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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산책할 여가를 가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공백을 창조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일상사 가운데 어떤 빈틈을, 나로선 도저히 이름 붙일 수 없는 우리의 순수한 사랑 같은 것에 도달하게 해 줄 그 빈틈을 마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결국 산책이란 우리가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발견하게 해 주는 수단이 아닐까?

 

- 일상적인 삶, 장 그르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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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7일, 한옥의 고즈넉함과 즐거움의 생기가 넘치는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CN갤러리에서 전시 [농사짓는 몸_듣는 산책]이 개막했다.


전시 《농사짓는 몸_듣는 산책》은 무용가 이선아가 직접 농사를 배우고 몸으로 경험한 순간들을 바탕으로, ‘청각’이라는 감각을 통해 관람자의 일상에 조용히 농부의 삶을 초대하는 전시다. 흙을 딛는 발의 소리, 호미가 흙을 가르는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옥수수 잎사귀의 소리 등, 타인의 삶에서 건너온 생생한 음향들은 관람자의 귀를 거쳐 마음 깊숙한 곳으로 스며든다. 이 전시는 그저 ‘듣는’ 체험을 넘어, ‘듣는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바쁜 일상 속에서 무심히 흘려보내던 소리에 집중하게 하며, 감각의 빈틈을 열어둠으로써 여유와 공백이라는 사치를 허락한다.


‘듣는 산책’이라는 이름처럼, 이 전시는 단순히 귀로 소리를 따라가는 여정이 아니다. 그것은 몸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오래된 기억과, 우리가 지금껏 경험해온 감각의 지도를 따라 걷는 시간이다. 관람자는 소리라는 실마리를 통해 농부의 삶을 단순히 ‘이해’하는 것을 넘어, 낯설면서도 익숙한 소리 속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이 새롭게 반응하는 방식을 ‘감각’하게 된다. 그렇게 이 전시는 우리가 잠시 멈추는 순간, 도시의 소음 너머로 흙과 땀, 바람과 식물의 언어가 얼마나 풍부하고 정직하게 울리고 있었는지를 조용히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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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보통 ‘무용’이라 하면 무대를 떠올린다. 조명이 비추고, 음악이 흐르며, 몸이 공간을 가로지르는 그 장면들이 우리가 무용이라는 단어를 마주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무용가 이선아는 이 익숙한 무대를 조용히 벗어나, 그 범위를 '전시장'이라는 공간으로 확장시킨다. 전시 [농사짓는 몸_듣는 산책]은 안무된 동작이 아닌, 이선아 본인이 경험했던 순간들을 공간에 재현해내고, 이를 다시 관람객이 마주하는 순간들 속에서, 모든 움직임을 시간의 리듬과 감각의 궤적을 따라 흐르는 또 다른 형태의 ‘춤’으로 제안한다.


무용가 이선아에게 ‘몸’을 단순한 표현의 도구가 아니다. 세계를 지각하고 기억하는 하나의 매체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오랜 시간 땅을 일궈온 농부의 몸에 주목한다. 자연의 변화에 박자를 맞추며 노동을 반복한 몸의 움직임, 변화에 순응하면서도 쉽게 꺾이지 않는 탄력의 리듬은 훈련된 안무와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진다. 그것을 그는 살아낸 시간 자체에서 비롯된 무용, 감각이 퇴적된 몸의 언어로 마주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전시가 관객이 전시장을 돌아다니는 순간 뿐만이 아닌, 소리를 듣기 위해 ‘정지된 몸’에서조차 움직임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이선아는 객석에 앉은 관람자가 단순한 수용자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감각하고 상상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란다. 눈앞에는 농부도, 무용수도 없다. 하지만 귀에 닿는 흙과 바람, 도구의 소리가 관객의 몸속에 파동처럼 번진다. 우리는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스민 감각의 조각들을 따라 기억과 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리고 때로는 눈을 감고 때로는 몸을 기울이며 우리만의 '몸의 언어'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관객들의 몸 안에서 '움직임의 심상'이 피어난다. 이는 마치 감각과 이미지가 연쇄되어 또 하나의 안무를 만들어내는 듯한 경험으로, 무용가 이선아가 이번 전시에서 추구하는 궁극적인 방향성이다.


이선아에게 이번 전시 [농사짓는 몸_듣는 산책]은 자연과 감각, 그리고 인간이 맺고 있는 물리적이고도 심리적인 관계에 대한 탐구이며, 무용이 어떻게 일상의 영역과 만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시도다. 소리, 감각, 기억의 지층을 따라 우리가 ‘느끼고 상상하는 몸’으로 무대가 우리 내면으로까지 확장되어 존재할 수 있게 만든다. 들려온 소리, 어렴풋한 기억, 생경한 이미지들이 몸 안에서 은밀히 반응하고, 그 반응이 마침내 우리 안의 춤이 된다. 감각은 기억을 깨우고, 기억은 몸을 움직인다. 움직이지 않아도 움직이고 있는 그 감각의 풍경 안에서, 우리는 또 다른 ‘몸의 언어’를 배운다.

 

 

[크기변환]5.이선아_ 듣는 산책_ 소리(관람 장면) 2024_  본인 제공.jpg



섹션 [듣는 산책_소리]는 관객이 전시장 한켠에 조용히 앉는 순간 시작된다. 헤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것은 기계적으로 정제된 사운드가 아닌, 의도적으로 날 것 그대로 담긴 생생한 소리들이다. 논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을 때 코끝을 스치는 흙냄새, 마른 땅을 깨트릴 때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 계절에 따라 결이 바뀌는 바람의 시원함이 헤드폰을 통해 우리의 귀로 흘러들어온다. 관객은 소리를 듣는 동시에 그 소리의 질감, 온도, 밀도를 상상하며 ‘개인적인 무대’를 마주하게 된다. 그 무대는 다름 아닌, 감각을 따라 구성된 내면의 풍경이다.


섹션 [듣는 산책_움직임]은 [듣는 산책_소리]가 무용수의 몸으로 향하는 순간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농사짓는 과정에서 채록된 소리들을 들은 무용수는, 그 순간 느껴지는 감각을 따라 즉흥적으로 움직인다. 움직임은 안무되지 않은 자연의 흐름처럼 유연하고, 예측할 수 없는 궤적을 그린다. 그리고 그 몸짓은 또다시 관객의 감각을 자극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무용'의 범위에서 조금 벗어나 긴밀한 관찰을 통해 감정적 접합점을 찾아내는 해당 섹션은, 무용수의 움직임과 관객의 심상 사이, 감각과 감각이 교차하며 새로운 풍경이 떠오르는 그 순간을 포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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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8.이선아_듣는 산책2025_움직임 II (비디오_ 소요시간 25분 30초).jpg

 


[농사짓는 몸_듣는 산책]은 이선아의 오랜 탐구 주제인 ‘감각’과 그것을 탐구하는 방식인 ‘산책’을 '농사'라는 이름 아래에 동시에 담아낸다. 관객은 전시장 곳곳에서 마주치는 여백과 정지의 공간을 스스로의 감각으로 채워나간다. 전시장 자체는 새하얀 색으로 이루어진 여백이 많은 구조로, 관람자는 3층에 걸쳐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동선을 따라 걷는다. 그 흐름은 마치 하나의 안무처럼 구성되어 있으며, 전시장을 거니는 그 자체가 곧 ‘산책’이자 ‘무용’이 된다. 이 전시는 감각을 따라 걷는 것, 그것이 곧 춤이 될 수 있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가 농부의 감각에 머물고, 자신의 심상을 바라보는 그 순간,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분명 존재하고 있음을 이야기하며, 그 모든 감각의 순간을 '무용'으로 재해석하고 '산책의 여유'로서 우리에게 선물한다.

 


두 발이 흙을 딛고 있는 느낌이 좋다. 호미가 땅에 부딪히며 흙을 부수는 소리, 낫이 슥삭슥삭 풀을 베는 소리와 진하게 흘러나오는 풀 냄새도 좋다. 키가 자란 옥수수 밭에서 햇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와 바람에 찰찰찰 흔들리는 잎사귀 소리도 좋다. 반복되는 동작에 마음은 단순해진다.


- 2023 '농사짓는 몸' 리서치 기록 중, 이선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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