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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방 안에 내려앉은 안개 - 우리가 가진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 [도서]

마이라 칼만은 과일 그릇과 꽃병 사이에도 회한이 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책을 읽고 나니 익숙한 사물과 공간도 사람의 마음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by 김지현 에디터
2026.10.03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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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펼치자마자 만난 첫 장에서 한동안 머물렀다.


      회한. 깊은 후회. 수치심과 죄책감, 슬픔을 수반하는 것. 마이라 칼만은 단어의 뜻을 하나씩 적은 뒤, 정물화와 실내화에는 과일이 담긴 그릇과 꽃병, 방 안에 놓인 여러 사물들 사이로 어느 정도의 회한이 숨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몇 장을 더 넘기면 한 남자의 그림이 나온다. 톨스토이다. 그림 옆에는 고통에는 회한도 담겨 있을까 하는 물음과 함께, 톨스토이 부부의 속내까지는 알 수 없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그리고 이런 문장이 이어진다.


      인간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려고 애쓸 때면 안개가 내려앉는다.


      그림 속 톨스토이의 얼굴은 유난히 희고 창백했다. 문장을 읽고 그림을 다시 보니, 칼만이 말하는 ‘안개’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톨스토이 부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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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해져서 톨스토이 부부에 대해 조금 더 찾아봤다.


      두 사람은 1862년에 결혼했다. 톨스토이는 서른넷, 소피야는 열여덟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톨스토이는 자신이 그때까지 쓴 일기를 소피야에게 보여줬다. 그 안에는 도박 빚과 과거의 여성 관계, 영지에서 일하던 여성과의 사이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 등이 적혀 있었다.


      두 사람은 이후 48년을 함께 살았고 열세 명의 아이를 두었다. 소피야는 <전쟁과 평화>의 원고를 여러 차례 옮겨 적으며 톨스토이의 작업을 도왔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시간이 흐를수록 복잡해졌다. 톨스토이의 삶과 사상이 변하면서 재산과 저작권, 가족을 둘러싼 갈등도 깊어졌다.


      말년에 톨스토이는 집을 떠났다. 여든두 살의 나이였다. 그는 여행 도중 작은 기차역에서 병을 얻었고 결국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이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소피야도 역까지 찾아왔지만, 한동안 그가 머무는 방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녀가 곁에 갈 수 있었던 것은 톨스토이가 거의 의식을 잃은 뒤였다.


      이 이야기를 알고 다시 칼만의 그림을 봤다.


      서로를 오랫동안 사랑했고, 동시에 오랫동안 갈등했던 두 사람의 관계를 어느 한쪽의 이야기만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누가 더 잘못했는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를 이해하려고 들여다볼수록 오히려 관계는 복잡해진다.


      칼만이 말한 ‘안개’가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내 방에도 남아 있는 것들



      이 대목이 오래 기억에 남은 데에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다. 나에게도 오래 생각하게 되는 일이 있다. 떠올리면 후회가 되고, 당시의 행동을 왜 그렇게 했는지 스스로도 잘 설명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생각을 오래 하고 있으면 공간을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진다. 늘 있던 침대와 책상, 방 안의 물건들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진다. 사물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닌데, 그때의 감정이 공간에 함께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칼만이 과일 그릇과 꽃병 사이에도 회한이 숨어 있어야 한다고 쓴 문장이 이해됐다.


      사물에는 감정이 없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감정이 있다. 같은 방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공간처럼 느껴질 수 있다. 칼만은 그런 상태를 그림과 짧은 문장으로 옮겨놓고 있었다.

       

       

       

      가까운 관계가 남기는 것



      책을 읽다 보면 밝지만은 않은 이야기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흥미로웠던 것은 그중 상당수가 가족이나 가까운 관계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이었다. 톨스토이 부부의 이야기도 그렇고, 칼만 자신의 가족에 관한 기억도 그렇다.


      가까운 관계에서는 서로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많다. 함께한 시간도 길고, 기대하는 것도 많다. 그래서 멀리 있는 사람에게는 받지 않을 종류의 상처를 가까운 사람에게서 받기도 한다.


      반대로 후회 역시 그런 관계에서 더 오래 남는 것 같다. 별다른 관계가 없는 사람에게 했던 일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던 사람에게 했던 말과 행동을 더 자주 돌아보게 된다. 이 책에서 회한이 가족과 반복해서 연결되는 이유도 그 때문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우리가 가진 슬프고 아름다운 것들>은 읽는 데 오래 걸리는 책은 아니다. 글은 짧고 그림은 크게 실려 있다. 페이지를 넘기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이야기의 형식도 복잡하지 않아 한 번에 읽어 내려갈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몇몇 문장에서는 자주 멈추게 된다. 그림을 한 번 더 보게 되고, 책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기도 한다. 설명이 많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독자가 그 빈자리에 각자의 기억을 가져다 놓게 되는 책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인간이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이해하려고 애쓸 때면 안개가 내려앉는다’는 문장을 가장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사람의 행동에는 설명할 수 있는 이유도 있지만, 끝까지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후회하는 일을 오래 들여다본다고 해서 반드시 이해하게 되는 것도 아니다.

       

      칼만은 그 모호함을 굳이 걷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과일 그릇과 꽃병, 한 사람의 얼굴과 방 안의 사물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둔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내 방의 물건들을 잠시 둘러봤다.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다만 그것들을 바라보는 마음은 전과 조금 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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