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삶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 주체적 삶―스스로 자기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에 대한 의지가 바람직하다고 권고되는 요즘이건만, 우리의 삶은 여전히 나를 포함한 여럿에 의해 결정된다. 태어나는 순간조차 나의 의지가 아니고, 살아가면서 내리는 모든 결정도 온전한 내 몫이 아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오직 죽음만이 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일 텐데, 많은 이가 이마저도 스스로의 의지로 도달하는 일에 실패하므로, 우리는 평생 내가 선택하지 않은 아픔 속에서 죽을 때까지 살아간다.
파벨 포리코브스키의 영화 <이다>(2015)를 본다.
수녀가 되기 위한 서원식을 앞둔 안나(아가타 트르제부초우스카)는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이모 완다(아가타 쿠레샤)를 만나보고 오라는 권유를 받는다. 평생 수녀원에서 자라며 가족의 존재조차 모르고 살아왔던 안나에게 이모를 만나고 오라는 갑작스러운 제안은 불편하다. 지금껏 자신을 찾아온 적 없는 이모가 안나에게도 굳이 필요하지 않은 것. “꼭 그래야 하나요?” 안나의 질문은 완곡한 거절 의사의 표현이지만, 그녀의 의사는 타인의 권유에 의해 힘없이 꺾인다. 안나의 좌절된 질문으로 시작된 영화는 결국 그녀가 원한 적 없는 고요하고 어두운 여정으로 그녀를 데리고 간다.
이모 완다는 자신을 찾아온 조카 안나를 어쩐지 냉랭하게 대한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안나를 맞이한 완다는 환영의 인사나 반가운 회포도 없이 안나에게 묻는다. 내가 누구인지 너는 아냐고. 안나는 완다를 모르고, 완다 역시 안나의 모름을 모르므로, 이모와 조카 사이인 두 사람은 남이다. 혈육이지만 가족은 아닌 채로 살아왔기에 두 사람이 확실하게 공유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몸속을 흐르는 피―그들이 유대인이라는 사실뿐이다. 짧은 만남 후 시종 무심한 태도로 안나를 떠나보냈던 완다가 다시 안나를 찾아 데려올 때 짓는 표정은 미묘한데, 그 안에서 절제했던(혹은 통제했던) 애틋함과 숨겨왔던 슬픔이 동시에 묻어나오기 때문일 테다.
자신이 이다라는 이름의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또 유대인이었기에 자신의 부모와 가족들이 감당해야 했던 끔찍한 일들이 있었음을 알게 되면서, 안나는 자신의 삶의 한 부분인 이다의 삶을 찾아보기로 결심한다. 부모님이 묻힌 곳을 찾아가겠다는 안나에게 완다는 말한다. 부모의 무덤은 없다고. 유대인들은 다 그렇다고. 부모의 무덤을 찾으려는 안나의 여정은 시신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무참히 죽어갔던 유대인의 과거를 함께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적 여정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지금의 안나, 혹은 이다는 자신보다 먼저 역사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된 인물이라는 것. 수녀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를 버리고 신에게 자신의 모든 삶을 맡긴다는 의미다. 자신을 알아야 자신을 버릴 수 있으므로, 신에게 온전히 자신을 의탁하기 위해서, 이다는 자신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의 정체를 먼저 알아야 한다. 잃어버렸던 이다의 삶, 비록 그 진실이 너무 참담하고 끔찍해서 끝내 “신이 없다는 걸 알게” 되어버릴지라도.
한편 이모 완다는 안나보다 훨씬 주체적인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욕망과 능력을 모두 갖춘 여성이다. 술을 즐기고, 남자를 유혹하고, 이념과 사상에 따라 수많은 ‘인민의 적’에게 사형을 선고하며 살아온 판사였던 것. 완다는 강인한 안내자가 되어 안나를 데리고 안나의 부모가 살았던 집을 찾아간다. 안나 부모의 흔적들이 아직 남아있는 집에는 낯선 가족이 거주하고 있는데, 버젓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그들은 홀로코스트 당시 안나의 가족을 살해했던 이웃이다. 완다는 그들의 끔찍했던 행위를 추궁하고, 그날의 진실에 대해 묻는다, 아니 차라리 진실을 고백한다. 그 당시 안나의 부모가 돌보고 있던 자신의 어린 아들을 어떻게 죽였냐고. 어디에 묻었냐고.
안나가 지금껏 몰랐던 진실이자 완다가 평생 묻어둔 상처였던 과거가 드러나면서 영화는 우리에게 다시 상기시킨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나의 삶은 결코 온전한 나의 것이 아니라고. 모든 것을 절제하며 수동적으로 살아온 안나도, 그녀와 극명하게 대비되는 자유분방함으로 살아왔던 완다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 두 사람이 겪어야 했던 과거가 역사―혹은 그 속에서 태어난 끔찍한 타자―에 의한 것이었으니, 아픈 과거를 찾아 떠난 두 혈육의 자발적 여정마저도 결국 타자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가족들의 유해를 찾아 수습한 후 타자의 여행을 끝냈을 때 포옹하는 두 사람의 얼굴에 드리우는 것은 여정이 남긴 개운한 피로가 아니라 해소되지 않아 오히려 더 짙어진 슬픔이다.
수녀원으로 돌아온 안나는 서원을 포기한다. 홀로코스트 생존조차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으며, 수녀가 된 것도, 이모를 만난 것도 모두 타의에 의해서였던 그녀였으므로, 이것은 아마도 그녀가 내린 최초의 자기결정이다. 진정한 서원의 의미가 자기결정권을 포기하고 신의 결정권을 인정하는 일이라면, 이제 더는 ‘존재하지 않는(적어도 그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무심했던)’ 신에게 결정권을 맡길 수 없으니, 그녀는 신으로부터 자기결정권을 되찾아온 것. 짧지만 깊었던 여정이 안나에게 되돌려준 것이 자기결정권이었다면, 완다에게 선물한 것은 생사여탈권이다. 완다는 평생 자신을 괴롭혀왔을 끝없는 고통을 마침내 직시하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지금껏 타인의 생사를 결정해왔던 그녀가 마침내 자신의 생사까지 결정할 수 있게 된 순간 영화는 어떠한 숭고함 없이 건조하게 완다의 추락을 비춘다. 그것이 온전히 스스로를 위한 처음이자 마지막, 그러나 끝내 불가능해 허무해지는 도약이라는 듯이.
완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후 안나는 마치 그녀의 이모처럼 살아본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남자와 몸을 섞으며 이모처럼 보내는 하루, 그러나 자유분방한 듯 보였던 이모의 삶도 온전한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음을 그녀는 알게 될 것이다. 아들과 가족을 잃은 고통이 이모를 그렇게 살도록 강요했다는 것. 그러한 크고 작은 선택압 속에서 우리는 평생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래서 안나는 서둘러 떠난다. 강요된 선택은 인지하는 순간부터 숨을 막기 시작하므로, 그녀는 그래도 숨 쉴 수 있을 어딘가를 항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