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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불행’이라는 말에는 언제나 의아심이 들었고 그 의아심은 곧장 반항심으로 이어졌다. 주어진 불행을 그저 ‘불행’이라 칭하고 싶지 않았다. 더 알맞은 말이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나를 결코 불행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불행일까? 무엇을 불행이라 칭할 수 있을까? 아마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심기를 조금만 건드려도 불행으로 치부해버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종일 마가 낀 듯이 연속적인 불행을 맞닥뜨려도 액땜했다며 넘겨버리는 사람도 있다. 나는 보통 후자에 속하는 편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보다 더 나빠질 수 없다는 희망. 불행에 쉽게 꺾이지 않기 위한 치기.


행복의 반대말은 의심할 여지 없이 불행일 것이다. 행복하지 않다는 불행의 뜻풀이는 행복과 불행이 반대의 지향성을 갖는 데 충분한 근거가 된다. 그런데 자꾸만 이상한 반발심이 든다. 내 앞에 펼쳐진 행복 아닌 상황들을 단순히 불행으로 단정 짓고 싶진 않다는.


삶이 늘 행복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늘 불행한 것도 아니다. 매일이 극도로 행복하다거나 극도로 불행하기엔 어려움이 있는데도 우리는 조금만 힘들어도 불행하다고 쉽게 뱉어버린다. 아마 감정의 허물을 벗기고 나면 별거 아닌 이야기도 당시 자신에겐 가장 큰 사건으로 다가오기에 그렇게 표현해버리는 것일 테다. 그래선지 불행이라는 말 자체에 거품이 껴있는 느낌이다.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불행을 보통의 날들에서 조금 벗어나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는 이유로 쓰기에는 다분히 압도적인 단어 같다. 하루하루 다를 수밖에 없지 않나. 누군가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불행이 있어야만 인생이 쫄깃해질 수 있다. 죽을 것 같이 불행하다가도 그 경계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다고 느끼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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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자정, 오늘 잠들기는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가슴이 심하게 답답했던 일이 있었다. 이런. ‘그’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내게는 삶이 안정적인 궤도를 탔다 싶으면 기어코 충돌해오는 얄미운 운석 같은 순간들이 있다. 그 안정성의 원인이 풍요로운 현재 상태에 대한 안주인 것인지 꺼뜨리기 힘든 권태에서 비롯되는 무기력에선지 정확히 따질 순 없었지만, 이러나저러나 나는 꽤 안정적인 일상을 지내고 있었다. 내일의 일정을 체크하고 잠드려는 순간, 문득 ‘설마’하는 마음이 들었다. 제길, 이런 순간은 대비라는 걸 불가능하게 한다. 어떻게 했어도 피하지 못했을 거라는 마음이 망연자실하게 한다.


새롭게 구한 일자리에 두 번째 출근을 앞둔 전날 밤이었다. 오픈, 미들, 마감으로 나누어진 스케줄을 착각하고 싶지 않아서 알람을 맞추고 다시 한번 더 스케줄을 체크했다. 그때,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어제 잡은 일본여행 날짜에 나 출근인 것 같은데?’ 처음엔 현실부정이었고 곧바로 찾아온 건 기분 나쁜 두근거림이었다. ‘너무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케줄을 착각한 잘못은 물론 나에게 있었지만, 나라고 대책 없이 일본여행을 잡은 건 아니었다. 지각이나 결근에 민감해서 출근하지 않는 동안 하루에도 5번도 넘게 스케줄을 들여다 봤었다. 처음부터 마감 스케줄이 있을 것이라곤 생각 못 했고 눈에 잘 띄지 않는 회색 칠에 영어로 ‘closed’라고 써있는 네모칸에 주의를 두지 못했다.

 

이 모든걸 알아채기 전에는 쉬지 않고 알바를 해와서 3일이 넘는 자유시간을 가져본 지 오래였는데 딱 4일 정도의 시간이 비는 것 같길래 엄마에게 곧장 일본여행을 가자고 말한 뒤였다. 평소 여행을 즐기지 않는 엄마가 처음으로 말한 일본이었고, 나는 어떻게든 이 시간을 엄마와 보내고 싶었다. 설상가상 어찌나 서둘렀는지 결정하자마자 부랴부랴 모든 예약을 완료했다. 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전’날 밤에.

 

내 부분에 표시되어있는 ‘closed’를 마감으로 고쳐 읽으니 여행을 잡은 일자의 3일이 출근이었다.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엄마와 여행 취소와 그렇지 않았을 경우 팀원분들께 끼칠 수 있는 피해, 어느 쪽을 선택해도 불행할 것 같은 결말에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었다. 다음날 출근이라 일찍 자야 했지만, 결코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이럴 땐 엄마 옆에 가서 누우면 잘 자는데 이 모든 사실을 여행 갈 생각으로 들뜬 엄마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출근해야 한다고 하면 나를 위해 수수료를 내서라도 여행을 취소할 엄마라는 걸 알았기에, 괜찮은 척해도 어느 정도의 상심을 부단히 숨길 엄마가 눈에 선연했기에 이 밤은 우선 나 혼자 이겨내야 했다. 아득했다. 버텨내야 할 이 새벽이. 8시간 뒤의 출근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나는 똑바로 누워서 내 심장을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마음이 힘들어 잠 못 이룰 때 엄마 곁에 누우면 내 등을 토닥거려줬던 엄마의 손길을 떠올리면서 나를 안심시켰다. 신기하게도 효과가 있었다.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 쪼그라드는 나를 토닥거림 몇 번으로 주물러줬고 그 뒤에 나는 조금씩 팽창했다. 원래의 모습으로 차츰차츰 돌아가려 애썼다. 그리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만 해결된다면 이 뒤에 주어질 어떤 불행도 불행으로 느껴지지 않을 텐데. 전전긍긍하는 지금 이 상태를 이길 수 있는 불행은 앞으로 더 없을 텐데. 어떤 불행이 와도 삶이 감사하게 느껴질 텐데.’ 현재를 압도하는 불행 앞에서 나는 기어코 희망을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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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동물인 인간은 이 순간마저도, 이 순간 덕분에 깨달은 삶의 진리도, 어렵사리 얻어낸 곧은 태도도 며칠만 지나면 잊어버리고 만다. 우선 나조차도 그런다. 불행에서 벗어나면 다시 삶에 안주하게 되고 감사함은 일부로 자각해야만 겨우 붙잡고 있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제때 찾아오는 불행 덕분에 지독하리만치 잦게 깨달을 수 있다. 어떤 고난을 이겨내 왔는지 자꾸만 잊어버리는 무지한 인간에게 일상의 감사함을 느끼라고 주기적으로 불행을 던져주나 보다. 감사함을 깨달을 정도의 불행만. 딱 죽기 직전의 불행만.


행복과 불행에게 주연과 조연 역할을 부여한다면 사람들은 주연의 자리를 무엇에게 더 많이 줄까? 아무래도 삶의 목적은 으레 행복으로 모이니까 불행은 악역의 조연이려나. 행복을 방해하는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불행이 행복에 도움을 주는 것도 무시못하는 사실이다. 하고 싶은 걸 참고 일하는 평일이 있기에 참아왔던 걸 할 수 있는 주말이 더 달달하게 느껴지듯이 내 마음대로 어쩌지 못하는 불행이라는 존재가 있기에 내가 내 의지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행복을 마주할 때 제대로 행복할 수 있다. 불행이 행복을 빛나게 해준다.


행복이 계속되면 무기력해진다. 가정이 아닌 사실이다. 물론 저마다 행복의 기준이나 크기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행복은 불행만큼이나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세상 모든 단어 중에서 추상적이기 그지없는 데 다섯 손가락 안에 뽑히는 이 단어들은 그럼에도 언제나 나를 살게 한다. 행복과 불행이 주고받는 핑퐁 속에서 우여곡절을 그리며 튕겨지는 탁구공 같은 나는 단순히 지금 느끼는 좋음과 나쁨을 복잡하게 표현하고 싶지 않을 때 행복과 불행의 말을 고른다. 행복은 마주칠 때 그냥 누린다면 불행한 일이 생길 때는 지치지도 않고 불행에 도전장을 내민다. 아직 내게 불행까지 할 만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감히 내 인생에 쉽게 들어올 생각은 말라고. 그게 진짜 불행한 일이었어도 말이다. 불행은 만만치 않다. 내가 편히 거들먹거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진짜 불행하기 직전까지만 마음이 가난해지기 때문에 내가 내일을 살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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