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리백. 더러운 몰골을 한 사람, 지저분한 짐승 혹은 싸구려 숙박업소. 영어권에선 Fleabag era를 여성의 구질구질한 시기 그 자체로 부르기도 한다니, 플리백이란 그야말로 하찮은 모든 존재를 대변하는 고유 명사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너무하다는 생각은 든다. 이름조차 없이 그저 플리백. 한 사람을 쓰레기라고 부를 필요까지 있었는지.
하지만 우리가 그녀를 플리백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건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의 강한 의지 때문인 것을, 그 모든 포효의 고백을 들어낸 뒤에야 알게 된다.
무대 위의 여자는 도저히 견딜 수 없다. 면접 자리의 긴장감을 이기지 못해 웃옷을 들추고,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다가도 코미디언처럼 농담 하고, 남자들의 싸구려 관심에 기꺼이 자신을 내던지다 때로는 그 관심을 위해 맹목적으로 변하기도 한다.
이제 그녀는 분류한다. 나에게 ‘남은 것’ 중 가장 튼튼하고 빛나는 게 뭘까. 친구의 죽음, 카페의 도산, 가족과의 불화 등 삶의 모든 것이 와해되는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남은 것 중 가장 튼튼하고, 빛나고, 쓸 만한 자신의 육체를 바라본다. 가진 것은 결국 젊은 신체뿐이라는, 다소 우울하고 치기 어린 젊은 여자의 결론은 결국 그녀가 그 스스로를 ‘싸구려 플리백’으로 정의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가 된다.
그녀의 행동을 묘사하자면, 그야말로 ‘과잉’이라고 밖엔 말할 수 없다. 걸음걸이조차 붕 떠 있는 느낌. 계속되는 불행 속에서 그녀는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붕 뜬 채 삶을 부유한다. 그 부유의 끝에 뭐가 있을지 모르는 상태로, 사실은 직면할수록 답 없는 미래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녀 자신도 알고 있기에, 그녀는 근시안적인 태도로 순간적인 쾌락과 웃음에만 기대어 근근이 삶을 살아낸다.
하지만 언제나 누구든 결국엔 제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법. 소리치고 깔깔 웃으며 부유하던 그녀는 아주 빠르게 현실의 바닥으로 침잠하게 되고, 토하듯 쏟아내는 그 자책엔 사무치는 죄책감이 있다.
하지만 솔직하게, 그녀의 행위에 무조건적인 이해와 지지를 보내는 관객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 예상한다. 난 그녀가 스스로를 그 정도로 자학하고 혐오하는 것에 공감한다.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캐릭터다. 그녀는 사랑하는 친구를 잃었고, 그 친구와 함께 운영했던 소중한 공간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으며, 친구가 누구보다 사랑했던 기니피그마저 자신과 관련한 문제로 잃게 됐다.
자신의 행적을 큰 목소리로 읊어대던 그녀가 마지막에서야 친구의 죽음이 자신의 행동 때문이었음을, 심지어는 이를 언니와의 대화를 인용하는 과정에서 관객에게 간접적으로 밝히게 된 점과, 용서받을 수 없는 자신의 행동을 ‘실수’라고 명명하며 죽은 친구의 말을 종종 인용하며 자기 합리화 하려 했던 부분은 관객의 입장에서 그녀가 그 스스로를 끔찍하게 혐오하는 것에 공감할 수 있게 돕는다. 그러니까 다시말해, 그녀가 비겁하다는 건 누구나 동의할 것이란 거다.
그렇지만, 또 아마 이러한 부분 때문에 <플리백>은 사랑받게 되는 것이다. 어떤 끔찍한 실수를 저지른 누군가는 비난받을 게 분명함에도 이를 고백하고 싶어 한다. 고백함으로써 털어내고 싶어 한다. 남들이 나의 끔찍함을 알게 되어 그들에게 비난받는 것보다 아무도 모르는 나의 끔찍함을 혼자 직면해야 하는 것이 분명 더 괴로우니까. 보이지 않는 제4의 벽을 허물고 자꾸 나에게 무언가를 고백하는 무대 위의 여자는 결국 자신의 실수를 나에게 고백하고 자유로워지고 싶고, 그녀의 끔찍한 실수들을 목격한 나는 어쩔 수 없이 잘 감춰둔 나의 실수들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의 끔찍함을 매개로 서로를 위안할 수밖에 없는 잘 짜인 <플리백>의 구조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토록 강제적인 연대의 사이클이라니. 그러니 어떻게 내가 그녀를 플리백이라 쉬이 부를 수 있겠는가. 혼자 외롭기보다 모두에게 비난받기를 선택한 그녀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얼굴에서 보이는 나의 얼굴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