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계기는, 『내 어머니는 컴퓨터였다』를 소개하는 글에서 ‘컴퓨터 언어’와 ‘패치워크 걸’이라는 두 단어가 연달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일상 속에서 나는 종종 GPT를 사용하는데, 내가 컴퓨터 언어에 대해 갖고 있던 인상은 정확히 ‘패치워크 걸’에 가까웠다.
프랑켄슈타인이 이질적인 신체 부위를 이어붙여 생명을 창조하듯, 생성형 인공지능은 본질적으로 방대한 낱말들 사이의 ‘거리’를 계산해 조합한다. 단어 간의 거리에 따라 문장이 생성되기 때문에, 인공지능은 사고하지 않는다. 내가 프롬프트를 입력하면, GPT는 순식간에 계산을 수행해 결과를 출력한다. 비전공자인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모델과 알고리즘이 그 과정에 관여하겠지만, 생성형 인공지능은 매 순간 프랑켄슈타인처럼 조립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이 책에 기대했던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끝없이 재조립되는 인공지능에 대한 인간의 경험을 설명하는 새로운 서술. 둘째, 신체를 가진 존재처럼 생생하게 상호작용하는 기계와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분석.
『내 어머니는 컴퓨터였다』라는 도발적인 제목은 이 기대를 더욱 자극했다. 이 문장은 여러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겠지만, 나에게는 인간의 정신적 안정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는 판타지처럼 읽혔다. 우리는 집중된 정신 에너지를 실제 대상이 아닌 대체 대상을 통해 방출하는 정신적 작용을 통해 정신적 안정을 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에게 털어놓는 대신, 어머니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도구를 사용한다. 실제로 GPT는 이미 심리상담자나 친밀한 타인의 역할을 대체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나는 곧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책은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에 출간된 데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생성형 인공지능을 다루는 현대적 접근보다는 훨씬 학술적인 논의를 펼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나의 질문 이상으로 깊은 통찰을 제공했다. 당시 컴퓨터 기술은 오늘날처럼 고도화되지 않았지만, 이 책은 거의 예언서처럼 오늘의 현상을 정확히 조망하고 있었다.
2. 인간-기계-텍스트의 삼중적 재편
헤일스의 논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부에서 제시된 핵심 개념, ‘상호매개성’과 ‘피드백 루프’를 숙지해야 한다.
‘상호매개’란 디지털 기술이 기존 인쇄문화나 언어체계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침투하고 변형하며 공진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헤일스는 “새로운 기술은 이전 기술을 파괴하거나 흡수한다”는 기술 담론을 비판하고, 말·텍스트·코드 간 상호번역과 전환 가능성에 주목한다.
이 전환의 중심에는 ‘기호’에서 ‘코드’로의 이행이 있다. 데리다의 해체 이론과 연결되는 이 전환은, 의미가 항상 지연되고 유예되며,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불안정하다는 점에서 출발한다. 기존 인쇄문화는 선형성과 인과성을 중시했다면, 디지털 코드는 비선형적이고 동시적이며 수행 중심적이다.
코드는 해석을 기다리지 않는다. 모호성도 없다. 기호는 문맥 속 해석을 요청하지만, 코드는 실행을 요구한다. 이로써 인간은 해석자가 아닌 참여자이자 작동자로 위치하게 된다. 헤일스는 이 전환이 인간 주체성의 인식 구조에도 변화를 가져온다고 본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개념 ‘피드백 루프’는 인간이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속적으로 재조정되는 존재임을 설명한다. 인간은 고정된 자아가 아니라, 정보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사이버네틱스적 존재다. 계산적 등가성 원칙은 인간과 기계의 연산적 유사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다. 헤일스의 논지는 데리다의 로고중심주의 해체를 계승하면서도, 텍스트 개념을 정보·코드·신체 기반의 ‘혼성적 텍스트’로 확장해야한다는 것이다.
3. 전자텍스트 비평과 문학의 새로운 위치
전자 텍스트 비평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입장에서 이 부분을 흥미롭게 읽은 부분으로는 올세트와 맥건을 비판한 부분이 있다. 헤일스는 책에서 디지털 텍스트에 대한 기존 연구자인 에스펜 올세트와 제롬 맥건의 입장을 검토한다.
맥건은 인쇄 문학의 해석학적 전통을 중시하며 디지털을 보완적 도구로 본다. 디지털 기술은 전통적 인쇄 문학의 보완수단이며, 텍스트의 역사적, 물질적 특성을 두드러낼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여전히 의미, 역사성, 주제, 독자 반응 등 여전히 텍스트 해석에 중심을 둔 인문학적 독해를 강조했다.
이와 반대편에 있는 올세트는 디지털 텍스트를 구조적 시스템으로 분석하며 문학과의 단절을 주장한다. '에르고딕 문학'을 제시하면서, 독자가 물리적 행동(클릭, 스크롤, 탐색 등)을 통해 내용을 구성하는 텍스트가 선형적 인쇄 텍스트와 다르다고 분석했다. 올세트는 이러한 디지털 텍스트를 전통학적 해석학이나 주제 중심 독해에서 벗어난 구조적, 기술적 분석을 주장했다.
헤일스는 디지털 시대의 문학을 논하면서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모두 비판한다. 맥건 같은 문학 중심주의자들은 문학적 기호와 해석을 최상위에 두며 디지털 텍스트를 하위장르로 간주한다. 헤일스는 이런 시각이 현실의 텍스트 환경 변화를 무시하고 있다고 본다.
반대로, 올세트는 텍스트를 독자의 ‘선택’과 ‘작동’으로 정의하며, 디지털 텍스트를 인터랙티브한 게임처럼 파악한다. 하지만 헤일스는 이 역시 문제라고 본다. 왜냐하면 텍스트를 코드의 구조와 수행성으로 환원할 뿐, 그 의미적 층위나 역사성, 해석의 층위를 제거해버리기 때문이다. 즉, 헤일스는 기호 중심주의와 코드 환원주의 모두를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혼성텍스트’의 이론을 제안한다.
4. 나가며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은 헤일스가 문학작품을 분석에 적극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2부에서는 『전신 창구 안에서』, 『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 『플러그에 연결된 소녀』의 세 픽션을 통해 정보가 인간의 신체, 정체성, 존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색한다.
헤일스에게 문학은 단지 해석 대상이 아니라, 정보화 시대의 인간 존재를 실험할 수 있는 장치다. 문학 인용은 개념을 추상에 가두지 않고, 구체적인 이미지와 감각으로 독자의 사유를 유도한다.
이처럼 『내 어머니는 컴퓨터였다』는 생성형 AI, 디지털 사회, 인간-기계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데 통찰을 제공한다. 코드, 해석, 수행, 기호의 긴장과 결합을 다룬 이 책은 단지 과거를 설명하는 이론서가 아니라, 오늘을 꿰뚫고 미래를 상상하게 하는 예언서와도 같다.
물론, 이 책은 데리다, 소쉬르, 윌터 옹 등 포스트구조주의와 매체철학의 지식이 없다면 난해한 독해를 요구한다. 하지만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문화이론, 미디어 인문학, 디지털 문해력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새로운 사유의 통로를 열어준다. 나 역시 헤일스의 유연하고 개방적인 태도에서 깊은 인문학적 감응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