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제 성장하는가. 생물학적으로 대답하자면 수정 직후부터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수정란이 된 후부터(그 자체를 인간으로 여길 수 있다면) 세포덩어리인 인간은 끝없이 분열하며 자라난다. 그렇게 태어나서 성장하던 인간의 육체는 스무 살을 전후로 하여 자라나길 멈추고, 상태를 유지하다가, 점차 죽어간다. 그러니까 보통의 인간은 스무 해 정도를 각자의 속도로 끝없이 성장해가는 것.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보자. 어떤 경우 인간의 정신은(혹은 영혼은) 성장하는가. 육체성과 별개로 인간은 마음도 자란다. 다만 그 성장이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찾아오는 것은 아니며, 그 속도와 시기가 육체의 성장 단계와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우리의 삶에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 언제 어떤 사건을 계기로 자라나거나 무너지는 일들의 기록, 우리는 그것을 이야기라고 한다. 세상 모든 이야기는 결국 성장담이거나, 성장 실패담이다.
조 라이트의 영화 <어톤먼트>(2008)을 본다.
너무 빨리 자란 소녀
1935년 영국. 부유한 집안의 딸 브라이오니(시얼샤 로넌)는 너무 빨리 성장한(적어도 스스로 그렇다고 믿는) 소녀다. 어린 나이지만 그녀는 벌써 여러 차례 자신만의 희곡을 창작했는데, 글을 쓰는 그녀의 뒤로 경의를 표하듯 대열을 맞춰 배치된 동물 모형들은 그녀가 자신의 위치를 어디쯤으로 인식하고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실제로 그녀는 또래의 사촌들에게 ‘분별 있는 사랑’에 대해 다룬 자신의 연극을 이해시키려고 한다. 그러니까 브라이오니는 자신이 가진 분별력을 철저히 믿고 의지하는 소녀다. (정작 어른들은 그녀의 희곡에 무관심하지만.)
스스로 사랑의 분별사라고 믿기에 브라이오니에게 사랑이란 엄숙히 분별된 어떤 감정, 숭고하고 아름다운 동경의 영역이 돼야만 할 테다. 예컨대 언니인 세실리아(키이라 나이틀리)와 가정부의 아들 로비(제임스 맥어보이) 사이에 발생하고 있는 오묘한 감정―사랑을 느끼지만 신분의 차이로 그 마음을 표현할 수 없는 상태―을 브라이오니는 이해할 수 없는 것. 언젠가부터 로비와의 관계가 서먹해진 이유에 대한 세실리아의 모호한 대답(“그냥 다른 삶을 살 뿐이야”)이 브라이오니에게는 도저히 사랑의 흔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말하건대, 사랑은 숭고하고 아름다워야 한다. 그러니 로비가 세실리아에게 쓴 편지는, 비록 그것이 로비의 천진함에서 비롯된 혼자만의 농담이었다고 해도, 결코 용납될 수는 없다. 브라이오니에게 사랑은 천박한 농담을 주고받아 확인될 수는 없는 것이며, 천박한 농담을 하는 남자가 언니의 사랑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되기에, 편지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격정적으로 몸을 섞고 있는 로비와 언니를 목격한 브라이오니는 거대한 충격에 휩싸인다.
대체로 정신의 성장은 충격적인 사건 이후에 일어난다. 다만 모든 사건이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서 성장을 위한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 혹은 이미 충분히 자랐다고 믿으며 스스로 성장을 포기할 때 전혀 다른 결과가 발생한다. 섬세한 소녀가 목격한 로비와 언니의 정사 장면은 받아들일 수 없는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녀 역시 한때 로비에게 연민을 품었던 미성숙한 소녀였으므로, 강렬한 그 충격은 분노 혹은 복수라는 형태로 쉽게 모습을 바꾼다. 덜 성장한 소녀는 성장을 거부한 채 혼란 속에서 분노의 씨앗을 뿌리고, 이 씨앗은 사나운 재앙으로 빠르게 자라난다.
무고한 죄와 끔찍한 벌
브라이오니가 성급하게 뿌린 분노의 씨앗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다. 두 자매의 오빠인 리온(패트릭 케네디)이 돌아와 파티를 준비하던 저녁 시간, 돌아오지 않는 두 쌍둥이를 찾아 모두가 흩어진 틈에 사촌인 로라(주노 템플)가 어두운 숲속에서 성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끔찍한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였던 브라이오니는 로비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확신에 찬 브라이오니의 증언으로 인해 로비는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체포된다.
리온의 친구인 폴(베네딕트 컴버배치)이 로라를 향해 보내던 음흉한 시선과 어둠 속에서 쌍둥이를 찾아 데리고 오던 다정한 로비의 모습을 대비해 보여주면서 영화는 우리에게 로비에 대한 심리적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우리는 이성―어른의 관점에서 사건을 관찰하며 진짜 범인이 누구일지 알아챌 수 있다. 그러나 미성숙한 소녀의 눈에는 이 사건이 언니를 탐하는 음란한 괴물인 로비에 대한 응징의 기회처럼 느껴졌을 것. 아주 순결한 복수심으로, 브라이오니는 마음대로 확정한 로비의 죄를 성급하게 처벌하는 죄를 범하고 만다.
모두가 로비의 범죄를 확신하는 상황. 유일하게 로비의 무죄를 주장하는 세실리아가 마치 스크린 바깥의 관객을 향하는 듯 진술하는 내용은 의미심장하다. “브라이오니가 하는 말 전부 믿지 마세요. 상상력이 풍부하니까요.” 어른이 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상상을 사실과 질서가 진압하는 이성의 세계에 입장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지만, 정작 한 소녀의 상상력이 누군가의 삶을 흔들고 파괴하도록 성급히 용인하는 곳이 어른의 세계라는 것. 우리가 믿고 있는 이성―어른의 세계조차 그토록 연약하고 미성숙하다는 것. 그러므로 죄가 아닌 죄를 벌하는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어른이 된 우리 역시 매일 성장해야 한다는 것.
그날의 사건으로 체포돼 수감생활을 하던 로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고, 억울하게 사랑을 잃고 마음에 상처를 입은 세실리아는 가족을 떠나 간호사로 봉사하며 로비를 기다린다. 어느 날 잠깐 재회하여 서로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또 다시 생사조차 알 수 없을 긴 이별을 맞이한다. 영화는 이별 후 로비가 겪게 되는 끔찍한 전쟁의 참상을 많은 시간을 할애해 자세히 보여주는데, 이는 브라이오니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은 후의 시공간이 삶과 죽음이 엇갈리는 끔찍한 지옥과 다름없다는 은유처럼 느껴진다. 매일이 죽음에 가깝지만, 당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 고통스럽게 살아남아야 하는 날들의 반복. 사랑은 숭고하지 않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가장 처절한 고통이 된다. 그것은 미성숙한 소녀가 결코 알지 못했던 사랑의 다른 모습이다.
마침내 성장이 멈췄을 때
한편 성인이 된 브라이오니(로몰라 가레이)는 자신이 저질렀던 죄를 뉘우치는 마음으로 간호사가 되어 봉사하며 살아간다. 끔찍한 죽음들을 목격하며 지내던 어느 날, 성폭행의 피해자였던 로라와 진짜 범인인 폴의 결혼식을 목격한 브라이오니는 지난날 자신이 고통에 빠뜨렸던 로비와 세실리아에게 사죄하기 위해 그들을 찾아간다. 마침내 로비와 세실리아를 다시 만나 마침내 용서를 구할 때 브라이오니의 얼굴에 드리운 것은 낙인처럼 새겨진 슬픔이다. 그녀는 두 사람만큼이나 거대한 고통을 긴 시간 홀로 앓아왔던 것. 누구보다 섬세한 감성을 지녔던 브라이오니였으므로, 두 사람이 견뎌온 그 고통의 시간을, 아마도 멀리서 함께 느끼면서 살아내고 있었을 테다. 집을 나선 브라이오니의 등 뒤로 두 사람은 뜨겁게 키스를 나누는데, 그것은 그녀에 의해서 미뤄져야 했던 사랑의 분출이자, 결코 막아서지 말아야 했던 긴 시간의 보상이다. 브라이오니는 이제 그들의 육체를 막지 않는다.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인간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 몇 차례 성장하고, 대체로 처절하게 실패한다. 이러한 실패는 어른이 돼서도 겪는 흔한 정신적 성장통이다. 그렇다면 그날의 브라이오니가 저질렀던 행위 역시 서툰 실수나 악의적인 복수가 아니라, 어른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실패했던 소녀가 경험한 성장담으로 읽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타인의 삶에 지옥을 열어버릴 정도의 끔찍한 실패, 무섭게 닥쳐오는 통증을 오래도록 앓은 후에야 우리는 겨우 성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한 소녀의 성장을 위해 두 사람의 일생을 소모하는 일은 지나치게 가혹하지만.
다채로운 사랑의 경험 없이 사랑에 대해 너무 빨리 자라려고 했던 소녀는 미뤄둔 성장을 생애에 걸쳐 천천히 달성해내야 한다. 브라이오니는 평생을 들여서, 천천히 또 오래도록 아프고 앓으면서, 두 사람에게 차마 전하지 못했던 사과문을 마침내 탈고한다. 그녀가 쓴 마지막 소설은 그녀를 앓게 했던 어린 시절의 상상력이 어른의 세계에 진입한 후에 아프도록 성장한 결과물일 테다. 그녀의 성장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다다라서야 끝났다. 성장이 완전히 멈추면 죽음이 시작된다. 평생에 걸쳐 성장통을 앓았을 그녀는 이제 빠르게 죽어갈 것이다. 섬세한 사람은 고통을 죽음보다 더 크게 감각하므로, 그녀에게는 차라리 죽음이 편안할 것이다. 영화가 끝난 후 나는 역시나 그녀를 온전히 용서할 수는 없었지만, 어떤 관객은, 어쩌면 세실리아와 로비는, 혹은 그녀 자신은 이제 그녀를 용서할 것이다. 그렇게 어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