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조커'의 세 가지 배신 [영화]

토드 필립스, <조커: 폴리 아 되>(2024)
글 입력 2024.11.05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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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만 한 아우 없다는 말은, 적어도 영화계에서라면, 일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훌륭한 작품의 후속작이 전작의 아성에 미치지 못하는 일이 흔하다. 동일한 감독이 거의 동일한 인물을 가지고 만들어낸 속편을 보고 난 후 우리는 자주 실망감에 빠지기도 한다. 영화 자체의 만듦새나 창작자의 날카로운 감각이 떨어진 경우도 많겠지만 그게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기존의 작품이 발산했던 거대한 아우라가 휘발된 빈자리에 그만큼 거대해진 기대감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광막한 빈자리를 분명하게 채울 수 있는 후속작의 등장은, 훌륭한 전작의 탄생만큼이나, 대단한 노력과 행운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서 속편이 실패하는 원인은 전작에 있다는 것. 전작이 남겨둔 유산들을 감당키 어려울 때 속편은 실패한다. 어쩌면 최초의 창작보다 두 번째의 재조립이 더 어렵다. 기존의 것들을 떼고 붙이며 새롭게 나아가려 노력하던 영화들은 과도한 부품들을 덧붙이면서 스스로 망가져버리곤 한다. 그래서일까. 어떤 영화의 속편은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한다. 형(전작)에게서 이어진 운명을 완전히 벗어나려고 시도하는 것. 형과의 단절, 혹은 이전에 존재하던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한 배반을 시도하는 영화들은 전작의 아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데 성공하거나, 고유한 방식으로 실패하며 추락한다.


토드 필립스의 영화, <조커>와 <조커: 폴리 아 되>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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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의 배신, 울 수 없어 추는 춤: <조커>


 

우리는 생명의 가치를 안다. 우리의 자유가 시작되고, 또 제한되는 결정적 지점이 바로 이 앎이다. 자신의 생명 아래 자신이 누릴 자유의 범위가 생겨나는 것처럼 타인의 생명은 타인의 자유 아래 두어야 한다. 따라서 타인의 생명을 빼앗는 일, 그 후에 어떤 해방감을 느끼며 춤을 추는 일은 우리의 보편적 윤리가 허용할 수 없는 범위다. 그러나 우리는 때로 자유의 경계를 넘어선 치명적인 일탈을 목격하며 전율한다. 토드 필립스의 영화 <조커>가 우리를 그렇게 만든다.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의 삶은 기구하다. 코미디언을 꿈꾸지만 그에게는 남을 웃게 만들 재주가 전혀 없으며, 본인의 웃음을 통제할 능력마저도 결여됐다. 이해하기 어려운 유머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 터지는 웃음. 웃기지 못한 채 웃고만 있는 한 남자의 삶은 우스워 보이기까지 해서, 그의 삶은 오직 가난과 멸시와 핍박의 연속일 뿐이다. 아서의 주변에는 그를 괴롭히고 멸시하는 이들 뿐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망상뿐이다. 아마도 그의 어머니 페니 플렉(프란시스 콘로이)의 그릇된 모성을 토대로 지어졌을 그 폐쇄된 정신적 공간 안에 머무를 때만 아서는 진심으로 웃는다.


우리는 아서의 정신적 공간에 ‘상상’대신 ‘망상’이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이는 그의 세계가 현실과 비현실이 위태롭게 분리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삶에서 형성된 아서의 정신은 현실과 비현실의 헐거운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간다. 그는 늘 웃지만 그의 병적인 웃음은, 분명한 웃음의 한 종류일지라도, 고통스러워 보인다. 아서의 웃음은 현실을 망상으로 바꾸거나 망상을 현실에 덧씌우는 착란의 작업이며, 동시에 현실과 망상 사이의 균형을 지키기 위한 절박한 방어 기제이기도 하다. 절망적인 현실에 놓인 그는 그 균형의 공간에서만 살아갈 수 있었을 테다. 어느 밤, 충동적 살인을 계기로 한 쪽의 경계를 무너뜨려버린 그는 더 이상 중간의 영역에 남아 웃을 수 없게 된다. 아서 플렉은 사람을 죽이고 춤을 춘다. 또는 춤을 추고 사람을 죽인다. 현실과 망상을 뒤섞어 양립할 수 없을 행동을 동시에 수행하며 그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웃음의 대가는 아름다워야 한다. 그러나 아서는 웃음을 지불하고 부조리한 대가를 얻었을 뿐이다. 그 불공정함이 아서 플렉을 현실의 부조리를 비웃는 광기의 화신이자 상징으로 만들었다. (이는 아서 플렉이 의도했던 바가 결코 아니었을 테지만.) 토드 필립스의 <조커>가 내보인 첫 번째 배신은 웃음의 배신이다. 약하지만 결코 악하지 않았던, 한 인물의 처절한 반사회화 과정은 절망적 현실과 절실한 망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낳은 산물이다. 이 과정을 목격한 우리는 살인과 광기에 대한 서정적 연민과 단순한 동조를 넘어선다. 우리는 조커가 내려간 계단의 아래층, 그 낮은 곳에서 다만 어둡고 깊어진다. 차마 함께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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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배신, 당신을 위해 노래하고 멈추는: <조커: 폴리 아 되>


 

토드 필립스가 5년 후에 다시 한 번 내놓은 아서 플렉은 어떤가. 조커라는 상징적 존재가 되어 세상에 반향을 일으켰던 아서 플렉은 어쩐지 한층 더 무기력하게 보인다. 살인 혐의로 수용소에 수감된 그에게서 조커로서의 존재감은 찾아볼 수 없다. 아서는 그의 정신적 무기력함을 마르고 굽은 자신의 육체를 통해 완벽하게, 또 충격적으로 은유한다. 교도관들의 거친 독촉에도 그는 농담을 하지 않는다. 한 차례 강렬히 피어올랐다 사위고 있는 불꽃처럼, 토드 필립스는 우선 죽음과 연명―생명이 아니라 연명인 것은 농담을 잃어버린 그의 삶에서 ‘숨을 쉬는 것’ 외의 다른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사이에 여위어버린 아서를 놓아둔다.


아서는 변호사 메리앤 스튜어트(캐서린 키너)를 면회하러 가는 길 지나가던 병동에서 리 퀸젤(레이디 가가)을 마주친다. 스쳐갈 인연이었을지도 모를 두 사람의 우연한 관계에 먼저 운명적 방아쇠를 당긴 것은 리다. 리는 조커라는 문제적 인물을 향해 품었던 자신의 존경심을,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고백한다. 광기 어린 대중적 관심이 아닌 한 개인의 진정한 사랑. 아서에게 리의 사랑은 평생 겪어본 적 없는 압도적 충격으로 다가온다. 리를 만나면서 아서는 노래를, 춤을, 농담을 되찾는다. 리의 노래 위에 아서의 노래가, 더 정확히는 조커의 노래가 어우러진다. 둘의 사랑은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망상의 세계 속에서 춤추고 공명한다.


리 퀸젤은 조커를 사랑한다. 아서 플렉은 리 퀸젤을 사랑하기 위해서 다시 조커가 되어야 한다. 아서의 감방을 찾아온 리와의 섹스는 아서의 내면에 잠들어있는 조커를 깨우는 제의처럼 보인다. 아서의 얼굴에 조커의 분장을 덧씌운 후 치러지는 이 의식에는 분명 위험이 뒤따를 텐데, 아서가 사형 선고를 피하기 위해서는 아서와 조커를 별개의 인격으로 분리한 후 조커의 존재를 지워내야 하는 것. 아서가 살기 위해서 조커는 죽어야 한다. 그러나 리 퀸젤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아서가 죽어야 한다. 법원과 수용소, 조커로서의 일탈과 아서로서의 감금을 왕복하는 호송차 안 아서 플렉의 얼굴 위에는 분장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슬픔이 드리운다.


정확하고 냉정한 법률은 두 인격의 공생을 허락하지 않는다. 차가운 법정 앞에서 아서 플렉은 결단해야 한다. 조커를 부정하여 무기력한 목숨을 연명할 것인가, 조커를 긍정하며 무기력으로부터 살아날(혹은 사랑할) 것인가. 수용소에서 교도관들에게 가혹행위를 당한 후 무의미한 죽음을 목격한 아서는 결단한다. 삶이 없다면 사랑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사랑을 위하여 조커가 되었던 것처럼, 아서는 살아서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다시 아서 플렉으로 돌아간다. 반사회화 되었던 아서의 재사회화, 그것은 사랑이 휘두르는 우습지 않은 농담이다. 


법정 최후 변론에서 아서는 리를 위해 조커를 부정하고, 리는 조커를 부정하는 아서를 부정하며 그의 곁을 떠난다. 아서를 떠나려는 리는 여전히 노래를 부르지만, 아서는 이제 노래를 멈추고 대화하길 원한다. 토드 필립스는 이 장면을 통해 이번 영화가 뮤지컬이라는 장르적 형식을 사용해야만 했던 이유를 밝히는 것처럼 보인다. 리 퀸젤은 오직 노래하고 춤추고 농담하는 존재(조커)를 원했으므로 노래와 춤의 세계에서만 소통했다는 것. 무기력한 언어적 존재인 아서와의 진실한 소통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으며, 그럴 의지 또한 없었다는 것. 노랫말은, 아무리 아름다울지라도, 결국 누군가에게서 빌려온 고정된 문장일 뿐이다. 노래는 언어의 고유성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끝내 조커―노래를 부정하는 아서―언어의 선택은 당연하게 주어진 존재론적 위계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리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노래로만 전할 수 있는 사랑은 공허하다. 이것은 <조커> 시리즈가 관객에게 선사하는 두 번째 배신이다. 사랑에서 이별로 향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마음의 배신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과 그 소통의 방식 자체에 대한 근원적 배신. 음율과 언어는 가깝지만 아득히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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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배신


 

두 편의 <조커> 시리즈를 통해 관객은 두 번의 충분한 배신을 당한다. 희망의 장치라고 믿었던 웃음의 배신과, 희망의 씨앗이라고 믿었던 사랑의 배신. 연이은 배신에 몸과 마음이 아찔해지며 상영관을 나서기 전에, 그러나, 토드 필립스는 마지막으로 우리를 배신한다. 조커를 부정하고 사랑하는 리 퀸젤이 떠난 후 아서는 다시 무기력해진다. 그런 아서 플렉을 뒤따라온 죄수 한 사람이 아서를 향해 ‘최후의’ 농담을 던진다. 아서는 쓰러지고, 영화는(아마도 영화의 시리즈는) 허무하게 끝난다.


전작 <조커>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성공했지만 후속작 <조커: 폴리 아 되>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후속작에 쏟아지는 혹평은 영화의 만듦새에 대한 의문(예컨대 뮤지컬이라는 형식)뿐 아니라 관객이 느끼는 배신감의 정서와 맞닿아있다. 토드 필립스는 피 흘리며 쓰러진 아서의 비참한 육체를 통해 말한다. ‘이것은 너희가 알고 있는 조커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야’, ‘아서 플렉은 사실 너희의 조커가 아니야.’ 요컨대 토드 필립스의 <조커> 시리즈는 시리즈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농담이었던 것. 조커를 보기 위해 모였다가, 조커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큰 배신감을 느낀 우리의 당혹스러운 반응도 당연하다. 우리는 리처럼 아서로부터 무언가를 기대했고, 그래서 아서를 마음대로 우리의 상상 속으로 끌어당긴 후, 리처럼 그를 가차없이 쏘고 말았다. 조커를 죽여 아서를 살리거나, 아서를 죽여 조커를 남기기 위해. 


배신은 언제나 놀라움과 실망감의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영화에 대해 첨예하게 갈린 평가는 배신당한 우리의 널뛰는 감정 사이에 있다. 토드 필립스의 <조커> 시리즈에는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조커, 광기에 사로잡혀 농담처럼 끔찍한 악행을 저지르는 조커는 없다. 조커는 그냥 죽을 것이다. 치밀하고 무자비한 범죄를 저지르지도 못하고, 영웅 배트맨의 평생의 숙적이 되어 치열하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할리 퀸과의 미친 사랑을 마치지 못한 채, 끝내 쓸쓸하고 허무하게, 사랑 없이. 아서와 리 퀸젤의 섹스, 그 단 한 번의 제의를 통해 리의 뱃속에 무언가 잉태된다. 그것이 아서의 삶에 미련의 감정을 남긴 거룩한 사랑의 씨앗인지, 언젠가 진짜 악당 조커로 자라날 악의 씨앗인지, 혹은 그저 리 퀸젤이 내뱉은 하나의 ‘농담’일 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아는 것은, 적어도 토드 필립스의 조커는, 아니 아서 플렉은, 이제 농담처럼 죽었다는 것. 똑똑.

 

 

 

컬처리스트 명함.jpg

 

 

[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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