간 화려하게 치장해 둔 베스트셀러 내지는 마케팅 도서들의 매대 매대마다 발걸음이 걸립니다. 베스트셀러가 이리도 낯선 것을 보면 서점이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입니다. 책을 펼쳐 대강 훑습니다. 추천사는 건너뛰고, 목차와 작가 서론, 그리고 결론 및 해설을 읽고 덮기를 반복했습니다. 내가 찾는 주제가 어렵기도 참 어렵습니다만, 그게 그리 쉬이 찾아내질 리 만무할뿐더러, 베스트셀러는 책의 구성과 깊이가 너무 정갈해 읽을 맛이 잘 나지 않습디다. 그때 내가 찾고 있는 것이 곧 ‘인문학의 쓸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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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말, 우리 독서 모임에선 ‘멋진 신세계’를 공통 도서로 선정했습니다. 그건 그대의 추천 책이었고, 책을 다 읽기도 전에 우리 둘은 그 주제에 관해 토의했습니다. 그대의 논지는 대강, ‘저 멋진 신세계에서 인문학은 조금도 기능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시대가 저것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는가? 쾌락 제일주의의 멋진 신세계에 미치지 못할지언정, 쾌락 우선주의라는 아찔한 나선 위, 포스트모더니즘 이후로 방향성을 상실한 채 질주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사랑하는 인문학은 무슨 쓸모로 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의 필요를 증명하고, 거듭 좁혀지기를 반복하나마 최후의 자리를 지켜낼 것인가. 무엇으로 살아남을 것인가 인문학은, 인문학의 필수 불가결인 쓸모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때 그 이야기를 하는 그대의 얼굴이 사뭇 진지하게 어두웠습니다.


교보문고를 3시간 동안 서성였습니다. 인문학 파트의 베스트셀러는 전부 다 훑은 것 같습니다만, 어째 시원치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정답이 있었더라면 이미 밝혀졌을 것이고, 거기 정녕 하나의 정답이 존재할 수 있었더라면 인간이 이토록 천방지축으로 자유롭고 개별적이지는 않았을 터. 반면 인간의 문제에 정녕 하나의 정답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유쾌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기 위해선 하나의 인과가 선제 되어야 하고, 하나의 인과를 지닌 인간 사이에 개성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몰개성의 세계가 이달 말에 우리가 논할, ‘멋진 신세계’가 아니겠습니까. 이것 참 군침 도는 것이 기대가 아니 될 수 없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책 제목이 역설로써 가리키려는 바, 지금 이 세계가 바로 그 멋진 신세계라 생각합니다. 그대로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논지, 아직 그대를 망설이게 하는 모든 것을 포괄한 채로 그리 생각합니다. 내가 이 세계를 긍정하기 위해 불평등, 착취, 빈곤, 악의 존재를 외면하지도 배척하지도 않으니까요. 다만 무엇이 옳은가가 아닌, 무엇이 지금 힘을 지닌 채 세상에 그 결과를 기계적으로 떨치고 있는가, 즉 세계의 올바름이 아닌 세계의 인과가 곧 나의 관심사. 그러나 오해하지 마십시오. 이건 힘에의 예찬이 아니며, 그 찬가에 쓰일 마중물도 주춧돌도 아니니까요. 한 번 일어난 것은 언제금 다시 일어날 수 있고, 나는 그 안에 놓인 인과를 해석하려 할 따름. 그러므로 세계를 역학의 관점에서 해석합니다. 어느 한 가지가 힘을 가지면, 그 대립물로부터는 반동적 힘이 축적됩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상호작용하며 알 수 없는 방향성을 자아내, 미래는 그를 향해 어지러이 나아갑니다. 아직 언어로 다 정립하지 못했지만, 내 머릿속에 자리한 희미한 조감도는 대략 변증법 구도 위에 자리한 삼체적 카오스를 그립니다. 즉, 3+@의 주체들이 삼체의 궤도를 이룬 채 휘청이며 나아가고 있을 미래는, 다 지나고 바라보았을 제 끝없는 정반합의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으리라 추찰합니다.


나는 이 세계를 긍정하기 위해 선함을 긍정하지도, 온통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러한 시도가 범하게 될 실수가 무엇인지 우리는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멋진 신세계의 숨은 주제가 바로 ‘구원의 역설’이 아니겠습니까? 인간을 불행하게 하지 않기 위해, 인간으로부터 자유를 빼앗아버린 역설. 개별 주체는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그게 곧 온전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역설. 불행을 박탈 당하자 행복을 도모할 능력도 함께 사라져 버려 소마라는 마약에 의존해야 하는 인간의, 아- 진짜 갑자기 짜증이 확 치밀어오르는 이 역설.


인간은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불행을 통해 행복하는 법을 스스로 단조해야 하며, 이 맥락 하에서 자유가 형벌이란 말은 조금 더 깊이 와닿습니다. 제한 없는 자유란 버거움이라지만, 우리 존재의 설계 자체가 그것과 떼어질 수 없게 되어 있음을 가리키니까요. 우리 뼈 깊숙이 흐르는 척수 속에 자유에 대한 갈망, 더 정확히는 ‘내 스스로 이루어 그것에 만족하리라는 어떤 야망’ 같은 것이 흐르는 것 같습니다. 마치 강아지처럼 행복을 배급하고 생활의 불편 일체를 치워버리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는, 그러므로 우린 참으로 탐험하는 존재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세계를 거닐며 지도를 밝히고, 조막만 한 것인들 스스로 창조한 것으로부터 온전한 기쁨을 누리니까요. 이런 관점에서 우리의 일상을 되바라보면, 근래 자주 들리어 오는 피로와 우울이 달리 보입니다. 어쩌면 너무 많은 것들이 밝혀져 더 이상 모험할 게 남아 있지 않은 우리들의 슬픔이려나. 이 구절에서 느닷없이 어릴 적 논두렁을 자전거로 달리던 기억은 떠오르고, 한여름 뙤약볕 아래 바둑판처럼 끝없는 격자로 구획된 논두렁 길을 모조리 내달리게 하던 것은 바로 자유와 모험하는 본능이 아니었을까. 난 아직도 그때 그 길을 눈감으면 얼른 그려낼 수 있습니다. 또, 집 바로 뒤편에 자리한 숲속의 길들도요. 숲 한가운데로 난 희미한 길들은 앞서 지나간 사람의 발길에 풀이 누운 자리, 희미하게 남았다가 곧 풀이 다시 자라면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는 것. 그것들마저 내 안에 잘 표상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내 세계 속에 들어서 오래도록 자리하는 이미지들.


그러므로 자유가 형벌이란 말에 내가 깊이 공감하면서도, 최후에 거절하는 까닭은 이상과 같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원하는 게 아니라, 우리 존재의 설계도면 상 그것이 필수적이라는 취지. 물론 끝나지 않는 레이스라는 건 생각만 해도 퍽 지치는 일입니다만, 지치고 피로한 것도 긴 시계열로 놓고 보았을 때 잠깐의 일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니까요. 우리를 영장이자 지배종으로 만든 유일한 힘이 정말이지 오직 적응에 있다면, 우리의 적응이 지금 어느 시점에 와있는지를 생각합니다. 작금 고등 교육자가 먼 과거 대학교수보다 많은 것을 알고 보고 느끼는 시대입니다. 유튜브엔 온갖 자극적인 영상이 판치지만, 한편으론 시사·인문학·과학 교양 등의 콘텐츠도 이해하기 쉽고 접근하기 쉬운 형태로 제공되고 있습니다. 밥 먹고 출퇴근하는 시간 동안, 우리가 내키기만 한다면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는 이것들, 그것의 선택마저 자유입니다. 심지어 AI를 활용하며 지적 고도화의 싸이클은 더욱 가속되고 그 과정에서 사유의 외주화라든지, 생각하는 능력의 퇴화라든지 하는 자극적인 화두가 대두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으며, 그건 분명 필요한 경고성 자각입니다만, 하나의 사태에 비관적인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닐 텝니다. 결국 ‘개인의 자유’ 문제로 환원될 이러한 사회현상들의 가치평가는 실상 양 극단을 모두 고려하였을 때, 오로지 좋음도 오로지 나쁨도 아닌 그 가운데 애매하게 놓여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부정적인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것을, 그 반대에서도 마찬가지 것을 꾀합니다.


한편 사람의 이성은 생각보다도 더 뼛속까지 이분법적이라, 하나의 좋음이 다른 하나의 나쁨에 결부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만, 나는 이쪽도 저쪽도 극단적인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현실적이지 않다 여기는 까닭입니다. 사회현상을 선도 악도 아닌 의지로, 오직 의지의 현상과 적응의 산물로 나는 간주합니다. 선악은 그 안에 동시에 잠들어 있고, 어느 하나가 조망되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나 여깁니다. 명백한 악행 말고 “사회현상”을 일컬어 하는 말입니다만, 그럼에도 여기 제기될 그 흔한 반례를 헤아리면서도 아직은 그렇게 나 말하렵니다. 그러므로 나는 선의 의지도, 악의 의지도, 그 자체로 긍정하지 않습니다. 불완전하기에 전적으로 긍정할 수 없고, 그러므로 무엇이 옳은가가 아닌, 무엇이 일어났는가에 집중합니다. 내가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사람의 어떤 의지가 그 자신을 벗어나 외적 세계 전체를 지배하려 드는 것뿐. 그것이 ‘선의 의지’일지라도, 그것이 ‘멋진 신세계’가 암시적으로 가리키는 바가 아니었습니까. 한 인간으로부터 모든 고통을 빼앗는 것은, 선의가 행할 수 있는 최대의 경악입니다. 그렇다 하여 그 반대가 참이 되는 것은 아니라지만, 참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을 테요, 나도 아직 찾고 있수다. 다다를 수 없음을 알기에, 역설적으로 탐구가 멈추어서 안 된다는 것만을 이해합니다. 변증적 소실점처럼 끝없이 다가갈 뿐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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