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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무대는 새하얗다. 시신의 얼굴을 덮는 흰 멱목처럼, 감정을 잠시 가려둔다.

   

그 위에서 누나 어진과 동생 도진은 엄마의 장례식을 치른다. 두 배우는 자식으로, 때로는 엄마가 되어 기억을 재현하며, 서로 다른 시선으로 같은 시간을 복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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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나의 죽음을 애도하기>는 엄마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장례식장에서 마주한 남매의 서로 다른 태도를 따라간다. 엄마는 무대 위에서 하나의 실체로 서기보다, 남매 각자의 기억 속에서 재구성된다. 이 장치는 작품의 제목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왜 ‘엄마의 죽음’이 아니라 ‘나의 죽음’일까.

 

 


나를 애도하기


 

장례식은 누구의 공간일까. 고인을 위한 자리라고 믿어왔지만, 이 작품은 조심스럽게 균열을 낸다.

 

장례식장을 찾는 조문객은 대부분 고인의 손님이라기보다 상주의 손님에 가깝다. 그들은 고인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리고 남겨진 이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온다. 장례식은 이미 떠난 이를 위한 자리가 아니라, 남겨진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시험받는 공간에 가깝다.


그곳에서 자연스럽게 내가 가게 될 장례식과 나의 장례식을 떠올린다. 얼마나 울어야 충분한 슬픔이 될까. 얼마나 담담해야 성숙해 보일까. 장례식은 슬픔을 표현하는 자리이면서 동시에, 나의 태도를 점검받는 공간이 된다. 그래서 이 작품의 제목은 낯설면서도 정확하다. 우리는 ‘엄마의 죽음’이 아닌, 그 죽음 앞에서 흔들리는 ‘나’를 애도한다.


어진과 도진은 같은 상실 앞에 서 있지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감당한다. 그 차이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문득 깨닫는다. 애도는 고인을 향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철저히 살아 있는 사람의 문제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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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이 극이 내내 무겁게만 흐르지는 않는다. 어진과 도진은 장례식장 안에서도 티격태격한다. 말 한마디에 감정이 상하고, 사소한 기억을 두고 엇갈린다. 현실 남매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들 속에서 객석에서는 작은 웃음이 흐른다.


웃음은 슬픔을 희석하는 대신, 관계를 선명하게 만든다. 상실은 거창한 비극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말투와 태도 속에서도 드러난다. 그래서 이 장례식은 생활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눈물로 애도하기


 

도진은 울지 않는 어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의 눈에 누나의 침묵은 회피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진은 ‘울지 않는 사람’이기 이전에, 장녀다. 엄마 곁에서 가장 가까이 서 있던 사람. 동생의 기억 속에서 엄마는 다정하고, 멋진 커리어 우먼이었다. 그러나 누나의 기억 속에 그녀는 불안하고, 자신이 떠날까 두려워했으며 인정받고 싶어 했던 사람.

 

어쩌면 어진은 엄마의 강함뿐 아니라, 그 강함 뒤에 숨겨진 균열까지 함께 보아온 딸이다. 그래서 어진의 침묵은 무감각이 아니라, 가장 오래 역할을 수행해 온 사람의 태도에 가깝다.


그렇다면 울지 않는 것은 무감각이 아니라,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장례식장에서 가장 먼저 무너질 수 없는 사람은 누나인 어진이다.

 

그녀는 슬픔보다 먼저 책임을 붙들어 눈물은 나중의 일로 미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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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울음을 애도의 기준으로 삼아왔을까. 울지 않으면 차갑고, 덜 슬픈 사람처럼 보인다. 장례식은 슬픔을 허용하지만, 동시에 슬픔의 수위를 조절한다. 작품은 그 조절의 순간을 정확히 포착한다.


극 중 “지구상의 어떤 곳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며칠 동안 축제를 열기도 한다”라는 대사는 애도의 절대적 기준이 존재하지 않음을 환기한다. 누군가는 침묵 속에서 견디고, 누군가는 감정을 쏟아내며 떠나보낸다. 그 어떤 방식도 옳거나 그르다고 단정할 수 없다.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잘 슬퍼하는 법’이 아니라, 각자의 속도로 이 시간을 건너는 과정이다.

 

 


마음에 담아두고 영원하기


 

극 중 도진은 말한다.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아두면, 사라지지 않는다고.

 

우리는 그런 말을 믿으며 살아간다. 삶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기억만은 영원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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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말하는 영원은 변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계속해서 다시 해석되는 과정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1인 2역이라는 설정은 기억이 보존이 아니라 재해석임을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도진이 재현하는 엄마가 기억 속에 박제된 다정하고 강인한 상징이라면, 어진의 몸을 빌려 나온 엄마는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비릿한 실존이다.

 

배우들은 자식과 엄마를 오가는 과제 속에서도 기억의 주관성을 무대 위에 성공적으로 구현해 낸다. 무대 위 엄마는 하나의 실체라기보다, 남겨진 자가 계속해서 다시 만들어가는 형상에 가깝다. 기억은 고정된 채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달라진다.

 

*

 

<나의 죽음을 애도하기>는 엄마의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끝내 우리 자신의 시간을 비춘다. 울지 못하는 자신, 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신, 서로를 오해하는 순간들. 작품은 타인의 부재를 빌려, 그것을 통과해야 할 ‘나’의 모습을 비춘다.

 

그래서 연극을 보고 나오며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행위가 결국 ‘나’라는 존재를 애도하는 과정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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