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아.
쥐는 벽 틈을 긁어대고, 비둘기는 병들고, 여우는 거리를 점령한다. 통제 범위를 벗어난 자연의 급작스러운 변화에 위기감을 느낀 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재난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동물들은 그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중인지도 모른다. 재난이라는 정의와 위기의식은 오로지 인간의 관점일 뿐이다.
스코틀랜드의 대표적인 극작가 스테프 스미스(Stef Smith)의 희곡 『인간동물들(Human Animals)』은 2016년 런던 로열 코트 극장(Royal Court Theatre)에서 초연된 이래, 세계 유수의 무대에서 올려진 작품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전에 집필되었지만, 인간과 비인간(Non-human), 문명과 자연 사이의 갈등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포스트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극한의 위기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인간은 서로를 돕고 의지하는 고결함을 보이는 한편, 생존이라는 본능 앞에서 손쉽게 타인을 배신하기도 한다.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위기 속에 날것 그대로의 진심이 드러난다.
인간, 동물, 혹은 인간동물들
막이 오르고, 배우들은 관객을 마주한 채 앉아있다. 6개의 의자가 객석을 향해 일렬로 늘어서 있고, 배우들은 서로 시선을 맞추지 않고 객석을 향해 대사를 뱉는다. 독백도 방백도 아닌 기묘한 대화가 이어지며, 인물들의 표정과 감정이 여과 없이 전해진다. 관객은 자신이 연극을 보는 주체라고 여기지만, 어느새 무대 위 인물들로부터 관찰당하고 있다는 낯선 감각에 사로잡힌다. 마치 동물원에서 철창이나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구경하는 인간과 짐승처럼 말이다. 과연 누가 인간이고, 동물인지, 혹은 인간동물들인지 알 수 없다. 무대든 객석이든 인간이라는 동물로 가득 차 있다.
『인간동물들』은 말 그대로 동물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극이 끝날 때까지 동물은 한 마리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극 중간중간 삽입되는 '블링크(blink)'를 통해 사람의 언어인지 짐승의 울부짖음인지 알 수 없는 단편적인 대사가 넘나든다. 배우들의 몸짓과 사운드, 조명이 뒤엉키고, 에코 섞인 목소리가 익숙한 대화체 장면 사이에 끼어들며 위태로움을 극대화한다.
작품을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과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가 떠오른다. 각각 동물과 전염병을 소재로 하는 고전 소설이다. 『동물농장』이 동물의 탈을 빌려 인간 사회의 권력 구조와 계급을 풍자했다면, 『인간동물들』은 반대로 인간의 몸을 빌려 동물에게 가해지는 잔인한 행태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또한 『페스트』에서 전염병이 인간 군상의 도덕성을 시험했던 것처럼 해당 작품에서도 비슷한 장치로 활용된다. 동물과 전염병이라는 두 축은 결국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귀결된다.
먹이사슬의 딜레마
리사는 현실적인 인물이다. 그녀에게는 사회가 요구하는 '적당히' 합리적인 삶을 유지하고, 자신이 일군 현재의 안락함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반면 그녀의 연인 제이미는 좋게 말하면 낭만적인 이상주의자이고, 냉정하게 말하면 지나친 낙관론자다. 이들의 대립 구도는 이웃 낸시와 그의 딸 알렉스의 갈등과도 연결된다.
원래 여우의 집이었을지도 몰라.
어느 날부터 리사와 제이미의 집 근처에 여우가 자주 출몰하기 시작한다. 리사는 자신의 보금자리를 위협하는 동물들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며 가차 없이 내쳐버린다. 반면 제이미는 갈 곳을 잃은 동물들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며 오히려 품으려 한다. 리사는 그런 제이미를 답답해하며 '내 집'에 대한 소유권을 거듭 강조한다. 그러나 여우는 왜 리사의 집 주변을 서성이는 것일까. 제이미의 말처럼 인간들의 콘크리트로 덮기 전에 그 땅은 원래 여우의 서식지었을지도 모른다. 리사는 자신이 피해자라며 억울해하지만, 여우의 입장에서는 그 반대다. 그러나 여우는 이를 주장할 수 없다. 먹이사슬 아래 있기 때문이다.
도시가 위기에 빠지자 리사는 방역 책임자이자 상사인 사이를 따라 동물들을 처리하는 일에 앞장선다. 그의 냉혹한 지시에 철저히 복종하며 실적을 쌓고, 그 대가로 승진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방역의 대상은 리사 자신의 집이 된다. 한순간에 삶의 터전을 잃은 리사는 사이를 향해 분노를 쏟아내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리사는 사이보다 먹이사슬 아래 있을 뿐이다. 여우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포식자와 피식자를 가르는 선은 이제 인간과 인간 사이에 놓였다.
진리와 진실
인간은 이성적인 동물이다.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지만 본능 역시 존재한다. 그러므로 동물의 세계에서 강자가 약자를 압살하듯, 인간 역시 위기와 재난 앞에서 우위의 존재가 이익을 취하는 약육강식을 재현하게 된다. 극 중 존과 낸시가 나치, 성범죄자, 강아지가 물에 빠졌을 때 누구를 먼저 구할 것인가를 논하며, 인간의 절대적 존엄성이라는 신화에 도전한다. 생명의 우선순위를 따지는 딜레마에서 인간과 동물의 경계는 손쉽게 무너져 내린다.
클라이맥스를 지나 마지막 블링크 장면에서 공원에 목매달아 죽은 여자의 시신을 새 떼가 쪼아 먹는 장면이 묘사된다. 그리고 그 새는 다시 인간의 형상을 하고 도시를 걸어간다. 죽음이 다시 생명을 먹여 살리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순환 속에서 영원히 포식자에 머무를 것 같은 인간이라는 ‘기준’은 무의미해진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마정화 번역가는 인상적인 일화를 전해주었다. 코로나19 초기, 국경이 봉쇄되고 하늘길과 바닷길이 모두 막혔을 때의 이야기다. 해외 파견자도, 유학생도, 여행객도 모두 발이 묶여버렸고, 인간 사회는 불안과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인간의 문명이 멈춰 선 그때 바다와 하늘은 어느 때보다 맑았고, 고요해진 자리에는 소음에 묻혀 있던 자연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인간이 잠시 물러난 자리에 평화가 깃든다는 사실을 인간은 목도했다. 인간이 지구라는 생태계에 얼마나 악영향을 주는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불편한 진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욕심쟁이가 아니다. 적당한 집, 적당한 직업, 적당한 인생으로 이뤄진 ‘평범한 삶’을 원할 뿐이다. 세상에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적당함과 평범함은 인간에겐 선망의 대상이다. 그러나 이조차 차이에 의한 상대적인 기준에 불과하다. 결국 인간은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설정하고, 강한 존재를 악마화함으로써 평범에 다가서고자 한다. 그저 이기심을 가리기 위한 방어기제에 불과하다.
이와 관련된 여담으로 사이의 딸이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인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 극 중 사이는 존과 얽히며 그의 성적 지향이 암시된다. 그가 딸을 입양했을 수도, 혹은 양성애자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대 위에 한 번도 오르지 않은 딸의 이름이 데이지라는 점이 흥미롭다. 꽃은 인간에도 동물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극에서 가장 이질적인 존재다. 사이가 잔혹한 방역과 통제를 감행하며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할 때마다 ‘딸을 만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사이가 돈이나 명예가 아닌 딸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그에게 미세한 동정심을 품게 된다.
칸트는 인간 중심주의를 설파하면서도 동물에게 함부로 잔인하게 굴지 말라고 경고했다. 동물을 대하는 비인간적인 태도가 결국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 전이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생태위기 앞에 자연과 동물을 위한다는 명분을 앞세우는 것조차 인간의 또 다른 위선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생각조차 인간을 위함이기 때문이다. 다만, 현시점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태도는 명확하다. 우위가 아닌 공존을 택해야 한다. 인간은 동물의 부분집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