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를 목욕시키는 여자』는 미스터리의 문법을 따르지만, 읽고 나면 사건보다 사람이 더 오래 남는다. 단서가 맞물리고, 감춰진 일이 드러나고, 후반부에 이르러 사건의 윤곽이 잡히기는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속이 시원하지 않다. 무엇이 있었는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밍런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쉽게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질문은 “누가 그랬는가”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에 가깝다. 하지만 소설은 그 “왜”조차 말끔하게 내놓지 않는다. 밍런의 동기는 사건을 따라가는 열쇠이지만, 그 열쇠 하나로 밍런이라는 사람 전체가 열리지는 않는다. 사건은 어느 정도 설명된다. 사람은 끝내 설명에서 조금 비껴난다. 이 작품의 불편함은 거기서 온다.
밍런은 악인이라는 말만으로는 너무 쉽게 정리되는 인물이다. 그는 분명 타인을 상처 입혔고, 그의 선택은 파국을 불러왔다. 그렇다고 그의 이상함 자체를 곧바로 죄로 몰아붙이는 순간, 이 인물은 너무 빨리 닫혀 버린다. 그는 가족을 가족답게 사랑하지 못하고, 여자를 여자답게 사랑하지 못하며, 사물을 사물답게 대하지 못한다. 감정이 없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감정을 놓아야 할 자리를 계속 틀리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밍런을 보며 『이방인』의 뫼르소를 떠올렸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사회가 기대하는 방식으로 슬퍼하지 않는다. 죄를 지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슬퍼해야 할 때 슬퍼하지 않고 반성해야 할 때 반성의 문법을 제출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의미의 법정에 선다. 밍런도 비슷하다. 가족, 사랑, 욕망, 애도 앞에서 그는 사회가 알아볼 수 있는 방식의 의미를 내놓지 못한다. 다만 그 어긋남 자체가 곧 속죄와 처벌의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동기를 파헤치는 미스터리이면서, 동시에 동기를 파악하고 싶어 하는 마음을 의심하게 만든다. 우리는 누군가의 동기를 알고 싶어 한다. 그래야 사건을 이해할 수 있고, 인간을 판단할 수 있고, 때로는 그를 고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한 사람의 동기를 안다는 일은 생각보다 위험하다. 몇 개의 원인을 찾아 그 사람에게 걸어 주는 순간, 우리는 그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설명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소설은 밍런을 짐작할 만한 단서들을 곳곳에 둔다. 집안의 말하지 못한 비극, 형제의 죽음, 밍런에게 보이는 강박적인 면들. 그러나 그것들을 모아도 밍런이라는 사람이 완성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동기 몇 개를 엮어 만든 목걸이 같은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 목걸이를 걸어 주고 싶어 하는 쪽은 언제나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죽은 사람은 설명되지 않고, 산 사람은 설명하고 싶어 한다.
이때 정팡의 위치가 중요해진다. 정팡은 이 소설에서 독자와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결혼생활 속에서 자신을 조금씩 잃어버린 여자, 경력단절 이후 가정주부로 살아온 여자, 남편의 세계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던 여자. 밍런의 기괴함이 더 선명해지는 것도 정팡이라는 비교적 평범한 감각이 곁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팡이 밍런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밍런의 세계에 더 깊이 들어간 사람은 안커다. 안커는 그의 작업실 안으로 들어갔고, 그가 무엇에 끌리는지, 어떤 방식으로 욕망하는지 정팡보다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안커 자신도 그 사실을 알고 있고, 정팡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녀를 사건 조사에 끌어들인다. 그런데 밍런이 죽은 뒤 마지막까지 남겨진 것들을 처리하는 사람은 결국 정팡이다. 그렇다고 밍런이 정팡을 안커보다 더 사랑했다는 뜻은 아니다.
정팡은 밍런에게 가장 깊이 닿은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남겨진 사람이다. 아이들에게 밍런은 이미 사실상 없는 아버지에 가깝다. 소설 초반 샤오위가 자기와 여동생, 엄마의 달걀만 챙기는 장면은 그 사실을 조용히 보여준다. 가족은 네 명이지만, 아이들의 생활 감각 속에서 아버지는 이미 빠져 있다. 밍런은 가족 안에 있지만 가족의 감각 안에는 없다. 안커는 밍런을 사랑했지만 밍런의 리얼돌의 장례식에는 오지 않는다. 반면 정팡에게 밍런은 그렇게 간단히 지워지지 않는다. 정팡만이 그 부재의 무게를 계속 느낀다.
이 소설의 제목에 놓인 ‘코끼리’는 그래서 단순히 가족의 무게만을 뜻하지 않는다. 가까운 관계 안에서도 끝내 설명되지 않는 부분, 서로가 알면서도 모른 척하거나 말하지 못한 채 안고 살아가는 거대한 덩어리. 가족이든 연인이든 친구든, 어떤 관계에는 늘 그런 코끼리가 있다. 사랑한다고 해서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오래 함께 살았다고 해서 상대가 투명해지는 것도 아니다. 밍런은 바로 그 코끼리를 견디지 못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가 한눈에 매혹당한 여자에게 직접 다가가지 않고, 그녀를 닮은 비싼 리얼돌을 사서 창고에 들이는 장면은 이 인물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살아 있는 사람은 예측할 수 없고, 요구하고, 응답하고, 거절하고, 떠날 수 있다. 반면 리얼돌은 그 모든 일을 하지 않는다. 밍런은 사랑을 원하지 않은 사람이라기보다, 살아 있는 타자의 복잡성을 감당하지 못한 사람에 가까워 보인다. 그는 관계를 원했지만, 관계가 요구하는 불확실성은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작품 속 애완동물의 이미지도 이상하게 걸린다. 밍런에게 리얼돌은 애완동물처럼 소유되고 관리되는 대상이다. 하지만 실제로 소설에 등장하는 허스키 ‘포기’들은 그렇게 얌전히 머무르지 않는다. 그들은 주인을 끌고, 구한다. 살아 있는 동물은 인간의 소유물처럼 보이지만, 완전히 통제되지 않는다. 때로는 인간의 방향을 바꾸고, 인간을 움직인다. 이 대비는 밍런의 관계가 얼마나 비어 있는지를 드러낸다. 그는 돌봄의 형식은 원했지만, 타자의 응답은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은 살아 있는 여자도, 살아 있는 동물도 아닌 인형이었다.
반면 정팡은 타자의 이해 불가능함을 완전히 소화하지는 못해도, 그것을 닦아줄 수 있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녀는 늙은 회장의 개 ‘포기’를 떠맡고, 밍런의 애완동물처럼 남겨진 리얼돌의 처리까지 맡는다. 그녀에게 반복적으로 주어지는 것은 사랑받는 사람의 권리라기보다, 남겨진 것을 수습하는 역할이다.
하지만 정팡을 단순히 불쌍한 사람으로 보고 싶지는 않다. 그녀에게는 분명 제한된 조건이 있었다. 경력단절 여성이자 가정주부였던 정팡은 안커처럼 밍런의 욕망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남겨진 것을 떠안는 일 말고는 선택지가 많지 않은 사람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완전히 떠밀리기만 한 것은 아니다. 정팡은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에게 밀려온 것을 어떤 태도로 대할지는 선택했다.
그 선택은 거창한 구원이나 용서가 아니다. 정팡은 밍런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내면을 사랑으로 구원하지도 못한다. 다만 그가 남긴 기괴한 잔여를 더럽다고 외면하지 않는다. 목욕시키는 일은 이해하는 일이 아니다. 더러움의 이유를 해명하는 일도 아니다. 물을 묻히고, 손을 대고, 표면을 닦는 일이다. 정팡이 밍런에게 해 주는 일도 그와 닮아 있다. 그녀는 밍런의 코끼리를 완전히 이해한 사람이 아니라, 그 코끼리를 보고도 물러서지 않은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팡은 밍런의 마지막 사랑이라기보다 마지막 손에 가깝다. 밍런이 마지막으로 빌린 것은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정팡의 손이었다. 정팡은 그를 이해했기 때문에 마지막에 호출된 것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음에도 그가 남긴 것을 닦아줄 수 있었기 때문에 호출된다. 이것은 낭만적인 친밀성이 아니다. 오히려 사후적이고 실무적인 친밀성이다. 장례, 유품, 비밀, 리얼돌, 안커와의 화해, 남겨진 감정의 찌꺼기들이 모두 정팡의 손을 거친다.
그렇다고 해서 정팡의 역할을 희생이나 착취로만 읽는 것도 부족하다. 그녀는 자기에게 떠밀려온 것들을 아름답게 포장하지도 않고, 완전히 거부하지도 않는다. 다만 눈앞에 남겨진 것을 닦는다. 그 행위는 그녀가 처한 조건에서 나온 것이지만, 동시에 그 조건 안에서 가능한 가장 단단한 태도이기도 하다. 정팡의 특별함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데 있지 않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없는 채로 두면서도, 그것을 방치하지 않는 데 있다.
안커를 끌어안는 장면도 그래서 단순한 용서로만 보이지 않는다. 정팡은 안커를 남편을 빼앗은 여자로만 보지 않는다. 밍런이라는 코끼리에게 함께 휘말린 또 다른 사람으로 본다. 그 장면에서 정팡은 누군가를 심판하기보다, 함께 남겨진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다. 이 여자의 강함은 바로 거기에 있다. 크고 아름다운 의미를 만들지 않고도, 눈앞의 난처한 것을 피하지 않는 힘.
결국 『코끼리를 목욕시키는 여자』는 기괴한 남자의 동기를 해명하는 미스터리이면서, 그 동기를 끝내 다 이해할 수 없음을 견디는 이야기다. 밍런은 코끼리에게 짓눌려 파멸한 사람이고, 정팡은 그 코끼리의 존재를 감지한 뒤 마지막 손이 되어준 사람이다. 이 작품의 제목이 가리키는 ‘여자’는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타자가 남긴 것을 보고도 물러서지 않고, 그것을 닦아내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이 남기는 질문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에서 멈추지 않는다. 더 오래 남는 질문은 따로 있다. 끝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남긴 것을, 우리는 어떻게 대할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