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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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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표 창작 뮤지컬 <팬레터>가 서울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다섯 번째 시즌으로 10주년 기념 공연의 막을 올렸다. 뮤지컬 <팬레터>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 경성을 배경으로 김유정과 이상 등 당대 문인들의 모임 ‘구인회’의 일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창작된 팩션 뮤지컬이다. 문학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가진 천재 소설가 김해진과 그를 동경하는 작가 지망생 정세훈, 그리고 김해진의 뮤즈이자 비밀에 싸인 작가 히카루의 이야기를 통해 문인들의 예술혼과 사랑을 매혹적으로 그려낸다.

 

 

 

한 명의 인물, 두 명의 배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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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배우가 썼던 가면에서 유래된 개념인 페르소나는 개인이 사회적 요구에 맞춰 외부로 드러내는 외적 인격이나 가면을 의미한다. 심리학과 사회학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널리 퍼진 페르소나라는 개념의 기원이 연극이라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는 연극 속 배우가 배역과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는 와중에도 해당 배역에 온전히 몰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자아가 활성화된다는 것은 외부 환경 및 구조에 의하여 ‘진정한 나’가 사라지는 경험일 수도 있지만, 자아를 확립해 가는 과정 혹은 ‘진정한 나’를 보존하는 하나의 방식이 되기도 하다.

 

문학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다. 세계라는 다중적 층위를 일개 개인이 창조할 수 있는 일이다. 문학 쓰기란 창조자 개인을 투영시키는 일인 동시에 전혀 다른 개인이 되는 일이다. 우리가 흔히 문인이라 부르는 자들이 필명을 으레 사용하는 것이 우연은 아닐 것이다. 뮤지컬 <팬레터>의 모티브가 된 김유정이 사용하던 대표적인 필명이 히카루였던 점, 또한 작가 이상의 본명은 김해경이라는 점을 떠올릴 수 있다. 뮤지컬 <팬레터>는 상상을 보태어 글 쓰는 사람의 또 다른 자아를 구체적인 인물로 구현해낸다.

 

마음은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아서, 그것이 나의 것이더라도 제대로 알아차리기 어렵다. 뮤지컬 <팬레터>에서 김해진은 실제 김유정이 그러했던 것처럼 중증의 폐결핵을 앓고 있다. 건강이 쇠락해 가는 가운데에도 김해진은 부지런히 글을 쓴다. 히카루가 작가 김유정의 필명이었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뮤지컬은 작가 지망생 정세훈을 새롭게 만들어냈다. 그리고 히카루를 세훈이 해진에게 작성한 편지의 수신인으로 위치시켰다.

 

히카루라는 인물이 보내온 편지는 김해진에게 큰 위안이 된다. 위안이 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해진은 히카루를 깊이 사랑하게 되며 몸이 안 좋아질수록 히카루에게 정서적으로 의존한다. 해진이 히카루에 깊이 의존하게 될수록 세훈은 내적 갈등을 겪는다. 처음부터 세훈에게 해진을 기만할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히카루의 이름으로 해진에게 보내는 편지와 글이 늘어갈수록 가상의 인물이었던 히카루는 하나의 인격체가 되어 세훈의 통제 범위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인다.

 

뮤지컬 <팬레터>는 가상의 인물인 히카루를 실제 배우, 그러니까 사람으로 등장시킨다. 뮤지컬 초반, 히카루는 글 속에만 존재했다. 히카루의 존재는 점차 부피가 커져 세훈의 그림자가 되었다가 극 중반부터는 한 명의 사람으로 온전히 등장하기에 이른다. 부피가 커진 히카루는 더 이상 쓰이는 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세훈은 히카루와 골방에서 논쟁하며, 해진에게 보낼 편지와 글 역시 히카루가 직접 작성한다. ‘내 안에 내가 너무 많다’라는 일종의 은유를 뮤지컬은 한 인물을 두 개의 배역으로 나누는 방식으로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림자, 거울, 골방 등을 활용하여 두 배우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방식은 공연예술이기에 보여줄 수 있는 표현이었다.

 

 

 

영감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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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한 예술가의 작품을 보았을 때 우리는 그 세계의 기원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다. 그리고 영감의 원천은 ‘뮤즈’라는 개념으로 요약되곤 한다. 뮤지컬 <팬레터>에도 뮤즈에 관한 넘버가 존재한다.

 

뮤즈 달콤하고 뮤즈 잔인해

생명을 빼앗아 가는 그들은 잔인한 천사

그러나 누가 그들을 감히 거부하겠는가

(...)

하룻밤 소설을 쓰게 해 알 수 없는 시를 쓰게 해

다음날 보고 깜짝 놀라지

수많은 예술가의 비밀의 연인

 

넘버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뮤즈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하지만, 동시에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잔인한 존재이다. 뮤즈의 존재는 논리적으로 혹은 인과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초자연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뮤즈가 있는 예술가들이 남성이며 그들이 뮤즈로 호명된 상대가 그들의 여성 애인 혹은 아내라는 점은 뮤즈라는 개념에 고민을 남긴다. 여성을 예술적 동료가 아닌 선망의 대상으로 그 이미지만을 남겨 대상화하는 것이라는 비판 지점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다른 개인에게 오로지 영감의 원천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 대등한 관계 맺기라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해진의 마음속 히카루는 전형적인 뮤즈 개념에 들어맞는 인물이다. 그러나 뮤지컬 <팬레터>에서는 작품의 의도와 별개로 뮤즈 개념에 대한 비틀기가 발생했다. 첫째, 전형적인 뮤즈인 히카루는 사실 해진, 작가 김유정 본인이었다. 둘째, 세훈은 결국 히카루가 본인임을 밝히며 자기 손을 찌름으로써 뮤즈인 히카루의 존재를 소멸시켰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유수의 문학 작품을 써 내려간 것은 결국 진정한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혹은 자유롭게 하려고 여러 층위의 ‘나’를 쌓아내지만 결국 그 속에서도 나를 잃지 않는 것만이 예술에 닿을 수 있는 시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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