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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하고 기쁘게.”

 

평안할 정, 기쁠 희. 연극 <정희>는 이 짧은 인사를 그저 스쳐 지나가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참 도달하기 힘든 삶의 어떤 경지로 그려낸다. 그리고 그 평온함에 닿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관객에게 조용히, 그러면서도 끈질기게 묻는다.


이 작품은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외전 격으로 시작하지만, 원작의 감동을 그대로 흉내 내기보다는 그 세계관의 빈틈을 파고든다. 이야기의 중심은 ‘정희’다. 원작에서는 주인공 곁을 지키던 인물이었지만, 이번 무대에서는 자신의 시간과 선택, 그리고 꾹꾹 눌러 담아왔던 감정들을 스스로 마주하는 주인공으로 우뚝 선다. 이건 단순히 캐릭터 비중을 늘린 게 아니다.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이라는 원작의 물음을 또 다른 각도에서 다시 써 내려간 시도다.

 

 

 

더 단단한 벽을 쌓는 대신 기꺼이 허무는 일


 

극의 배경인 ‘정희네’는 낡은 술집이자 무언가를 고치는 공간이다. 세면대에서 물이 새고 벽에 금이 가는 사소한 고장들이 일상으로 번지는 모습은, 우리가 삶에서 겪는 문제들과 참 많이 닮아 있다. 사실 거대한 균열도 처음부터 컸던 건 아니다. “나중에”라며 미뤄둔 작은 틈들이 쌓여 어느 순간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되곤 한다. 이때 젊은 수리공 ‘가람’이 나타난다. 가람은 고장 난 곳을 손보는 사람인 동시에, 정희가 외면해온 삶의 문제들을 똑바로 바라보게 만드는 인물이다.


여기서 ‘수리’라는 행위가 주는 의미를 눈여겨봐야 한다. 수리는 예전 모습 그대로 되돌리는 것과는 다르다. 완전히 새것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깨진 흔적을 그대로 품은 채 다시 쓸 수 있게 만드는 일이다. 상처를 없애는 게 아니라 상처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에 가깝다. 그저 아픔을 잊으라고 말하는 흔한 위로와는 결이 다르다. <정희>는 문제를 단칼에 해결하거나 이겨내라고 등 떠밀지 않는다. 대신 그 아픔을 견디며 함께 지나가는 과정 그 자체를 소중히 다룬다.


이런 고민은 무대 위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현재와 과거의 인물들이 한 공간에서 교차하며 연기하는데, 이는 과거가 그저 지나간 일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삶에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옛 기억이 지금의 선택을 만들고, 지금의 내 기분이 과거의 의미를 바꾸기도 한다. 이렇게 시간의 층을 무대 위에 직접 쌓아 올리는 방식은 영화나 드라마와는 다른 연극만의 매력이다.


특히 망치로 벽을 부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음악에 맞춰 반복되는 망치질은 단순히 볼거리를 넘어 작품이 하고 싶은 말을 응축해서 보여준다. 꽉 막힌 공간을 터서 새로운 길을 만드는 건, 단절되었던 관계가 다시 이어지는 모습과 겹쳐 보인다. 우리는 보통 자신을 지키려고 더 단단한 벽을 쌓곤 하지만, 연극은 오히려 그 벽을 허물어야 변화가 시작된다고 속삭인다.


이 장면은 요즘 우리 사회의 모습도 떠올리게 한다. 나이나 형편, 경험이 다르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서로를 밀어내고, 이해하려 애쓰기보다는 거리를 두는 게 더 익숙해진 세상이기 때문이다. 빠르게 판단하고 관계를 끊어내는 게 편할 순 있어도, 그만큼 마음의 깊이는 얕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무언가를 ‘고친다’는 건 참 느리고 번거로운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느리고 반복적인 수고 속에서만 피어나는 관계도 분명히 존재한다.


작품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마음의 금을 안고 ‘정희네’로 모여든다. 그리고 그곳에서 서로의 모습을 비춰본다. 누군가 대단한 영웅이 나타나 구원해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서로의 삶에 아주 작은 변화를 일으킬 뿐이다. 원작이 그랬듯이, 이 작품도 거창한 결말 대신 작은 감정의 움직임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그 미세한 떨림들이 모여 결국 인물들을, 그리고 지켜보는 우리를 전혀 다른 곳으로 이끌어간다.

 

 


갓 지은 밥 냄새처럼, 누군가를 안심시키는 온도로


 

연극이 끝나고 나면 뜻밖의 사소한 질문 하나가 마음속에 남는다.

 

“나는 어떤 냄새가 나는 사람이면 좋을까.”

 

극 중에 나오는 ‘갓 지은 밥 냄새’는 참 따스하다. 화려하진 않지만 누군가를 안심시키고 곁에 머물게 하는 냄새다. 이건 결국 내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는 늘 얼마나 성공했는지, 얼마나 빠른지 같은 눈에 보이는 결과에만 매달리며 살지만, 정작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온도로 남아 있는지는 잊고 살 때가 많다.


연극 <정희>는 그 지점을 조용히 건드려준다. 더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더 오래 곁을 지키는 사람이 되는 법, 더 강해지는 게 아니라 더 따뜻해지는 법을 말한다. 그리고 그건 대단한 결심이 아니라, 내 삶의 작은 균열을 모른 척하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된다고 응원해 준다.

 

결국 이 작품이 던지는 질문은 하나로 모인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고치며 살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끝내 모른 척 남겨두고 있는가?


“평안하고 기쁘게.”

 

이 말이 그저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가 직접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모습이 되려면, 지금 우리를 가로막은 벽을 어디까지 허물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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