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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무대 위의 낯선 몸짓이 결국 나의 삶처럼 느껴질 때 – 울티마 베스 ‘보이드’ / 제29회 서울세계무용축제 - SIDance2026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몸으로 드러난 인간의 감정은 낯설지 않았다

by 강효정 에디터
2026.09.04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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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이드©DannyWillems.jpg

       

       

      무용극을 처음 관람했다.


      공연을 보기 전에는 무용극이라는 장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조금 막막했다. 영화나 연극처럼 대사와 명확한 이야기를 따라가며 이해하는 것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공연이 시작된 직후에도 나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이 인물들은 어떤 관계인지, 지금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이 장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계속 답을 찾으려 했다.


      그런데 공연을 보다 보니 어느 순간 깨달았다. 꼭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이는 대로 보고, 들리는 대로 듣고, 느껴지는 감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됐다.


      제29회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2026)의 개막 공연으로 한국을 찾은 벨기에 현대 무용단 울티마 베스(Ultima Vez)의 <보이드(Void)>는 처음 만난 무용극의 매력을 깨닫게 해준 작품이었다.

       

       


      언어를 몰라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한다


       

      KakaoTalk_20260904_174500322.jpg

       

       

      공연에서는 영어와 광둥어, 핀란드어 등 다양한 언어가 등장했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순간도 많았다. 이상하게도 자막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용수의 억양과 표정, 몸짓과 분위기를 통해 지금 어떤 감정이 오가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른다. 누군가는 상대를 밀어내고 거부한다. 서로 뒤엉키고 붙잡고 놓친다. 실증을 내다가도 어느 순간 다른 사람에게 기대고, 낯설게 느껴졌던 존재를 받아들이기도 한다. 말의 뜻을 모두 알지 못해도 화가 났다는 것과 슬프다는 것, 누군가를 밀어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벨기에에서 온 무용단의 공연이 한국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하기도 했다. 같은 작품이라도 나라와 환경, 언어에 따라 관객마다 다른 방식으로 해석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다. 화를 내고, 소리를 지르고, 상대를 거부하고, 외로움을 느끼고, 누군가에게 기대고 싶어 한다. 인간의 감정은 언어보다 먼저 몸에서 드러난다. 정확한 대사의 의미를 몰라도 무대 위 인물들의 감정에 몰입하게 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지 아닐까?


      무용수들이 음악과 극의 흐름에 집중하며 무대를 이끌어가는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몸 하나로 공간의 분위기를 바꾸고 관객의 시선을 붙잡는 힘이 있었다. 무용수들의 움직임에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무대 위에서 만들어지는 에너지에 관객의 감정까지 더해지는 듯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무용극이 어느 순간부터는 '이해해야 하는 공연'이 아니라 '함께 느끼는 공연'으로 다가왔다.


       


      부드러운 그릇이 깨지는 순간


       

      공연에서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장면 중 하나는 그릇이었다.


      그릇은 공연 내내 반복해서 등장한다. 무용수들은 그릇을 아슬아슬하게 굴리고, 때로는 무대의 경계를 넘어 관객이 있는 공간까지 밀어낸다.


      그 순간 나는 놀랐다.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하는 사람들과 객석에 앉아 공연을 보는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용수가 무대 단차를 벗어나 관객이 있는 공간으로 그릇을 굴리는 순간, 그 경계가 갑자기 깨졌다.


      마치 텔레비전 화면 속에만 존재하던 무언가가 갑자기 현실로 툭 튀어나온 것처럼.


      결국 그릇은 와장창 깨진다. 무용수들은 망치로 깨진 그릇을 더 잘게 부순다. 너무 쉽게 깨지는 모습을 보며 '저게 정말 그릇이 맞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설탕이나 다른 재료로 만든 소품이 아닐까 의심할 정도였다.


      그것은 실제 그릇이었다.


      일상에서 그릇은 실수로 떨어뜨려 깨지는 물건이다. 손에 들려 있을 때는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평범한 물건이지만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산산조각 난다. 부드러웠던 것은 순식간에 날카로운 조각이 된다. 공연 중간에는 배우들이 다치지 않도록 무용수들이 직접 쓰레받기로 깨진 조각을 자연스럽게 치운다. 위험한 물건을 무대 위에 남겨두면서도 동시에 그 위험을 스스로 관리하는 과정까지 공연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공연 후 이어진 감독과의 만남에서는 그릇을 깨는 장면의 위험성에 관한 질문도 나왔다. 이에 빔 반데케이부스는 무대에서는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며, 그릇을 깸으로써 일상에서 느끼는 공포의 정도를 낮추고 싶었다는 취지로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 위험하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것.


      나는 그릇이라는 일상적인 물건을 이렇게 무대의 표현 요소로 활용한 방식이 재미있고 기발하게 느껴졌다. 익숙한 물건이 깨지는 순간 전혀 다른 의미와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무용극은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하나의 장면만으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을 이 장면에서 실감했다.


       


      '보이드'라는 공간에서 살아가는 인간들


       

      Wim Vandekeybus (2) © Filip Claessens.jpg


       

      공연을 보기 전까지 '보이드(Void)'라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했다. 줄거리 역시 거의 알지 못한 채 무대와 마주했다.


      그래서인지 공연을 보는 동안에는 하나의 정답을 찾기보다 장면마다 떠오르는 감정을 따라가게 됐다. 공연이 끝난 뒤 '보이드'가 비어있는 공간이라는 뜻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결국 인간이 살아가는 이야기였구나.’


      무대 위 여섯 명의 무용수를 보면서 나는 이들이 마치 한 사람의 몸 안에 존재하는 세포처럼 느껴졌다. 한 명이 중심이 되어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다른 무용수에게 붙잡힌다. 서로 밀어내고 거부하고 때리다가도 어느새 가까이 붙는다. 뒤엉키던 존재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서로에게 적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낯선 존재를 경계하고 거부하더니 계속 함께 움직이면서 서로에게 기대고, 붙잡고, 때로는 보듬는 순간도 생긴다.


      공연 속 인물들이 각기 다른 삶과 경험에서 비롯된 존재라는 설명을 듣고 나니 무대 위에서 서로 충돌하던 모습이 더욱 인간적으로 다가왔다. 우리 역시 매일 누군가와 부딪히며 살아간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거부하고 싶어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에는 실증을 낸다. 화가 날 때도 있고,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아질 때도 있다. 슬픈 날에는 세상에 나 혼자 남은 것처럼 느껴지고, 모든 것이 나를 밀어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러다 또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살아간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다음 날을 맞는다.


      마지막 장면에서 여섯 명의 무용수는 음악에 맞춰 함께 춤을 춘다. 점점 클라이맥스를 향해 나아가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음악처럼 그들의 움직임도 계속된다.


      결국 무용수들은 검은 천막에 휩싸여 사라진다.


      그 순간이었다.


      '아, 이 공연 제목이 보이드였지.'


      복잡하게 움직이고 충돌하고 뒤엉키던 존재들이 결국 검은 공간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무대 위 인물들은 하나의 명확한 답으로 남지 않았다. 누군가는 화를 냈고, 누군가는 거부했고, 누군가는 붙잡았다. 그리고 다시 서로에게서 멀어졌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과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함께 살아간다. 낯선 존재를 경계하다가도 어느 순간 익숙해지고, 밀어내다가도 다시 붙잡는다. <보이드>는 나에게 다채로운 인간의 생활 군상을 보여준 공연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하려 했지만, 공연이 끝난 뒤 남은 것은 하나의 정답이 아니었다. 무대 위에서 몸으로 드러났던 수많은 감정이었다. 화, 불안, 거부, 충돌, 외로움, 그리고 서로에게 적응해 가는 과정. 아마 이것이 내가 처음 무용극을 보고도 낯설지 않았던 이유일 것이다.


      무대 위의 몸짓은 낯설었지만, 그 안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부딪히고 흔들리고, 또다시 하루를 살아간다. <보이드>는 그 복잡하고 지저분한 인간의 삶을 말보다 먼저 몸으로 보여주었다.


      공연이 끝난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단순했다.


      ‘와, 멋있다.’


      한동안 엔딩 장면이 머릿속에 남았다.  순식간에 부드러운 천에 휩싸여 사라진 무용수들의 흔적을 찾아 무대를 더듬던 나는 그저 텅 빈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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