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경험하지 않은 시절에 대한 향수를 이끌어내는 이야기 - 영화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

독창과 고집이 탄생시킨 문화의 아이콘, 힙노시스를 들여다보다
글 입력 2024.04.2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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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직접 겪어보지 않은 시절에 대한 향수를 경험하곤 한다. 태어나기 이전에 발매된 좋은 음악을 듣거나 과거를 그린 영화, 드라마를 보면 그 매체가 점유하는 시절의 감성과 분위기에 매료될 때가 있다. 몸소 체험해 보지 않았지만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느꼈을 감정에 공감하고 심지어는 그때에 대한 그리움까지 생기기도 한다. 이렇게 신기한 경험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부쩍 복고, 레트로 혹은 아네모이아(경험하지 못한 시절에 대한 향수라는 뜻을 가진다)와 같은 단어들이 유행하는 모습도 보인다.

 

지금 소개할 영화 역시 같은 맥락에서 감상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은 핑크 플로이드, 레드 제플린, 폴 매카트니, 피터 가브리엘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뮤지션들의 앨범 커버를 제작하며 록 음악 산업에 큰 발자취를 남긴 전설적인 디자인 스튜디오 힙노시스(Hipgnosis)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이 예술을 하고 음악을 하던 1960, 70년대를 향유했더라면 하는 상상을 계속 곱씹게 만드는 작품이다.

 

디자이너 스톰 소거슨(이하 스톰)과 포토그래퍼 오브리 파월(이하 포)이 힙노시스를 창립하게 된 순간부터 모두의 칭송을 받는 디자인 스튜디오가 되기까지의 여정이 그려진다. 포 본인과 더불어 힙노시스와 함께 작업했던 주변 아티스트와 동료들의 진솔한 인터뷰가 담겨있다. 핑크 플로이드의 데이빗 길모어와 닉 메이슨, 비틀즈의 폴 매카트니, 그리고 오아시스의 노엘 갤러거까지 최고의 뮤지션들이 직접 등장해 때로는 담담히,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독창적이고 독보적이었던 두 사람의 능력과 끈기에 더불어, 청춘이자 창작자로서 그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민과 혼돈을 엿보고 나면 그들의 예술 그리고 그 시절에 마음을 사로잡히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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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톰과 포는 음악 산업에서 앨범 커버의 존재감이 그리 두드러지지 않던 시절, 독창적이고 예술적인 커버에 주목하기 시작했던 장본인들이다. 그들에게는 모방을 최대한 배제한 채 세상에 새로운 것을 내보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 창의성을 바탕으로 음악의 콘셉트와 감정을 오롯이 표현하기 위해 산, 바다, 들판, 사막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니며 사진을 촬영하고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전하고 싶은 바를 네모난 커버 안에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 때까지 사진, 그림, 디자인에 몰두하는 집요한 끈기 역시 그들이 가진 강점 중 하나였다.

 

영화는 포와 힙노시스의 이전 구성원들을 비롯, 핑크 플로이드, 폴 매카트니 등 아티스트가 소장하고 있던 수많은 아트워크를 활용해 그들이 앨범 커버에 쏟았던 열정과 그 결과물을 생생히 보여준다. 촬영 순간을 담은 영상, 그들과 함께 일했던 화가의 작업물 등 다양한 시각 자료를 내내 등장시키며 흥미를 돋운다. 현재 시점에서 봐도 스크린에 비치던 모든 앨범 커버와 아트워크가 세련되고 독창적인데, 당시 뮤지션들과 대중에게는 얼마나 큰 충격이었을지 그 반향을 떠올려 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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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그들의 도전적이고 실험적인 몇몇 시도가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커버에서 뮤지션의 이름과 이미지를 모두 지운 채 무지 봉투로 LP를 밀봉하거나, 음악과 무관하고 무의미한 이미지를 내세우기 위해 들판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있는 소를 촬영한 것이 그 예다. 새삼스럽고 뜬금없지만 최초였기 때문에 그 자체로 문화적 상징이 될 수 있었던 시도들을 기억해 본다.

 

그들은 음악 산업에 만연한 배신과 악의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 스턴트 배우의 몸에 실제로 불을 붙여 불타는 사람의 이미지를 촬영하거나, 바다의 한복판에서 긴 소파 위에 양을 올려놓고 공들여 찍은 사진을 손톱만 한 크기로 커버에 삽입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무모하거나 과도하다는 인상이 느껴지는 시도들이다. 그러나 동시에, 개성을 추구하면서도 음악이 전하는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담고자 최선의 노력을 쏟았기에 해당 커버들이 지금까지 회자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앞서 언급했던 작업들보다 제작 과정은 다소 평범하지만 결과물은 탁월하게 느껴진 경우도 물론 있다. 피터 가브리엘의 흑백 사진 위에 하얀 종이를 찢고 오려 붙여 그가 앨범을 손톱으로 긁어내리고 있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 커버, 그리고 차 안에 탄 아티스트가 아니라 차 표면에 맺힌 물방울에 초점을 맞춰 서정적 분위기를 자아낸 커버를 떠올려 본다. 이렇게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는 작업들도 수많은 시도와 고난 끝에 터득한 노하우의 방증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힙노시스가 이렇게 놀라운 커버들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앨범 커버 제작을 단지 상업활동의 일환이라고 여기기보다는 예술로서의 음악을 올곧게 바라보며 작업한 덕분이라고 느껴진다. 담당하게 된 음반을 수백 번씩 반복해 들으면서 어떻게 하면 음악에 담긴 아티스트의 메시지와 호소를 커버에 잘 드러낼 수 있을지 고집스럽게 고민한 결과다. 더해, 대중이 음반을 찾아 들을 때 처음으로 접하게 되는 커버 이미지의 의미와 역할을 일찍이 깨달았던 그들의 통찰력에 경의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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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인물들이 살아가던 때는 음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있던 시절이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음악으로 개성을 드러낼 수 있었고, 청춘, 사랑, 사회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은 노래들이 상업적 가치 없이도 온전한 예술로서 존재하던 시대였기에 음악뿐만 아니라 앨범과 커버 역시 특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면 음악도 바뀌기 마련이다. 앨범 커버는 음악의 메시지를 표현하는 하나의 틀이자 그 자체로 예술이었지만 점점 음반사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해 갔다. 예술의 지나친 상업화가 지배적인 지금, 그들이 음악 산업의 황금기였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극장을 나온 후 그들의 그리운 감정이 전이된 것을 느꼈다. 과거에 대한 향수뿐 아니라 음악과 예술에 열중하며 함께 꿈을 좇던 동료들을 향한 그리움까지 어렴풋이 와 닿았다. 50년이 지난 지금을 살아가는 나에게도 음악의 역사와 그 가치가 전해졌다는 뜻이다. 음원 사이트에 핑크 플로이드의 이름을 검색하고, 그들의 앨범 커버를 찾아보고, 당시의 음악을 찾아듣게 만들었다. 지나간 시간은 절대 돌아올 수 없다는 점이 내심 씁쓸해지지만, 그 시절을 누렸던 그들의 노력과 재능을 기억하도록 만든 것만으로도 성취를 이룬 영화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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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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