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바지가 생겼다.
트렌디한 바지라고는 할 수 없는, 하지만 내 몸에 신기할 정도로 꼭 맞는 바지. 잘 맞는 한 벌의 옷은 때로는 ‘나’를 나타내게 되기도 한다. 모두 똑같이 벌거벗은 몸 위에 올리는 다양한 색과 촉감, 모양의 레이어들. 아무도 벌거벗은 채로 길거리를 다니지는 않으니, 옷은 사실 제2의 몸인 셈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몸만큼 타고난 게 없는데 옷은 그 몸조차 다르게 보이게 만든다. 뽀뽀하고 있는 허벅지 안쪽 살들을 살포시 가려주기도, 자신 있는 어깨나 허리선을 부각해 주기도 한다. 옷이 바꾸는 건 몸의 실루엣만이 아니다. 그렇게 몸 위에 덧입혀진 모양은 어느 순간 그 사람 자체를 설명하기 시작한다. 아무리 말로, 행동으로 주장해도 먹히지 않던 것들을 나의 정체성으로 둔갑시켜 주기도 한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나는 그런 사람들이 항상 부러웠다. 자신에게 꼭 맞는 코트 한 벌, 재킷 하나, 구두 한 켤레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옷차림만으로도 “이게 나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물론 아무거나 툭 걸쳐도 멋진 태가 나는 사람들도 부럽지만, 멋있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나다운 것은 아니니.
그러니까 도대체, 어떤 옷을 입어야 나는 내가 될 수 있을까?
드레스를 입고 싶어
어렸을 때 나는 공주와 요정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아이였다. 할로윈 때 내 분장은 무조건 반짝거리고, 핑크색이고, 예쁘고, 치마여야 했다. 거실에서 발레 공연을 펼칠 때면 남동생에게도 나와 같은 발레 타이즈와 튀튀 스커트를 입히고 백댄서를 하도록 강제했다.
커가면서 치마는 나에게 기피의 대상이 되었다. 치마를 입는다는 것은 ‘예뻐 보이고 싶은 것’과 같았고, 예쁘지 않은 내가 예뻐 보이고 싶다는 티를 내는 치마를 입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대신 나는 머리를 짧게 자르고 최대한 몸이 드러나지 않는 옷을 입었다. 교복 치마를 반드시 입어야 하는 날이 아니면 절대로 입지 않았고, 체육복 바지가 나의 진정한 교복이 되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 순간 사람들도 나를 ‘여성스럽지 않은 애’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화장을 하지 않고, 머리가 짧고, 치마를 입지 않는 애. 그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별로 개의치 않는 척했다. 어쩌면 조금은 그 이미지를 마음에 들어 하기도 했다. 적어도 그 안에서는 실패할 일이 없었으니까. 애초에 예뻐지려고 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예쁘지 않아도 괜찮았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예쁜 것이 싫었던 적이 없다.
오히려 너무 좋아했다. 예쁜 옷도, 반짝거리는 것도, 화장도, 드레스도. 다만 그런 것들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내 몸 위에서 드러내는 일이 무서웠을 뿐. 예뻐지고 싶어 하는데 예쁘지 않은 사람.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애써 입은 사람. 그런 모습이 되는 것보다 차라리 처음부터 관심 없는 척하는 편이 나았다. 내가 감추고 싶었던 것은 여성스러움이 아니라, 여성스럽고 싶다는 욕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서 곧바로 드레스를 입을 수 있게 된 것은 아니다. 한 번 몸에 밴 습관은 꽤 오래간다. 어른이 된 지 한참인 지금도 옷장 앞에서 치마를 집어 들었다가 내려놓을 때가 있다. 몸에 관한 생각도 예전보다 많이 나아졌고 이제 누가 나를 보고 비웃을 거라고 진지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데, 이상하게 드레스를 입으면 ‘너무 꾸민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바지는 그냥 입는 것이지만 드레스는 작정하고 입는 것 같다. 게다가 앉을 때마다 신경 써야 하고, 계단을 오를 때도 조심해야 하고, 바람이라도 불면 귀찮다. 드레스를 멀리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바지를 입은 몸이 훨씬 익숙해졌다.
그런데도 가끔 드레스를 입고 싶은 날이 있다.
그날의 마음을 설명하기가 조금 어렵다. 누군가에게 예뻐 보이고 싶은 것도 아니고, 여자답게 보이고 싶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아무도 만나지 않는 날에도 그럴 수 있다. 예쁜 옷을 골라 입고, 평소보다 천천히 머리를 만지고, 거울 앞에서 립스틱을 바르는 일. 그런 것들이 가끔은 나를 정성껏 대접하는 일처럼 느껴진다. 영어의 pamper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나에게 해주는 것. 조금 과하게 예뻐도 된다고, 오늘 하루쯤은 나를 위해 수고를 들여도 된다고 허락하는 것.
그리고 어떤 날에는 그냥 아주 ‘여성스럽고’ 싶다. 여성스럽게 ‘보이고’ 싶은 것과는 조금 다르다. 누군가가 나를 여자로 봐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내가 여자라는 감각 안에 온몸을 푹 담그고 싶은 것에 가깝다. 치맛자락이 다리에 닿는 느낌이나, 평소라면 고르지 않을 색깔이나, 조금 과하다 싶은 장식까지 전부 빌려서 내가 가진 여성성을 한껏 부풀려 보고 싶은 날. 매일 그렇게 살고 싶지는 않지만, 가끔은 그 모습을 아주 끝까지 해보고 싶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에는 빌리의 친구 마이클이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하며 노는 장면이 있다. 〈Expressing Yourself〉에서 마이클은 빌리에게도 옷을 건네고, 둘은 함께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춘다. 내가 그 장면을 좋아하는 건 마이클이 드레스를 입는 이유를 거창하게 설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을 표현하는 일인데 뭐가 문제냐는 듯,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고 입고 싶은 것을 입는다.
어쩌면 나에게도 드레스는 이제 그런 것이 되어가는 중인지 모른다. 한때 드레스는 내가 예뻐지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폭로하는 옷이었다. 입는 순간 내가 가진 욕망을 남들에게 들키는 것 같았다. 그래서 입지 않는 것으로 나를 지켰다. 하지만 이제는 가끔 그 욕망을 숨기지 않고 싶다. 예쁜 것을 좋아하고, 나도 예쁘고 싶고, 어떤 날에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잔뜩 여성스러워지고 싶다. 그게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어도 된다.
어렸을 때의 나는 이유를 묻지도 않고 드레스를 입었다. 반짝거리고, 핑크색이고, 예쁘니까. 어쩌면 나는 아주 먼 길을 돌아 다시 그 단순한 이유로 돌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드레스를 입고 싶으니까, 드레스를 입고 싶다.
나에게 맞는 옷
요즘 좋아하는 바지가 하나 생겼다. 아주 기본적인 데님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몇 가지 꽤 까다로운 요건을 충족시키는, 드물게 만족스러운 바지다.
우선 기장이 좋다. 너무 길지도, 짧지도 않고 딱 복숭아뼈 부근에서 끝난다. 나는 한동안 다리가 길어 보인다는 이유로 발에 질질 끌리는 바지를 자주 입었다. 걸을 때마다 뒤꿈치에 밟히고, 비가 오는 날이면 밑단이 축축하게 젖어 올라와도 그냥 그런 게 멋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그게 정말 참을 수 없이 짜증 나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많이 걷는 사람인데, 왜 걷는 데 불편한 바지를 계속 입고 있는 거지.
통도 적당하다. 골반과 허벅지의 모양을 완전히 지워버릴 만큼 벙벙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몸에 딱 달라붙지도 않는다. 허리는 꽤 높이 올라온다. 걸을 때마다 흘러내릴 것 같은 로우라이즈보다, 적당한 두께의 데님이 허리를 한 번 잡아주고 배를 덮어주는 쪽이 좋다. 워싱도 진하지도 옅지도 않은 평범한 청색이다. 특별히 무엇과 입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색.
전부 별것 아닌 조건들이다. 그런데 그 별것 아닌 조건들이 전부 맞는 바지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이 바지는 걸을 때 밟히지 않는다. 다리가 더 길어 보이지도 않고, 실루엣을 극적으로 바꿔주지도 않는다. 허리는 뜨지 않고, 그렇다고 배를 억지로 조이지도 않는다. 적당히 몸에 붙어서 내가 움직이면 같이 움직인다. 바지 때문에 보폭을 줄일 필요도, 앉기 전에 허리춤을 한 번 끌어올릴 필요도 없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거울 속의 모습이 가장 나답다. 예전에는 멋있는 바지를 보면 내 몸을 그 바지에 맞추려고 했다. 길면 길수록 다리가 길어 보일 것 같았고, 유행하는 실루엣이 내 몸에도 그대로 나와야 할 것 같았다. 옷이 어울리지 않으면 옷이 내 몸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보다 내 몸이 그 옷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바지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정반대다. 내가 많이 걷는 사람이라는 것, 허리가 안정적으로 잡혀 있는 걸 좋아한다는 것, 바짓단이 발에 걸리는 걸 견디지 못한다는 것, 내 다리의 모양을 완전히 감추고 싶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나서 고른 바지다. 내 몸을 어떤 유행하는 실루엣에 밀어 넣은 것이 아니라, 내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무엇을 편안해하는지를 알고 나서 골랐다. 어쩌면 어떤 옷이 내 몸에 맞는지 알아가는 일은 내 몸이 어떤 몸인지 알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어떤 옷을 입어야 내가 될 수 있는지 궁금했다. 이제는 질문의 순서가 반대였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어떤 몸을 가지고 있고, 무엇을 좋아하고, 어떻게 움직이는 사람인지 조금씩 알아야 비로소 나에게 맞는 옷도 알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좋아하는 바지가 생겼다는 사실이 나는 꽤 마음에 든다. 오랜만에 내가 옷에 몸을 맞춘 것이 아니라, 내 몸을 알고 나서 고른 옷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