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반쪽짜리 청춘. [영화]

영화 [맨발의 청춘] (김기덕, 1964)
글 입력 2022.05.05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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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맨발의 청춘 2.jpg

 

 

영화는 결국 시대의 욕망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욕망에 대한 인식은 대부분 사후적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영화의 시대 배경인 1960년대는 한국전쟁 후 국가 재건이라는 대전제 앞에 놓여있었다. 댄스홀에서 춤을 추고 사람들과 교제하는 모습, 그곳에서 놀 때에는 그 작은 세상 안을 호기롭게 누비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더 큰 사회 안에서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군상을 영화는 건달이라는 극적인 설정으로 보여준다.

 

영화의 기술적인 부분과 내러티브 역시 전쟁 직후의 작품들에 비해 보다 세련되고 스타일리시해졌다. 춤을 출 때 음악에 맞춘 리드미컬한 컷편집, 두수가 형사들에게 둘러싸여 취조를 당할 때 검정 옷 형사들과 흰옷 두수의 명암대비, 인물 배치 등 프레임 자체에서 나름의 중요도를 설정하고 그에 입각해 비가시적인 편집을 선보인다.

 

내러티브의 선형도가 보다 뚜렷해지면서 인물들은 일종의 전형성을 획득하게 된다. 클리셰의 일반적인 정의를 반대로 생각해 보면 관객의 기대 심리를 성실히 충족시켜준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맨발의 청춘은 관객이 기대하는 걸 실현시켜준다. 그것이 설령 비극적 결말이더라도 관객들은 비극이 사랑의 또 다른 완성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어떤 숭고를 획득하는 서사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당대의 윤리의식은 ‘나쁜 짓을 하긴 해도 심성은 착한 남자’를 쉽게 허락해 줬다. 그가 하는 탈법과 위법에는 청춘이라는 보호막이 붙는다. 방황하는 청춘(사실상 막무가내 청춘) 내지는 사랑 앞에서 모든 걸 내던지는 청춘이 면죄부가 되는 시대는 어느 정도 종언을 고한지 오래다.(물론 여전히 어떤 것들은 ‘청년’이라는 이름의 탈을 쓰고 너무 쉽게 행해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사랑과 사람에 서툰, 상처 많은 사람이 정신적 순결을 획득한다는 신화적 상상력이 그 신화가 얼마나 폭력적인 기반 위에서 만들어진 서사인지 허물없이 보여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상대를 이해하고 그를 교화시키려 하며 구원자의 위치에 서있는 여성은 서사적으로 간편한 선택이 되어버린다. 두수가 겪는 일은 메인 플롯이 되고 요안나가 겪는 일은 서브플롯도 아닌 ‘인서트’가 되어버리는 게 그 고려 없는 간편함을 자인하는 셈이 된다. 모든 인물의 비중이 균등할 수 없다는 건 당연하다.

 

 

[trans]맨발의 청춘 4.jpg

 

 

하지만 두수의 자리에 두수가 아닌 아가리가 들어가면 서사가 만들어질 수 없지만 요안나의 자리에 영화 속 그 어떤 여성이 들어가도 그 서사는 결국 두수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청춘영화’가 될 테니, 이는 반쪽짜리 청춘영화일 수밖에 없다.

 

다만 죽은 두수의 맨발에 자기가 신던 신발을 신겨주는 아가리의 눈물이 조금은 다른 사랑으로 보였다면 그게 영화의 말미에서 본 또 다른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까?

 

 

 

조원용 컬처리스트.jpg

 

 

[조원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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