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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가장 뜨거운 계절은 왜 가장 오래 남는가 - 여름을 닮은 우리 [전시]

<성률 기획전, 여름을 닮은 우리> 성장통처럼 번져 남은 여름의 감각

by 오수민 에디터
2026.05.22 14:38

 

 

여름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무엇이 생각나는가. 뜨겁게 달궈진 놀이터의 철봉일 수도 있고, 장마 직전 눅눅하게 젖어 있던 아파트 복도일 수도 있다. 방충망 너머로 들려오던 매미 소리, 괜히 오래 바라보게 되던 뭉게구름, 땀 냄새와 모기향 냄새가 뒤섞인 밤공기. 이상하게도 여름의 기억은 풍경보다 감각으로 먼저 남는다.


성률 작가의 그림은 그 순간들을 붙잡는다. 거창한 사건도, 극적인 서사도 없다. 대신 누구에게나 한 번쯤 있었던 오후의 공기와 침묵이 그림 위에 얇게 내려앉아 있다. 친구와 나란히 걷던 골목, 괜히 먼 곳을 바라보던 아이의 뒷모습, 비가 오기 전 초록빛으로 짙어지는 도시의 풍경.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아름다웠음을 깨닫게 되는 시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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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시소 한남에서 개최되는 <성률 기획전: 여름을 닮은 우리>는 그 감각을 전시장 전체로 확장한다. 원화, 영상, 미공개 드로잉 등 140여 점으로 구성된 공간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관람객은 하나의 계절 속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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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귀를 채우는 것은 매미 소리다. 천장 사이로 내려앉은 조명은 한낮의 태양처럼 공간 바닥에 나뭇잎 그림자를 흩뿌린다. 발끝에 걸리는 그림자의 결까지 묘하게 현실적이다. 습기를 머금은 초록빛 공간에서는 비 내린 골목 특유의 눅눅한 공기가 떠오르고, 은은하게 스며드는 조명 사이로는 한여름 오후의 열기가 잔상처럼 맴돈다. 그림을 본다기보다 오래전 지나쳤던 계절 속을 다시 걷는 기분에 가까워진다.


특히 이번 전시는 성률 작가의 수채 원화를 가까이 마주한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디지털 화면에서는 쉽게 지나쳤던 번짐과 결들이 실제 종이 위에서는 전혀 다른 밀도로 다가온다. 물감은 경계 바깥으로 천천히 스며들고, 얇은 색층은 빛을 머금은 채 겹친다. 성률의 그림 속 여름이 유난히 선명한 이유는 색이 강해서가 아니다. 투명한 색들이 여러 번 포개지며 공기의 온도까지 화면 안에 남겨두기 때문이다.


작품 옆에 남은 작가 노트의 발췌는 수필처럼 일상적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놀던 기억, 오래된 동네 풍경, 사라질 공간에 대한 애틋함 같은 문장들. 공감 가는 이야기에 웃음이 지어지고, 괜스레 풋내나는 어린 시절을 회고하게 된다. 전시장을 걷고 있으면, 어느새 기억 속 한 장면 안으로 들어간 듯한 착각이 든다. 그 일상적인 문장들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마치 누군가의 여름 일기장을 조용히 넘겨보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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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터널을 지나 등장하는 ‘초록의 숨결’과 ‘부서지는 빛’ 공간에는 비에 젖은 이끼와 오래된 골목의 서늘함이 깃들어 있다. 뜨거운 햇볕 아래서 잠시 몸을 피했던 나무 그늘처럼, 그 공간은 관람객에게 느린 호흡을 허락한다.


전시 중반부의 ‘못다 한 이야기’ 공간에는 그림 대신 문장들이 놓여 있다. 성률 작가가 여름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무엇을 바라보며 자랐는지, 왜 반복해서 소년과 소녀를 그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록들이다. 남겨진 문장들 사이를 읽다 보면, 지금까지 지나온 풍경들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익숙하게 느껴졌던 여름을 다시 생각하게 되고, 작가의 신규 드로잉으로 그림 이전에 먼저 존재했던 감각들을 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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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 중심에는 작가 특유의 구름 연작이 자리한다. 새파란 하늘 위로 끝없이 솟아오르는 거대한 뭉게구름. 어린 시절 한 번쯤 운동장에 누워 멍하니 바라보았을 법한 풍경이 압도적인 크기로 펼쳐진다.


여름의 구름은 늘 이상한 감정을 남긴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해방감을 품고 있다. 그래서인지 일본 애니메이션 속 여름 풍경에는 유독 뭉게구름이 자주 등장한다. 아직 끝나지 않는 방학, 완전한 어른이 되기 직전의 시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막연한 예감 같은 것들.

 

 

‘성장’은 제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주된 주제이고, ‘여름’은 성장의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하는 계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성장은 지극히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과정입니다.

 

 

실제로 그림 속 인물들은 늘 경계 어딘가에 서 있다. 완전한 어른도, 그렇다고 아이도 아닌 소년 소녀. 그들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작가는 화창하고 눈부신 여름뿐만 아니라 어지럽고 불안한 순간까지 함께 꺼내 놓는다. 열사병에 걸린 듯 뜨겁고 혼란스러웠던 성장통. 한낮의 열기처럼 피할 수 없던 감정들. 그 안에는 아직 형태를 다 갖추지 못한 불안과, 그럼에도 앞으로 걸어 나가려는 마음이 함께 흔들리고 있다.


 

어쩌면 저는 그 시절 해결하지 못한 고민과 갈등을 그런 풍경 속에 새겨둔 채 외면해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중략) 그들은 성장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저의 모습이자 누군가의 모습일 겁니다. 이제는 문제를 직시하며 그림을 통해 과거의 저를 현재의 삶에서 마주해보려 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문득 깨닫게 된다. 우리가 여름을 좋아했던 이유는 태양 때문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여름은 미화하기 쉬운 계절이다. 땀에 젖은 채 뛰어다니다 편의점 앞에서 마시던 차가운 음료, 열기로 가득한 거리 끝에서 겨우 찾아낸 그늘, 늦은 오후가 되어 조금씩 식어가던 공기. 견디기 어려울 만큼 뜨거웠기에 오히려 더 선명하게 남아 있는 감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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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마지막에는 관람객이 미래의 자신에게 편지를 남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지난 계절을 통과한 사람만이 다음 계절을 기다릴 수 있다는 듯, 관람객들은 저마다의 여름을 적어 내려간다. 누군가는 지나간 청춘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아직 오지 않은 계절을 기다린다.


계절은 반복된다. 그러나 같은 여름은 단 한 번도 돌아오지 않는다. 전시장을 나설 즈음이면, 사람의 얼굴에는 방금 긴 여름을 통과하고 나온 듯한 표정이 남아 있다.

 

지난 4월 30일 여름을 기다리며 시작된 전시 <성률 기획전: 여름을 닮은 우리>는 그라운드시소 한남에서 여름의 끝자락인 9월 27일까지 운영된다. 여름이 완전히 지나가기 전, 잠시 들러 지나간 여름의 공기를 다시 꺼내 보고 싶은 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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