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원엽, 오늘은 날이 좋은 토요일이었습니다. 7월 11일, 그대의 생일 하루 전날입니다. 요 며칠 늦추어진 장마라 하며 뉴스가 떠들썩한 참이었으나, 기대치 않은 햇살이 참으로 눈부셔 좋았습니다. 오늘 낮 기온을 두고 선선하다고 말하진 못하겠습니다만, 습하지 않아 적이 충분하였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마비노기를 하다가, 아점을 먹고 낮잠까지 잔 뒤, 느지막이 집을 나섭니다. 그때가 아마 1시 반, 대지는 이미 충분히 달구어진 상태였고, 햇살의 밝기와 세기 또한 하루의 절정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아마 북향으로 나 있을 내 방 창문으로는 햇살이 그리 와 닿질 않아, 언제나 집을 나서면 화들짝 놀라곤 합니다. 이토록 대비되는, 반전되는 세계라니. 마치 조금 뒤처진 아이를 굽어보며 외치는 친구의 즐거운 비명처럼, 어서 따라오라고, 뛰어서 넘어서 오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은 곧 즐거운 조바심. 문을 나선 직후 내 눈앞에 펼쳐진 세계엔, 교향곡 4개 악장 중 3악장만큼이나 고조된 햇살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집을 나서자마자 재생한 음악은 하루의 향방을 정하고, 오늘의 테마는 시벨리우스 교향곡 2번입니다.
출타와 거의 동시에 내 머리는 사유, 또는 상념으로 차오르기 시작합니다. 산책이 사유의 가장 좋은 친구라는 직유적 격언이라든지, 자기 글은 길 위에서 쓰였다는 일화라든지, 가만히 앉아 글 쓰고 사유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역설적 격언 따위가 떠오르는 구절입니다. 산책이 사유를 동작한다면, 내디딘 발로 대지를 지르밟는 만큼 내 머릿속의 윤전기는 꾸물렁 꾸물렁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페달을 밟자 활자가, 단어가, 문장이 스멀스멀 튀어 오르기 시작합니다. 이미 이 글은 그 순간, 즉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다만 작문이란 사유의 뒤처리 작업, 마치 받아 든 작가의 원고를 위한 출판 작업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대가 이따금 동경하며 가리키던 이것은 머릿속에 이미 떠오른 채 외따로이 흩뿌려진 사유의 금속활자를 활판 안에 끼워 넣고, 가지런히 정렬해 백지에 조판한 다음 기나긴 교정작업을 행하는 것인바, 가내수공업식 열정의 소산입니다. 노가다란 뜻이외다.
사유 활동의 비유인바, 저 윤전기의 이미지는 구시대적 기계인 편이 좋겠습니다. 발로 페달을 밟아 작동하는 자가발전형 윤전기라니요. 하지만 그게 인간의 사유 현상을 좋이 비유하는 것 같아 곧 우스워집니다. 그때 주변을 거니는 행인으로서는 느닷없는 내 웃음이 이상하게 비치고 있을 텝니다. 그럼에도 사유란 정말이지 페달을 꼬박 밟아내는 만큼만 진행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렇고, 분절 없이 기나긴 종이 위로 윤전기가 지져둔 활자의 내력은 곧 생각입니다. 단, 그것은 소유한 생각이라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겠습니다. 누구에게나 상념 속에 저마다 생각 속을 거닐 터이고, 달리 말해 생각이 없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나, 정리된 생각이란 마치 잘 정리된 도서관의 장서처럼 원할 때마다 손을 뻗어 닿을 수 있는 책처럼, 손에 쥐일 수 있는 것으로 변모한다는 것 정도가 차이일 것입니다. 이리 표현하는 것이 괜스레 고풍스럽고 귀족적으로 뻗어있는 에리히 프롬의 하이얀 손가락 끝에 덜컥 걸리는 듯해 조금 찝찝하지만 말입니다. (에리히 프롬 - 소유냐 존재냐)
하하, 농담입니다. 둘은 분명 다른 것. 프롬식의 소유-존재 구분은 어떠한 행위의 목적성에 달린 것이며, 그에 따른 경험의 체득 방식을 조망하고 있으니까요. 애초 우리에게 어떤 긴급한 요구가 일어 자신을 소유형 인간이라 열렬히 칭해본들 그게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그가 말한 소유는 드러나고 보이기 위함, 즉 과시 행위를 지향하고 그를 통해 증명되는 무언가라고 하자면, 우리는 참- 존재적 행동양식의 인간입니다. 어디 가서 꺼내어보기 어려운 것들을 가슴 가득 담아, 들키어 우스워질까 꽁꽁 싸매고 있는 우리들의 초상이란! 하하하하, 역설적이고 어여쁘군요.
얼마나 많은 글을 읽었던가 우리, 한 번에 한 발자욱씩만 나아가는 사유는 얼마나 멀리까지 떠나왔으며, 그 결과 우리 안에 얼마나 기나긴 두루마리가 접히어 있는가, 지금 이 순간 사유가 걸어온 내력을 돌아보며 음미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퍽 자랑스레 여깁니다, 누군가 우스꽝스럽다 한들 이젠 다 좋습니다. 살아온 시간의 9할은 몰이해였습니다만 그건 뼛속 깊이 당연하고, 이제에 심지어 자랑스러울 일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이해될 수 있는 삶’이란 산술적 의미에서의 닮아있음을 지칭하니까요. 몰이해는 미추와 호오, 선악을 떼어놓고 평가할 제 가장 고유한 것임을 가리켜 드러내는 바이고, 나는 내 사유와 글에 홀로 감동하는 피그말리온이며, 이제 그것을 탄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기로 합니다. 부끄러움 많은 생애였습니다만 신실한들, 딱히 쓸모가 있진 않았던 까닭입니다. 이 구절은 특히 우리의 ‘젊은 요조’에게 바치고 싶군요.
그대는 어떻습니까. 그대 읽고 생각하고 써온바, 사유 일체에 대해 얼마만큼의 자부를 느낍니까. 내 생각에 그대는 아직 부끄러워하는 것 같습니다. 며칠 전 그대 내게 “인문학의 쓸모”에 관해 물었고, 그건 나를 향한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나는 지금 이 백지 위로 그것에 답하고 있다지만, 실상 그 질문은 애초 그대 자신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대는 인문학 일반의 쓸모를 물었지만, 내가 예상하기로는 자신이 열렬히 애호하고 전심을 바쳐 읽고 생각해 오래 쌓아온 인문학적 사유 일체, 그대 안의 두루마리, 그것의 쓰일 자리를 찾고 있는 듯싶습니다. 너무 적나라했나요. 사람에겐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이 있고, 굳이 침묵으로 기다려주어야 하는 게 있음을 알지만… 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선 냉정해지는 편입니다. 내적인 문제인즉 고뇌란 더러 교착된 생각들이거든요. 동시에 참으로 상정되는 두 가지 생각의 대립, 모순은 오래 꼬인 매듭 같아서 스스로 풀어헤치지 않고선 그 자리에 오래 남더이다.
내 인문학의 쓸모를 피력한들 그대는 거기 반응해 부정을 떠올릴 것이고, 반대로 그것의 무의미함을 낱낱이 논증해 본들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리고 내가 양가적인 그대의 토로에 고요히 변죽을 맞춰올 수 있었던 까닭은 그게 거짓이 아니라는 것도, 임기응변식의 짧은 생각이 아니라는 것도 몸소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의 쓸모와 무의미라는 상반된 개념은 내 안에 동시에 참이면서도 모순이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내 모순은 이 두 손에 의해 하나씩 해부되었으며,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무지일 뿐. 두 가지가 동시에 동률로써 존재한 채 이지 속에 잠들어 도사리고 있는 것, 모순 그것이 문제이고 우린 개중 한 가지를 선택하거나, 그 멀리 있는 두 가지 사이에 다리를 놓아야만 합니다. 뭉근하고 오래질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차라리 전력으로 생각의 교착점을 뛰어넘기를 난 희망합니다. 그러한 것으로서의 자유와 선택이란 분명 무겁습니다. 일전 같이 읽은 참존가와, 이번에 같이 읽을 멋진 신세계가 연상되는 구절. 기억합니까. 나는 그것을 살고 있습니다. 누구도 이해치 못한들 좋습니다. (밀란 쿤데라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한편 글을 쓰는 지금 내 옆에서 AI는 스스로 가열차게 돌아가고 있고, 오늘의 주제는 그댈 위한 ‘인문학의 쓸모’가 아니겠습니까. 글은 오직 노가다라지만, 그것도 반만 맞는 말인 듯싶습니다. 실은 ‘읽히는 글’이란 나보다 AI가 훨씬 잘 쓰는 법이거든요. 서-본-결 구조가 명확하고, 챕터 분절이 분명하며, 양식이란 그릇에 맞추어 덜어낸 뒤 눈으로 소화하기 쉽도록 죽처럼 묽게 풀어헤친 글, 수사 표현도 독자의 관심을 훔칠 서론에만 조금 가미하는 것 정도로 아마 끝. 이렇게 덜어낸 것이 읽기에 편한 글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자면 내 글은 읽고 따라가기조차 벅찬 것임을 상대적으로 이해합니다. 유감없습니다. 읽히기 위한 글이라면 응당 저러해야겠지만, 내 작업이란 사유의 기록이요 보존을 지향하는 탓에. 나는 오직 나를 위하여 작문할 따름입니다. 인문학이라, 내 그것의 쓸모는 가장 먼저 나를 감동시키기 위함. 자위라 하여도 좋습니다. 그러니 누구도 이해치 못한들 좋습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써두면 마치 내가 더는 바랄 것이 없는 것처럼 오해될 것이니, 정확함을 기하여 다음의 문장을 하나만 더 붙여둡시다. 요원히 오래 묵은 소망이 있다면 ‘지극히 개인적인 이것’이 언젠가…… 뒤따를 말씀은 익히들 아시겠지요.
비유는 실재하는 것을 새로이,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는 관점, 또 다른 눈이라면… 나는 내 눈이 보고 있는 것을 옳게 펼쳐 보이고 싶습니다. 두 인간 사이에 결코 좁힐 수 없는 인식의 벽이 있다지만, 나는 비유를 통해 내가 바라보고 있는 이 세계를 전시하고자 합니다. 내 새끼라 하는 말이지만, 내가 바라보는 세계는 황량할 정도로 공활하고, 끝내주게 멋집니다.
II.
내가 발을 구르는 만큼 내 머리의 가장 커다란 톱니와 나사는 삐그덕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하고, 나는 오늘 유쾌합니다. 무엇인가 진지하게 쓸만한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전적으로 행복하니까, 쓰는 것이 행복이요, 정녕 나의 쾌락을 위한 일이라면! 오히려 근래엔 쓸 만한 생각이 없어 시무룩했더랍니다. 집을 나서자마자 나를 감도는 사유 내지 상념이란 대저, 오래된 채 딱히 진전없는 것들. 나는 명랑해지려 노력합니다. 또한 유쾌해지려고도, 자신감을 갖추려고도 애쓰죠. 명랑함, 유쾌함, 자신감을 애쓴다는 것은 그것이 저 알아서 동작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내 본디 모습은 그대 눈에 비친 것만큼 명랑하지도, 유쾌하지도, 심지어 자신만만하지도 않습니다. 그 반대라 하겠습니다만 이것이 만약 그대에게 놀라움이라면 그만큼 내 사유 활동은 잘 동작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렇듯 잘되지 않는 것을 되게 하려 애쓰는 일과, 목적인 결과를 위해 그것의 원인을 헤아리는 것은 내 안에 흐르는 강물처럼, 유구한 사유의 파고를 자아냅니다.
하여 나는 걷는 내내 한 시도 조용할 날이 없어 언젠가부턴 기쁩니다. 고독이 바야흐로 몸서리쳐지는 것으로부터 친밀한 것으로써 선뜻 다가와 있던 것은, 사유하는 내 안에 활자와 목소리로 가득 차 내가 완전한 적막에서 벗어난 덕분이요, 나아가 이러한 고뇌의 작업이 고독 가운데에서만 무르익어가는 일이라, 내가 그 작업을 원하는 만큼 고독이 내게 필요한 것으로 변모하는 까닭입니다. 나는 걸으며 침묵 속에 있으나, 정작 고요히 세계를 주유하고 있지는 않던 것입니다, 말이 없을 뿐. 이상의 것들을 어떻게 입의 언어로 일삼기를 희망하겠습니까. 입소리는 짧으면 담지 못하고, 길면 온전히 전달하지 못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 수사학)
고뇌에도 상념에도 손쉬운 정답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없었으므로 사유엔 끝이 없고 오래 사유하는 것은 사람의 안에 존재하는 광대무변한 인식의 세계를 확장하려는 달뜬 몸부림. 내 인식의 세계엔 밤하늘같이 까만 경계가 있어 반구의 천정을 뒤덮고, 그 경계 너머가 곧 내가 몸소 알지 못하는 세계라면… 그렇다면 이러한 내적 세계의 비유에 있어, 밤하늘처럼 짙은 감색 빛 천정은 곧 무지의 베일일 것입니다. 저 무지의 장막, 빛을 흡수하는 어둠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나 알고 싶습니다. 내 경계를 뛰어넘어 바라보고 싶습니다. 사람이 한순간 자신의 무지를 뛰어넘을 수 있다면, 마치 밤의 칠흑 너머로 은하가 빛나고 있으되 우리가 그를 보지 못하던 것처럼, 하늘의 경계 너머에서 바라본 우주 위로 무수한 항성과 항성, 별의 탄생과 죽음과 우주적 단말마로 가득 차 있었음을 알아보는 순간의 마음은 그 얼마나 아찔할는지, 높고 고요하고 두렵고 불안하고 환희하게 될는지를 궁금해합니다. 그러고는 마침내, 이른만큼의 높이에서 이 지상을, 나와 나의 자그마한 문제들을 굽어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짙은 감색 빛을 한 무지는 모든 빛을 흡수하는 어둠처럼 깊고 아득해 그 너머를 허락하지 않고, 나는 오래 여기 남아 헤매고 있습니다. 지상의 인간은 비행할 수 없기에 하늘의 경계를 향해 사유의 제단을 한 단씩 쌓아 올라야만 하며, 더딘 축조로 사유의 경계 언저리에 도착했다 한들 한 번에 한 가지씩의 장막만을 거둘 수 있기에, 이는 지난함이란 말로조차 다 가리키기 어려울 정도로 지난합니다. 또한 참으로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것은 그 전까지 틈 없는 진실로 믿었던 세계를 파괴하는 일이매 그로부터 발생하는 아찔함과, 완전히 다른 관점으로부터 과거의 자신을 해석하매 진실하고도 역겨운 구토감을 수반하는 따름에 초월은 애초 못 되어질 소망. 즉 걸어온 바대로 걸어야 하며, 쌓아온 바대로 쌓아가야 한다는 지상의 사정이란 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합니다. 이 지루한 작업에는 노동의 기나김이 수반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이해 너머를 바라는 모든 자에게 이지적 노동, 즉 사유가 요구됩니다. 그러므로 혹자,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의혹으로 물어오는 것도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러나 그러나 한 번만이라도 자신의 세계를 부수어본 사람이라면! 그 모든 지난한 노고와 고소 高所의 현기증과 역겨운 자신에 대한 부정을 지나쳐, 새로운 인식의 지평으로부터 ‘세계를 다시 만나는 일’이 어떤 희열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미 이해하고 있을 터입니다. 이때 나는 성층권으로부터 터오는 여명을 바라보는, “멋진 신세계”의 풍경을 생각합니다. (헤르만 헤세 - 데미안)
인식의 세계를 수차례 개척해 온 사람은 더러 겸손해지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세계가 완전히 뒤집어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체험한 까닭에. 그러나 나는 아직도 겸손히 머무르지 못한 채 정열적으로 천방지축을 떠는 까닭은, 아직도 그 너머에의 개척을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여기어 여정을 매듭지을 수 있더라면 나도 겸손을, 즉 나와의 협상을 애써보았을 터, 그러나 내 세계의 저변을 끝없이 확장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언젠가 자유하기를, 마치 지금도 일정 그럴 수 있게 되었듯, 일찍이 고뇌였던 것이 이르러 기쁨이 되고 소름끼치던 비극은 거꾸로 유쾌함이 될 수 있는 인식의 무하함, 또는 무상함. 즉 한계도 한정도 결정됨도 없는 인식에 대한 앎, ‘즐거운 지식’의 세계가 저 어둠 너머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습니다.
이 비유적 세계의 감빛 밤하늘 위로도 별이 총총 박혀있으려나,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아니 정녕 그러합니다. 어떤 희미한 앎에의 예감, 기존의 지식을 뛰어넘으려는 듯한 영감을 기억할 수 있다면 누군들 이해할 것입니다. 슬슬 여기까지 진전한 비유를 갈무리합시다. 사유는 인식의 경계에 오르기 위해 계단을 쌓는 일이고, 그 방향이 아마 영감의 별이 빛나는 쪽일 것 같습니다. 그리곤 경계에 이르러 천장 샅샅이 핥아 균열을 발견하려는 작업입니다. 한편 지치는 일이에요. 더딘 작업의 피로도 물론이거니와 이미 말했듯, 몰이해는 그것의 호오와 미추와 선악을 떼어놓고 보자면 오로지 고유함이므로, 고유할수록 외로워지는 일입니다. 벌써 이 단락부터 한 번 보십시오. 이상의 소묘를 이해하렵니까, 나는 이것의 설명을, 전달을, 이해를, 그러므로 공감을 성공했습니까. 잘 모르겠수다. 그저 이게 내 심상 속에 있는 세계, 사람 저마다의 고유 세계를 가리키는 메타적 이미지입니다.
여기 오래 남아 헤매는 딴에는 어떤 완전무결한 앎, 논박할 수 없는 앎, 즉 진리가 내게로 쏟아졌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가끔은 내 무지를 일거에 초월할 수 있는 앎이 내게 주어졌으면 합니다. 내 앎의 저변이 확장되는 속도는 소가 씹은 여물을 뱉고 도로 삼키듯이 느리고 더디기에. 그러니 감색 빛 하늘을 찢고, 혜성 같은 진리는 내게 쇄도하였으면!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받아들이고, 그렇게 이해한 것 중 필요한 것만을 해석하며, 마침내 믿게 되는 것만을 진리로 간주하여 그 속에 산다면 이 모든 과정, 앎과 이해와 해석과 믿음은 각각 그 사람이라는 세계에 있어 관문이요 장애물입니다. 그 관문을 하나씩 열기 위해, 아니 열지 않을 수 없게끔 나를 재촉해온 것들, 오류와 수치와 좌절은 그 얼만했던지! (소세키 - 문) 거꾸로 말해 그 모든 것을 제물로 바쳐서야만이 가능한 일이었으며, 사람의 나약함이 미지와 불확실의 해역을 항해하기 위해 불가피함을 요구한다면, 해역의 너머를 꿈꾸는 자에게 그 모든 기피 대상은 필요로 반전됩니다. (허먼 헬빌 - 모비딕) 그러므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오던 것입니다, 일상 속에서, 아주 함축된 단 한 문장의 말로써, “그 고통을 긍정한다”라고. 단, 입소리는 짧으면 담지 못하고 길면 온전히 전달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리고 바로 여기에다가 비트겐슈타인 인용을 미리 붙여두고 싶습니다. ‘세계의 한계는 주체의 한계이다, 그러므로 세계란 곧 나의 세계이다.’ 내게 세계란 스스로 이해하는 만큼의 양감으로써 다가와 뚜렷하게 감각되고, 선명하게 인지되며, 그만큼 분명하게 구획되는 것. 그 너비와 깊이가 곧 내 세계의 크기이며, 나의 그것은 과거와의 비교를 통해 공간적으로 감각됩니다. 이렇듯, 개인의 내면에 저마다의 세계가 있다는 말을 나는 공감각적으로 느끼어 동의합니다. 그 닫힌 세계엔 각자가 수집한 경험과 기억의 표상들로 채워져 있고, 그 세계의 너비와 높이가 곧 인식의 크기일 텝니다. 그러나 우리가 표상한 것들이 허다할진대 그 모든 것들은 스스로 잘 정리되어 있었겠습니까, 결단코 아니일 테고, 나는 나의 표상들을 가지런히 정리합니다. 진실로 이 글 또한 내 인식의 정리 작업이 되었습니다. 백지 위에 모두 쏟고, 모순되는 것은 지우고 합당한 것에는 순서를 부여한 뒤 연결하는 작업. 곧바로 접 붙지 아니하려는 것들에는 손수 논리의 얼개를 짜, 그 사이에 끼우겠습니다.
‘세계는 나의 세계이다.’ 나는 이 문장이 지니는 울림, 넓은 콘서트홀을 나지막이 울리는 한 줄기 짙은 목소리와 같은, 광막한 진동을 사랑합니다. 세계가 자신의 인식 속에 표상된 것으로만 느껴지는 ‘나의 것’, 즉 전사된 것으로서의 세계라면, 인식 주체의 한계가 곧 세계의 한계임을 점점 더 알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비관주의란 아직 자기 인식의 세계 너머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지도, 그러므로 믿지도 못하는 것에 불과하며, 낮은 곳으로부터 조망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적 무지를 온전히 가리켜 논하매 일말의 감춤 없는 까닭은 여기 우열 의식을 함의할 생각일랑 추호 없는 까닭. 오직 그것을 스스로 바라는가, 자기 인식의 한계 너머를 열렬히 궁금해하는가, 즉 호기심의 여부에 지나지 않는 이것임을 압니다. 이런 것은 몰라도 그만이며, 오히려 몰라야 살기에 더 수월한 것이고, 안다 하여 딱히 바뀌는 것 하나 없는 것들입니다.
이상이 내 존재 양식이라고 해두자면, 이러한 인식의 양태와 그것을 이루는 기나긴 행보란 마땅히 행해야 할 만큼 불가피하거나 절대적으로 유의미한 것이 아니임을, 즉 ‘내 인문학의 절대적인 쓸모’ 따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임을 압니다, 뜨겁게, 치열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찍이는 내 올바름과 마땅함, 즉 나의 인문학적 가치를 백일하 증명하기 위해 수 백의 밤 동안 스스로 논증해 보았고, 그것이 불가능하며 그 자연발생적인 욕구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 큰 장애였다는 최종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왜 우리는 여전히 망설입니까, 오래 불안해하고, 실은 목말라했습니까. 어쩌면 비관주의란 ‘무언가 이미 믿어지고, 나아가 더 철저히 믿고 싶은 것’이 선행되었을 때만 잇따르는 일련의 ‘사건’이라면, 비관의 존재는 필연적인 것을 가리켜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미 인식의 하늘 위에 별 같은 영감이 도사리고 있는 까닭. 아직 발견하지 못했지만 무언가 더욱 훌륭한 것이 존재할 것 같은 예감, 숱하게 수집한 표상들이 얽고 연결되며 발생하는 새로운 인식의 가능성과, 아직 다 알 수 없는 그 방향을 향한 본능적 이끌림! 다만 아직 발견하지 못한 이것, 그러나 “한 번 이해한 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므로 나는 그것을 지우고 잊고 밀쳐냄을 애쓰기보단, 세계를 뛰어넘을 수 있길 바랍니다.
‘나는, 내가 발견하고 정립한 것들은, 내 인식의 체계는 무의미한가.’ 아무런 반향이 없는 내 이것을 마주해 참 오래도 물어왔습니다. 그러나 YES or NO, 둘 중 어느 한 가지만을 선택하는 것은 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느 것도 불완합니다, 너무 비대해진 내 이지가 바라는 것은 분명한 것. 예컨대 ‘내 지혜는 무의미한가, 전적으로 그러하다.’ 이것은 지나친 비관이자 패배주의에의 굴복. 반면 ‘내 지혜는 무의미한가,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고 이것은 유의미하다.’ 이것은 반향 없는 현실을 외면하며 스스로 고립을 택하는 처사. 그러므로 내 가슴이 허용하는 한에 있어선 어느 하나 버림 없이 모조리 끌어안기를 원합니다. 그토록 강인할 수 있기를.
다시 에리히 프롬을 빌려 설명하자면, 내 무의미는 소유적 관점에서만 타당합니다. 이 글과 생각은 얼른 이해되지 아니하고, 아무런 실용성도 내포하지 않습니다. 말인즉, 이것을 안다 하여 무언가 실질적인 유용이 기대되지 않는다는 말이며 내가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반면 존재적 관점에서야 말해 무엇할까요. 이상과 같은 삶의 의미 문제와 존재론적 불안, 즉 실존 위기를 뛰어넘는 방법론적 이해를 깊이 내재하고 있습니다. 흔히 여기 정답이 없다고 일컬어온 까닭은 실상 그것이 하나의 문장으로써는 결단코 전해질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저마다의 세계에 존재하는 표상과 인식이 다르기에 그 사람의 세계에 걸맞은 것은 바로 그 자신의 인식만이 알아볼 수 있고 선별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많이 읽어본 건 아닙니다만, 좋은 철학들이 알려주는 것도 여전히 방향성에 머무르고, 여남은 것은 개인의 실천에 달린 것 같습니다. 즉 이 개별성이 영영 우리 바깥으로부터 해결될 수 없는 것이라면, 지금껏 손수 일궈온 것들이 무의미하기는커녕 정반대일 것이며, 언제고 우리를 엄습할 이 인간 문제로부터 미리 보호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 참고로 지식의 저주는 과정상 필연으로, 일종의 예방접종으로 간주합니다.
사정이 여차여차하므로 나는 인정의 세계의 반대편인 자족적 세계로의 가능성을 꾀합니다. 지금 내가 연구하는 것은 이 단 한 가지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까지 뻗어온 질문은 단 한 가지로 수렴해, 니체의 경구와 만납니다. ‘내가 바로 그것을 원한다, 그러므로 거기 수반되는 고통까지도. 너는 네 삶을 전적으로 긍정하는가!?’ 나는 언제나 그렇다고 답해왔고, 그게 내 삶 전반에 걸친 태도. 그러므로 언젠가부터 나는 인문학의 쓸모를 내 바깥에서 찾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대의 의문에 답하진 못하였군요. 그대 고뇌는 다른 곳에 있으니까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