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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inion] 이타카까지 경로를 재탐색합니다. [영화]

우리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오디세이>

by 오수민 에디터
2026.08.10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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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영화 <오디세이>에 대한

전반적인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길을 잃기가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휴대전화만 있다면 처음 가는 도시에서도 가장 빠른 귀갓길을 찾을 수 있고, 지구 반대편에서도 지금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몇 초 만에 확인할 수 있다. 인간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정확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삶은 여전히 돌아가지 못하는 순간이 생긴다.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거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거나, 떠날 때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을 때다. 그런 순간 우리가 묻게 되는 것은 ‘집이 어디인가’가 아니다. 나는 아직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인가.


약 2,700년 전 쓰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가 2026년에도 유효한 것은 어쩌면 이 질문 때문일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서양 문학에서 가장 오래된 귀향담 가운데 하나를 가져와 괴물과 신의 모험담이 아닌, 전쟁을 끝내고도 전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한 남자의 이야기로 바꾼다. 실제로 놀란은 원전의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신화적 요소보다 전쟁과 죄책감, 기억과 트라우마를 전면에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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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오디세우스에게 남은 일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가 기다리는 이타카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지만, 그의 귀향에는 다시 10년이 걸린다. 키클롭스와 세이렌, 죽은 자들을 차례로 마주하는 동안 부하들은 하나둘 사라지고, 그 사이 이타카에서는 죽은 것으로 여겨지는 오디세우스를 대신해 왕좌와 페넬로페를 차지하려는 구혼자들이 궁전을 점령한다.


이야기만 놓고 보면 영웅이 수많은 시련을 극복하고 가족에게 돌아오는 전형적인 모험담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의 관심은 오디세우스가 ‘어떻게 돌아오는가’보다 ‘왜 돌아오지 못하는가’에 있다. 그리고 그 답은 영화의 시작점인 트로이에 있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목마를 고안해 10년 동안 함락시키지 못했던 도시를 무너뜨린 영웅이다. 그러나 그 유명한 지략을 승리의 상징이 아닌, 오디세우스가 평생 짊어져야 할 일종의 원죄로 뒤집는다.


그 중심에는 영화에서 반복되는 ‘제우스의 법’이 있다. 고대 그리스의 ‘크세니아(xenia)’, 즉 낯선 손님을 환대하고 손님 역시 주인을 존중해야 한다는 관습이다. 바다를 건너 낯선 땅에 도착하면 타인의 호의에 생존을 맡겨야 했던 시대에 환대는 단순한 예절이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규칙이었다. 영화는 이를 ‘내가 대접받고 싶은 방식으로 타인을 대하라’는 간명한 원칙으로 번역한다.


그래서 트로이 목마는 단순한 군사 전략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선물의 형태를 한 무기를 건네고,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신뢰를 이용해 도시를 파괴했다. 영웅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 동시에 그의 가장 커다란 잘못이 된다.


이는 놀란의 전작 <오펜하이머>를 떠올리게 한다. 오펜하이머 역시 자신의 지성을 이용해 불가능했던 무기를 만들어냈고, 자신이 만든 것이 세상에 어떤 가능성을 열어버렸는지를 뒤늦게 바라본다. 놀란 역시 두 인물의 연결을 의식했다고 밝혔다. “할 수 있다고 해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질문이 <오펜하이머>에서 <오디세이>로 이어진 셈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오펜하이머에게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세계가 남았다면, 오디세우스에게는 아직 돌아가야 할 집이 남아 있다. 그래서 <오디세이>에서 바다는 오디세우스와 집 사이에 놓인 죄책감의 크기에 가깝다.

 

 


이타카, 닿지 않는 고향


  

그래서 오디세우스는 귀향을 욕망하는 동시에 두려워했던 것처럼 보인다. 물론 신들의 방해가 있었고,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시간을 운명의 탓으로 돌리기에는 그 역시 자꾸만 귀향에서 멀어지는 선택을 한다.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면서 호기심 때문에 위험에 빠지며,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희생한다.


무엇보다 이상한 것은 7년 동안 기억을 잃고 머물렀던 곳에서다. 칼립소가 준 로터스 꽃은 가족을 잊고 마음을 평온한 상태로 만든다. 그곳에서 행복하다고 말한 그는 어쩌면 그때만큼은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잊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을 잃었던 동안 그는 트로이를 무너뜨린 영웅도, 수많은 죽음을 짊어진 사람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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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정말 돌아가고 싶었던 곳은 어쩌면 이타카가 아니라 ‘전쟁 이전의 이타카’였는지도 모른다. 아직 트로이를 무너뜨리지 않았고, 수많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으며, 어린 텔레마코스와 페넬로페가 자신을 기다리던 시절의 집.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오랫동안 바다를 건너도 도착할 수 없는 곳이다. 아들은 이미 아버지 없이 성장했고, 아내에게도 오디세우스가 알지 못하는 20년이 생겼다. 무엇보다 오디세우스 자신이 더 이상 그 집을 떠났던 사람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귀향은 오디세우스의 가장 간절한 욕망이면서 동시에 그 욕망이 환상에 불과했음을 확인하는 일이 된다. 멀리 있는 동안에는 믿을 수 있다.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괜찮아질 것이라고. 그러나 도착하는 순간에는 확인해야 한다.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내가 떠났던 자리가 남아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 많은 일을 겪고도 내가 다시 예전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결국 오디세우스는 이타카에 돌아가지만, 그곳에서 또다시 사람을 죽인다. 이 장면 때문에 긴 항해가 더욱 기묘하게 느껴졌다. 구혼자들의 죽음은 트로이의 죽음과 같은 죄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트로이 전쟁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는데 오디세우스의 주변에서는 좀처럼 죽음이 끝나지 않는다. 귀향길에서 부하들이 죽었으며, 마침내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자신의 손으로 다시 살육을 벌인다. 그렇게 오랫동안 트로이에서 멀어졌지만, 그가 도착한 곳에서는 또 다른 죽음이 반복된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비슷한 궤도를 걷는다.

 

 


인간을 닮은 신, 신을 닮은 인간


 

영화가 신들을 그리는 방법은 위와 같은 해석을 더욱 재미있게 만든다. 영화는 신들의 모습 대신 자연을 통해 보여준다. 호메로스의 신들은 인간 앞에 나타나 논쟁하고 편을 들며 운명에 직접 개입하지만, 영화에서는 대부분 모습을 감춘다. 제우스는 천둥으로, 포세이돈은 거대한 파도와 바람으로 존재한다. 당시 사람들에게 자연현상 자체가 신들의 의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연출 방법이다.


또한, 거대한 세계에서 가장 집요하게 반복되는 것이 결국 한 인간의 기억이라는 점이다. 영화는 호메로스의 원전처럼 현재에서 과거로 끊임없이 이동한다. 누군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기억은 곧 이미지가 되고, 이미 보았던 트로이의 장면들은 새로운 정보와 함께 반복된다. 이것은 <메멘토>에서 <오펜하이머>까지 놀란이 즐겨온 구조이면서 동시에, 『오디세이아』 자체가 가진 구조이기도 하다. 작품이 서양 문학의 가장 오래된 토대 가운데 하나이면서 이미 대담한 비선형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만하다.


이 반복에서 아테나의 정체 역시 다르게 보인다. 오디세우스 곁에 지속적으로 나타났던 아테나는 트로이가 함락되던 밤 죽임을 당한 신전의 여사제와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정말 신의 현현인지, 죄책감에 시달리는 오디세우스가 만들어낸 환영인지는 확정하지 않는다. 감독 역시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거부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진실이든 오디세우스가 그녀에게서 자신이 초래한 파괴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영화에서 신의 심판은 어쩌면 인간의 죄책감과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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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점에서 신이 실제로 인간을 벌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없어도 타인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대해야 한다는 규칙은 남는다. 신의 존재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신을 믿었던 인간들이 어떤 규칙을 통해 서로를 인간으로 대했는가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가 이상할 만큼 흐릿해진다. 그리스 신화의 신들은 인간보다 강하지만 인간과 별반 차이가 없다. 질투하고 분노하며, 사랑하고 욕망하고, 편애하고 복수한다. 인간들은 그런 신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영하고, 자연이 자신을 벌한다고 생각하며, 다시 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행동을 설명한다.


신화 속 존재가 어찌도 인간을 닮았는지 반문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질문의 방향이 반대인지도 모른다. 신이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과 닮은 신을 상상했을 가능성 말이다. 그래서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이야기가 아직도 이해되는 것은 아닐까.


인간은 수천 년 동안 많은 것을 바꾸었다. 배를 타고 몇 년씩 바다를 건너던 시대에서 비행기로 대륙을 오가는 시대가 되었고, 신의 분노라고 여겼던 천둥과 폭풍의 원리도 안다. 그러나 세계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전쟁이 벌어지고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으며, 인간은 욕망 때문에 잘못을 저지르고 뒤늦게 후회한다. 그럼에도 다시 욕망한다.


심지어 한 사람 안에서도 같은 일은 반복된다. 돌아가고 싶으면서 돌아가기를 두려워하고, 가지고 싶으면서 가진 뒤를 걱정하고, 잊고 싶으면서 잊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안다. 오디세우스가 2천 년도 더 된 신화 속 영웅인데도 이상할 정도로 낯설지 않은 이유다.

 

*

 

그래서 <오디세이>의 거대한 바다를 보고 있으면 그것이 단순히 이타카까지 남은 거리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오디세우스가 자신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도망칠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공간처럼 보인다. 아무리 멀리 항해해도 끝내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다.


영화의 마지막, 오디세우스는 마침내 페넬로페에게 돌아오지만 왕좌에 머무르지 않는다. 대신 페넬로페와 다시 바다로 향하고, 텔레마코스에게 다음 시대를 맡긴다. 원전에는 없는 선택이다. 그는 이타카에는 돌아왔지만 자신이 떠났던 삶으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과거를 복원할 수 없다면 남은 것은 자신이 저지른 것과 잃어버린 것을 기억한 채 다음으로 나아가는 일뿐이다.


신화 속 인간 역시 그렇다. 수천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인간은 여전히 욕망하고, 잘못하고, 후회하고, 다시 욕망한다. 거를 되돌릴 수도, 이미 내린 선택을 없던 것으로 만들 수도 없다. 결국 자신이 저지른 일을 기억한 채 다음으로 나아갈 뿐이다.


어쩌면 그래서 2,700년 전의 이야기가 아직도 낯설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신화 속 존재가 인간을 닮은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인간이 자신을 닮은 신과 영웅을 만들어냈으므로.


시대는 앞으로 나아가도, 그 안의 인간까지 언제나 멀리 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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