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이상하게 느껴진 일이 있다.
우리는 다양한 순간에 감정들을 느낀다. 붉게 일렁이는 저녁 노을을 보고 아련한 감동을 느끼거나 오랜 시간 줄을 서서 먹은 맛집의 요리에 호들갑을 떨기도 하고, 새로 산 바지의 핏에 기분 좋은 자신감을 얻기도 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는구나. 경험해보고 즐겼다면 그것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너무나 당연하게 느껴지는 이 명제가 적용이 되지 않는 분야가 있다. 바로 예술이다.
예술영화를 보거나 미술작품을 관람하고 나왔을 때, 좋았냐고 물으면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대답은 이렇다. 무얼 말하고자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재미를 물었는데 이해로 대답하는 이 현상이 때로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럼에도 나 또한 이 감정을 느껴본 적이 있기에 마냥 이상하지는 않았다. 해당 작품에 대해 사소한 부분까지 모두 설명할 수 없다면, 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결국은 좋아한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영화 리뷰를 보면, 난해한 영화일수록 좋은 평가를 내린 리뷰에 다 이해하지도 못했으면서 아는 척 한다는 댓글이 꼭 달려있고, 현대미술에 관한 게시물에는 (그들이 보기에) 아무 의미 없는 이런 짓거리를 좋다고 하는 것은 허세라는 식의 말이 쓰여 있기도 한다.
우선 이해와 재미의 상관관계에 관해서는 차치하고, 예술의 이해라는 부분에 관해 생각해보았다. 해당 예술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안다는 것은 가능한 일일까?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다. 우선 어떤 것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라고 말하려면 무엇이 맞고 틀린지 정답과 오답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정해진 기준이 있어야 정말 다 알고 있는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다시 두 가지 경우가 생긴다. 작품은 예술가의 손을 떠난 순간 관람자의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를 열어 두어야한다는 시각과, 예술가의 의도가 가장 중요하고 그것만이 유일하게 허락되는 해석이라는 시각이다. 전자는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 창작자의 손을 떠난 예술은 각 개인의 경험과 생각에 따라 새롭게 창조되고 해석되기에, 관람객이 느끼는 것이 무엇이든 맞는 해석일 것이다. 후자의 경우는 ‘정답’은 존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관람객이 창작자의 의도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들은 독심술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평론가 같은 전문가들이 여러 관점에서 그것을 ‘해석’하겠지만, 예술가 본인이 작품의 구성부터 완성까지 모든 것을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 이상 타인이 과대 해석도 축소도 없이 완벽한 정답을 내놓는 것은 불가능하다. 혹여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해도, 시간이 흐른 후 예술가가 본인의 작품에 대한 시각이 바뀌었다고 하면 그 때가서 정답도 바꾸어야 할까? 완벽한 이해라는 것은 어쩌면 허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따라 올지도 모른다. 결국 정답이란 게 없다면, 소위 평론가라는 자들의 말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말이다. 예술에 회의적인 많은 이들은 그들의 해석을 ‘꿈보다 해몽’이라 말하기도 한다. 만약 어떤 평론이 과시를 위하여 무작정 어려운 단어만 남발하며 근거 없이 의미 없는 주장만을 이어간다면 이는 꿈보다 해몽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평론은 허세를 위한 것이 아니다. 예술은 단 하나의 정답만 가지는 문제가 아니기에,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이런 해석에 논리적인 이유와 근거를 찾아서 작품의 맥락을 제공하는 것이 일반적인 평론가들이 하는 일이다. 이를 통해 관람객들은 해당 작품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거나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어진다. 만약 내가 했던 생각과 평론가의 해석이 다르다면 내가 틀린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늘 그렇듯 예술에는 정답이 없다. 그들도 하나의 해석을 제공하는 사람일 뿐, 답을 주는 사람은 아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 <호프>에 대한 한 평론가의 평이 큰 화제를 일으켰다. 해당 영화에 이렇게나 높은 별점을 준 것이 말이 되냐는 논란이었다. 왜 사람들은 평론가가 본인의 생각보다 높거나 낮은 평점을 줄 때 허세, 혹은 대중에 대한 무시 라고 받아들이는 걸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나의 취향이 맞다는 확인을 받고 싶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좋은 평론을 위해서는 예술은 물론 철학과 심리, 그리고 사회적 이슈까지 아우르는 깊은 관점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들을 긍정적이든 아니든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그런 사람이 나와 다른 의견을 낼 때, 누군가는 자신의 취향이 왜인지 수준 낮은 것으로 치부되는 느낌을 받았을지 모른다. 선생님이 시험지를 채점하며 틀린 문제에 줄을 좍 긋는 상황이 떠오른다.
그러나 불쾌할 이유가 전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예술에는 정답이 없다.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리는 것이 그 증거이다. 오랜 시간 공부하고 여러 논리에 따라 해석을 내놓지만, 그 또한 한 사람의 개인적인 의견일 뿐이다. 그들과 의견이 같다면, 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던 느낌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해석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읽으면 된다. 의견이 다르다면 오히려 좋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때 오히려 더 흥미롭고 많은 담론이 오갈 수 있는 상황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의 해석에 흥미가 없다면 더욱 쉽다. 간단하게 나에게 재미있었던게 좋은 영화이니 그들의 의견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
나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멀홀랜드 드라이브>라는 영화를 아주 좋아한다. 처음 보면 아주 난해하게 느껴지는 영화로 여러 번 보아도 완벽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난 이 영화 안의 모든 것을 사랑했다. 전개방식, 미술, 분위기 등등 모두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해하지 못했어도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나에게 각인 시켜준 영화였다. 후에 이 영화에 대한 해석이 궁금하여 평론가의 해설을 찾아보았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영화라며, 보이는 그대로 해석해주었다. 나는 그 해설을 받아들였을까? 결론은, 아니다. 왜냐면 나는 그 영화가 더 많은 것을 숨기고 있다고 느끼는게 더 재미있게 느껴졌고, 실제로 더 숨기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해석에는 평론가도 감독도 반대할 수 없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으니까 말이다.
평론가의 평에 건강한 담론이 아닌 무의미한 논란이 따라오는 것은 어쩌면 우리들이 예술에는 올바른 해석이 존재하고, 그를 완벽히 수행해야만 좋고 싫음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노을이 아름답다고 말할 때 노을의 과학적 원리에 대해 모르면서 왜 좋다고 말하냐고 하지 않는 것처럼, 한 예술에 아름다움 혹은 지루함을 느끼는 것에 꼭 완벽한 해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즐길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