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정신병 환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 정신병의 신화

글 입력 2024.12.04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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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의 이야기를 하나 소개한다.

 

의사가 한 명뿐인 작은 병원이 있다. 그는 유일한 고용주이자 정신병의 진단과 처방에 관여할 수 있는 유일한 전문가였다. 자본과 지식 권력, 그래서 그곳에서는 그의 진단과 처방에 반기를 들 수 있는, 아니 들 수 있더라도 그럴 용기가 있는 사람이 없었다.

 

의사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진단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었고, 그것을 휘두르는 것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그것을 즐겼을지도 모른다. 의사의 원장실에는 거대한 어항이 있었다. 아름답고 화려한 잉어들로, 여러 어항에는 그가 직접 고른 물고기들로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다. 그는 그것에 비싼 먹이와 물을 갈아주며 정성스럽게 키웠지만, 오랜 시간 동안 여행을 다녀온 후에는 그것을 방치해두었다. 그는 그것들이 밖으로 튀어나와 말라 죽어있는 시체를 건조한 눈빛으로 치웠다.

 

그가 꾸민 어항과 운영하는 병원은 꽤 닮아있었다. 물고기의 생사여탈권을 그 자신이 쥐고 있는 것처럼, 병원 안에서 의사는 자신의 환자를 고함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진단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사실 의사에게도 환자들과 공감할 만한 아픈 기억과 섬세한 감정이 숨겨져 있었다. 어쩌면 그래서 그는 정신과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하얀 가운을 통해 자신의 모순적이고 섬세한 부분을 한국 사회에서 가장 찬탄할 만한 권력으로 숨겼다.

 

그에게 물고기를 키운다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물고기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방치를 통해 끔찍한 죽음을 선사하는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먹이를 주는 행위와, 그가 자신의 병원의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행위, 환자들에게 약을 주는 행위는 정말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일까? 의사는 그에 대한 생각을 누구와도 나누지 않았다. 그럴 이유도, 계기도 없었고, 그렇게 만들지도 않았다.

 

한편, 남자 A는 최근 회사를 그만두고, 근거 없는 자괴감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 내용은 대부분 자신의 무능감과 관련된 것이다. 무능감은 점점 더 자신의 인지능력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졌고, 그것은 어느 날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성인 ADHD' 관련 문항과 결합하면서 뚜렷해졌다. 살면서 단 한번도 자신의 주의 집중력에 문제를 느끼지 못했던 그가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그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어쩌면 A는 정말로 문제가 있었는데, 그걸 인지하지 못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산 건 아닐까?

 

남자는 자가진단 문항을 읽는다. '대화를 할 때 잘 듣지 않는 경우가 있다'... 남자 A는 어린 시절에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 교실에서 그는 가장 비천한 존재였던 그는 사람을 피하는 방향으로 당시의 심리적 위협을 이겨냈다. 성인이 되고 나서 일반적인 대인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지만, 그는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공격자에 동조되는지 알았다. 그는 종종 사람들의 건조한 시선 속에서 드러났는지도 모르는 모순을 읽어내는 데 집착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이 시선의 회피나 대화를 피하는 방식으로 나타나곤 했다. 남자는 동그라미를 쳤다.

 

'과제나 업무를 수행하는 데 집중을 하지 못한다.' 회사에서 업무 기한을 놓친 적은 없지만, 그는 업무 중간에 끼인 공백과 어려운 과제에서 필연적으로 느끼는 불안에 머리가 하얘졌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상사는 맥락을 이해하는 대신, 그가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은 맞는지' 비꼬았다. 억울한 부분도 있지만 그것은 일부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동그라미를 쳤다. '다른 사람들의 대화나 활동 사이에 끼어들거나 참견하는 경우가 있다.' 어색한 침묵을 참지 못해서,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기류를 참지 못해서, 끼어든 상황들을 무수히 떠올린다. 동그라미, '체계적으로 수행하는데....', 동그라미.

 

거의 확신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그는 이미 자기 자신을 ADHD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즉시 유튜브와 인터넷 자료를 뒤져본다. 심리 전문가라는 이들은, ADHD 환자들의 삶이 불안한 것은 당연하다고 이야기했다. 사실 이 시점에서 그는 자신의 깊은 상처를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보다, '알 수 없는 뇌의 어떤 부분'이 부족한 것으로 생각하는 쪽이 마음이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런 자료들을 통해 이상한 위안을 받고, 병원에 찾았다. 처음 가보는 정신과 의원에 그는 불안과 초조함을 느꼈고, 거대한 어항과 의사 앞에서 약간의 떨림을 느꼈다. 면접을 보는 것처럼, 그의 정신은 살짝 분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의사는 선고를 내렸다. "당신, ADHD군요."

 

그때 남자 A 안에 있는 복잡한 생각은, '내가 ADHD다.'라는 일종의 신경 소수자로서의 비참함으로 모두 깔끔하게 대체되었다. 이제 그 슬픈 사실만 받아들이면 되었다. 이상의 이야기는 '남자 A가 의사에게 ADHD를 진단받고 약을 먹었다.'라는 한 줄로 요약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사회에 흐르는 의사와 환자 간의 권력관계, 의사가 의식하길 거부하는 개인적인 이슈, 환자가 의식하길 거부하는 개인적인 이슈가 환상적으로 만나 하나의 진단을 만들고, 그 나머지 맥락을 모두 지워버리는 참혹한 장면이었다.

 

*

 

이 이야기는 ADHD가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복잡한 인간의 정신 문제를 하나의 진단명으로 만들어버리는 정신의학 진단 시스템과, 그 진단 시스템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정신병이라는 신화'와 그에 공모하는 우리의 정신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병의 신화는 한 사람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경계선 지능', 'ADHD', '중독'과 같은 하나의 문화 코드로 자리 잡아 세상에 더 많은 고통을 재생산하고 있다.

 

정신건강 보험과 DSM-V이 만든 환원적 진단 시스템으로 인해 정신병은 마치 의학적 실체인 것처럼 다뤄진다.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뇌의 영역과 연계하여, 정신병이 마치 다른 병처럼 실존하는 것처럼 다루기도 한다. 하지만 토머스 사스가 비판한 것처럼, 다른 질병처럼 인간의 정신을 물리적 현상으로 떼어놓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누군가 하나의 진단을 실존하는, 고정된, 어떤 물리적 실체로 다룰 때 그것은 심리관련 치료사의 권력투쟁이지 환자를 진심으로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정신의학 현실에 대해 몇십 년 전에 의사이자 정신분석가인 토머스 사스가 강도 높은 비판을 한 적이 있다. 그러한 내용을 담은 것이 오늘 리뷰할 책, '정신병의 신화'이다.

 

이 글에서 얼마나 나 자신의 삶이 얼마나 드러났는지 모르겠지만, 일련의 소설은 내가 직간접으로 겪은 경험에 상상력을 섞은 것이다. 심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러한 공부를 시작하게 되는 것 같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사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과 멀어지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위해서, 깊은 의미에서는 나 자신을 받아들여지고 이해받기 위해서 시작한 공부인데, 지식은 현상을 해석하는 탓에 내 앞에 있는 '사람'을 '환자'나 '케이스'로 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내가 가장 강렬하게 느낀 감정은 죄책감이었다. '케이스'를 해석하고 짜맞추면서 느끼는 천박한 지적 쾌락과, 마치 전문가로서 그곳에서 빗겨 서 있다는 안심감이 진심으로 스스로 역겹게 느껴졌다. 그런 역겨운 감정을 돌아보지 않고 '환자' 앞에 '치료사'로 서 있는 것만큼 끔찍한 일은 없다.

 

대체 무엇이 그 둘을 그렇게 나누었는가? 몇 년도 안되는 전공지식의 차이? 이해받길 원하지만 지식권력에 의해 진단받고자 하는 그 사람 욕망과 누군가를 구원하고 싶다는 나의 은밀한 공모가 일어나고 있지는 않은가? 그 안에 존재하는 깊은 감정의 문제로 온 사람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똑같이 그런 몰이해 뿐이라면, 나는 진심으로 그곳에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아마 내가 '심리치료 영역'에서 약간 빗겨 서 있는 것은 이러한 부정적인 경험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토머스 사스의 강도 높은 비난을 이해할 수 있다. 세상에는 훌륭한 심리치료사가 있지만, 훌륭한 치료사의 수만큼이나 자신의 내적 요구에 의해 환자를 이용하는 심리치료사들도 많다. 나는 진실을 찾고자 하는 의지를 잃어버린 이들을 진심으로 경멸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환자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고통스럽게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러한 업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그 순수한 충동을 경멸만큼이나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형편없는 내담자-치료자 관계라도 어떤 진실한 감정이라는 것이 탄생하는 순간이 있고, 그것을 직시하고 따라갈 수 있다면 처음 내담자가 방문했을때의 의도는 어느 정도 충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마스 사스의 '정신병의 신화'는 심리치료사에게 널리 읽혀야 하는 책이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당신이 치료사로서 왜 거기 있는지', '환자에게 그렇게 대해도 되는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게 하기 때문이다. 책은 정신병이라는 신화를 만든 샤르코-프로이트의 정신적 기반과 일종의 거대한 권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정신의학 모델을 비판한 1부 '정신병의 신화', 의사소통 게임으로 정신 분석 과정을 설명하는 2부'개인 행위 이론의 토대'(일종의 대안으로써 제시된다)로 이루어져 있다.

 

정신분석을 조금이나마 공부하고 현대적 관점의 정신분석 세션을 직접 받고있는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토머스 사스의 비판은 현대 정신분석의 관점에서는 적용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감정을 강조한 고전적 해석을 경시한다는 느낌이 있다. 오늘날의 정신분석은 정신분석가를 프로이트와 같은 해석자의 위치에 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역전이와 전이 해석, 과거가 아닌 분석 세션 과정에서의 역동적인 감정의 해석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또 의사소통 이론과 언어 게임, 대상관계이론을 중심으로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어떤 케이스에서는 고전적 해석의 관점이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사스의 제안도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옵션으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아마 이런 부분들은 오래 전에 나온 책이기도 하고 책의 주장을 명료화하기 위해 요약하여 쓴 결과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토머스 사스가 이 책을 쓴 이유만큼은 정신치료와 관련된 이론이 놀랍도록 발전해도 마음 속에 담아 둘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다양한 방식으로 내면화될 수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요약한다. '정신을 분석하거나 치료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끝없이 연구하는 이론가인 동시에 수많은 색채와 리듬을 인지할 수 있는 예술가여야 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그 스스로가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윤리학자여야 한다.'

 

이왕 개인적인 관점을 실컷 드러낸 입장에서 이야기하자면, 진심으로 나 자신이나 다른 심리치료사들이 안주하길 원하지 않는다. 다른 직군도 아닌(그리고 인지행동치료 범위를 넘어서는) '정신분석가'라면 다른 직군과 비교가 안 되는 높은 수준의 진실성이 요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직업이기도 하고, 사람인 인상 성인의 수준에는 이를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시작한 업이라면 누군가를 이용하지는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쓰고 보니 나의 전방위적인 불안이 글에 투사되는 것 같은데, 한 사람의 일부라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상 전체가 필요한 것은 진실이다.

 

정신을 다루는 사람들이 먼저 사람의 '신화'를 극복하고, 진실로 위로를 건넬 수 있길 바란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몰라주더라도, 최소한 내 눈앞에 있는 그 사람만큼은 내가 그를 진심으로 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줄 것이다. 그 사람이 그것만을 위해 수많은 감정과 돈을 지불하며 세션에 참가했던 것처럼, 치료에 참가하는 사람도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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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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