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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은 아주 거대한 무기다. 사람을 때릴 수 있는 것들 가운데 가장 잔인한 것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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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뱅크시
익명의 거리 예술가이자 그래피티로부터 예술 활동을 시작한 뱅크시에게 '벽'은 실제로 가장 큰 무기이자 캔버스가 된다.
브리스톨의 골목에서 시작된 그의 작업은 뒷골목의 낙서에서부터, 철도 아래의 콘크리트 벽, 공공시설의 담벼락, 검문소와 분쟁지역의 장벽까지, 점차 인간과 인간의 갈등이 첨예하게 맞부딪히는 현장으로 확장되어 왔다.
본래 벽은 안과 밖을 갈라 경계를 짓고 공간을 구획하는 동시에, 누군가를 물리적, 심리적으로 단절시키기도 한다. 또한 실제 전장에서 벽은 언제든 무너져 내려 누군가를 덮치는 치명적인 흉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뱅크시는 세계 각국의 가장 최전선을 활보하며 그 위에 균열과 전복의 목소리를 새긴다. 또한 본인 스스로를 ‘아트 테러리스트’라고 칭하는 것처럼, 뱅크시는 제도와 불법 사이를 교묘하게 오가며, 체제와 정부, 미술계의 권위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을 던진다.
이번 더현대 서울 ALT.1에서 열린 특별전 <뱅크시 : Still Here>은 일부 프로젝트 외 상업 전시를 승인하지 않는 뱅크시의 신념에 따라, 뱅크시의 초기 황금기의 인증 진품과 벽화 사진, 직접 주도한 오피셜 오브제를 통해 그의 메시지를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블랙 유머-소비와 자본주의
지금은 웃어라, 하지만 결국 우리가 지배하게 될 것이다.
- Laugh Now
뱅크시의 작업을 지탱하는 또 하나의 큰 무기는 유머이다. 카리브계 이민지 문화권 아래에서 음악, 그래피티 문화 등 하위문화를 섭렵해온 뱅크시는 그래피티 문화 특유의 아나키스트적 성향을 예술로 발전시켰다.
<지금은 웃어라>는 뱅크시의 대표적인 원숭이 연작이다. 같은 포즈로 다른 메시지를 걸고 있는 원숭이들, 이는 초기작인 Rat시리즈에서도 반복되는 양상이다. 양감을 강조한 그림을 반복적으로 찍어내고 그 위에 글자만 바꾸는 것 같지만, 이러한 반복적인 작업은 길거리를 걷는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의 분명한 이미지로 남는다.
이번 전시를 관람하며 느낀 것은, 거리 위의 예술은 다가가기 쉽고 직관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술관처럼 그림 자체, 예술 자체를 깊이 조명할 수 있도록 조성된 공간은 추상적인 작품들도 오래 곱씹을 수 있지만, 거리 위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전선이다.
거리 위에서 분명히 어딘가를 향해 가는 사람들을 그 자리에 잠시나마 머무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한눈에 들어오는 직관적이면서도 선명한 메시지와, 그것을 여실히 담아내는 선명한 이미지가 요구된다. 그리고 뱅크시는 그것을 여실히 해내고 있다.
풍선과 소녀, 사랑은 쓰레기통에
<풍선과 소녀>는 뱅크시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이다. 2002년, 거리 벽화로 처음 등장한 이 작품은 하트 모양 붉은 풍선을 향해 손을 뻗는 어린 소녀와, “There is Always Hope”라는 문구를 통해 지속적인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다.
뱅크시는 이 이미지를 시리아 내전 희생자를 위한 연대의 상징이나 영국 총선 관련 정치 캠페인 등 다양한 맥락으로 변주하기도 하였다.
2018년 10월, 2006년 제작된 액자형 <풍선과 소녀>가 런던 소더비 경매에 낙찰 직후 액자 아래 장치로 파쇄되는 퍼포먼스가 발생하였다. 이후 이 작품은 <사랑은 쓰레기통에>라는 이름을 새로 받게 되며, 예술 시장의 가치 체계와 작품의 상품화에 대한 비판으로 뱅크시의 메시지를 한 지평 더 넓혔다.
이렇듯 뱅크시의 작품은 반복적인 변주 위에, 다양한 거리 위의 프레임과 장소, 퍼포먼스 위에서 새로운 메시지를 덧입게 된다. 그의 예술은 늘 최전방에서, 거침없이 타인에게 나아가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