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a world out there with millions of wind chimes.”
세상은 바람이 만들어내는 수백만 개의 선율로 가득해.
아침저녁으로 차가운 바람이 피부에 닿는다. 이제 정말 가을이 찾아왔구나 짐짓 실감한다. 적당히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는 날이면 어릴 적 좋아했던 영화 <어거스트 러쉬>의 대사가 떠오른다. 세상은 바람이 만들어내는 수백만 개의 선율로 가득하다는 말. 바람을 맞으며 그 안에 소리를 그리다 보면 어느새 조금 센치해진 나를 발견하곤 한다.
“우리는 모두 팍팍한 현실을 살고 있다. 그 와중에도 몇몇은 별빛을 바라볼 줄 안다.”
시인 오스카 와일드의 이 문장을 마음 한편에 머금고 또 하루를 살아간다. 팍팍한 현실 속에서도 나에게 가끔 별빛 같은 음악이 있다. 그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보내다 보면 자연스레 콧노래를 부른다.
1. I’ve never been in love before – Chet Baker
I've never been in love before
난 한 번도 사랑에 빠진 적이 없어
Now all at once it's you
이제 단번에 너야
It's you for evermore
영원히 너야
쳇베이커의 전기를 집필한 제임스 개빈은 그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악마가 부르는 천사의 노래”
나의 뮤즈이자, 나의 위로. 쳇 베이커의 음악이다. 영화 <본 투 비 블루> 엔딩에서 쳇 베이커가 사랑했던 제인을 떠나보내며 ‘I’ve never been in love before‘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가 바라보는 제인과 느끼는 사랑의 깊이가 고스란히 담긴 이 곡은 내가 평생 아껴 듣고 싶은 곡이다.
대체될 수 없는 그만의 목소리와 아름다운 트럼펫 선율. 속삭이는 듯한 그의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나는 조금 의연해진다.
나는 의연함을 좋아한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모든 짐을 견뎌내는 사람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의연함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복잡한 날에는 복잡한 얼굴로 살고, 눈물이 날 때는 눈물도 흘리면서, 그래도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하나씩 해내는 것. 그 정도면 충분히 의연하게 살아가는 것 아닐까.
대단해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데도 꽤 단단한 사람. 크게 마음먹은 티조차 내지 않으면서 자기 앞에 놓인 하루를 살아내는 사람. 애써 괜찮은 척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품은 채 표현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도 조금 힘을 뺀다. 그런 점에서 나는 쳇 베이커의 음악을 사랑한다.
2. It had to be you – Harry Connick Jr.
It had to be you
당신이어야 했어요
I wandered around
끊임없이 헤매고 다녔지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맘껏 늘어지고 싶어지는 노래.
가장 좋아하는 작가 노라 에프런의 대표작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OST다. 뉴욕을 배경으로 한 영화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우정과 사랑에 대한 해리와 샐리의 애틋한 이야기는 아름다운 재즈와 함께 영화의 완성도를 높인다.
해리와 샐리가 센트럴파크를 함께 걷는 이 장면은 단풍으로 물든 거리와 두 사람의 모습만으로도 가을을 온전히 품고 있다. 울긋불긋 물든 가을길을 따라 해리 코닉 주니어가 연주하는 'Autumn in New York'이 흐른다. 그런데도 가을을 생각하면 가장 떠오르는 노래는 'It had to be you'다.
'Autumn in New York'처럼 특별히 가을을 노래하는 곡은 아니지만,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선선한 바람이 부는 뉴욕의 거리가 떠오른다. 조금 느긋하고, 어딘가 낭만적인 기분. 그래서인지 가을이 오면 자연스럽게 이 노래를 찾게 된다. 언젠가 붉게 물든 센트럴파크를 걸으며 이 노래를 듣는 날을 고대한다.
가을은 재즈의 계절이 맞나 보다. 낭만으로 물드는 계절에 애정하는 영화와 별빛 같은 음악이 함께라면, 퍽퍽한 현실도 조금은 빛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