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아주 조금은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세상 안에서의 확실한 내 자리를 찾는 것에 몰두하게 된다. 붐벼있는 세상의 지표 어딘가로부터 조금이라도 떠밀려있다는 생각이 들면 쉽게 불안해진다. 하루하루 나를 스쳐 가는 것들은 아주 많은데, 그걸 다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불안해진다. 삶의 깊이라는 건, 존재의 의미라는 건, 그렇게 좌표 위의 위치를 손가락으로 짚어내는 단순한 방식으로는 절대 정의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내가 어디에 위치해있고, 그 위치는 누구의 것과 비교하여 어느 정도로 낮고 높으며, 지금 내 손에 쥐어진 어떤 것들은 얼마에 환산될 수 있는지. 적어도 아직은, 젊음의 한 축에 속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지금의 나는, 매달리지 않으려고 하다가도 쉽게 매달리게 되는 그런 것들이 계속하여 혼란스럽다.
그래서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든다. 젊음이라는 건 그렇게 예찬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어쩌면 젊음이라는 것은, 그리고 청춘이라는 것은 젊은 시절의 내가 이 순간 정착하고 있는 그 좌표의 위치를 불만족하는 시기가 아니라, 좌표의 어느 지점을 정착할 만큼의 확신도 없기에 그저 그 위를 부유할 수밖에 없는 시기라고. 젊음, 청춘, 성장. 그런 이야기를 하고 들을 때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민망하지만, 그래도 결국 이에 골똘히 몰두하게 되는 것은 그것이 곧 내가 지금 겪어내고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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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바움백 감독의 <프란시스 하>를 보면서, 정말 모호한 기분에 휩싸였다. 결국 영화가 이야기하는 어른과 성장은 뭔가. 규격에 맞지 않는 틀에 나의 존재를 일부 접어내는 일? 삶의 중심에 위치하고자 했지만 그러지 못해서 중심과는 영 다른 곳에 위치하는 일? 그래서 결국 ‘프란시스 할러데이’가 아닌 ‘프란시스 하’가 되어 버리는 일? 그것도 아니라면, 나를 반기지 않는 삶과 협의하여 이 정도면 됐다, 하고 협소한 자리라도 얻어내는 일인 건가. 그렇다면 성장이라는 것은, 곧 타협과 포기를 의미하는 것일 텐데. 그렇게까지 우울해도 되는 걸까.
사실 알고 있다. 분명 알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렇게까지 모두가 외치는 답을 말할 필요는 없었잖아요. 자꾸만 누군가를 닦달하고 싶어졌다. 이상과 현실의 섬뜩한 괴리, 지지부진한 청춘, 흑백의 단조롭고 건조한 뉴욕의 풍경. 우울하고 괴로운 이야기인데도 자신의 이름을 기꺼이 접어 넣는 마지막 컷은 개운한 느낌이 들 만큼 발랄하다. 그러니까, 참 이상하다는 거다.
무용수를 꿈꾸는 젊은 여자는 둘도 없는 친구를 위해 남자 친구와 헤어지기까지 했음에도 저를 제외한 미래를 개척해 나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고, 직장에서는 무용단원이 아닌 사무직원이 될 것을 제안받아 무용복이 아닌 투피스의 정장을 입을 수밖에 없고, 충동적으로 떠난 파리 여행은 곧 있을 일자리 상담 때문에 이틀밖에 머무를 수 없다.
그럼에도 그 여자는 정장을 입고 점심시간 공원에서 춤을 추고, 동반자로 지내고자 했던 친구의 약혼자에게 진심을 담은 축하 인사를 건넨다. 돈이 없어 전전긍긍하다가도 조금의 세금 환급금을 받게 되자 이제 막 친해진 친구를 불러 밥을 사겠다고 한다. (그마저도 잘 안 풀려서 결국 한밤중에 현금지급기를 찾기 위해 온 동네를 뛰어다니지만, 어쨌든.) 어딘가 조금 이상하고 석연찮은 부분이 있음에도 프란시스는 미래를 포기하는 법이 없고, 삶을 포기하는 법이 없다. 가끔 치기 어린 충동을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온다. 해결하고자 애쓴다. 거처가 없어 떠돎에도 삶의 주도권을 동아줄 잡듯 꼭 붙잡고 있는, 낙천적인 태도 하나에 의지하여 그 위태로운 실망과 타협의 순간들을 부유하듯 버틴다.
![[크기변환][포맷변환]screencapture-netflix-watch-70257412-2024-10-15-01_43_12.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410/20241015020232_gnvvbyld.jpg)
![[크기변환][포맷변환]screencapture-netflix-watch-70257412-2024-10-15-01_43_18.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410/20241015020239_ebvbuqaf.jpg)
‘프란시스 할러데이’가 ‘프란시스 하’로 향하는 과정이 조금은 우울하고 비관적일지라도, 그녀는 끝까지 그 낙천적인 면모를 유지한다. 삶의 날카로움에 존재가 마모됨에도 그런 낙천성을 견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수밖에. 그러니까 결국, 프란시스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는 그 존재의 낙천성에 있었던 거다. 이렇다 할 어떤 멋진 것을 가지지 못했음에도, 아니 오히려 그런 것들을 가지지 못했기에 더욱 간절히 쥐고 있었어야만 하는 그 낙천적인 태도 말이다. 어쩌면 그건 젊음의 특권이기도 하다. 무한한 가능성만이 존재하고 어떤 것도 손에 쥐어지지 않는 젊음의 시기, 무엇이든 될 수 있기에 아무것도 될 수 없는 그 혼란의 시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겨우 그 태도만이 허락될 수 있다는 것.
그토록 바라던 무용수가 아닌 안무가로서의 첫 공연이 끝나고, 프란시스는 그토록 바라던 ‘눈 맞춤’ 로망을 실현한다. 그 모든 실망과 타협의 과정을 거쳐 도달한 그 외곽의 곳에서, 결국 그토록 바라던 어떤 것을 마주하게 된 그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토록 바라던 '누군가'는 되지 못했지만, 결국 ‘무엇’이라도 된 그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도착점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 모든 실망과 타협의 순간들이 지금의 완전한 순간을 만들어줬다는 생각에 남모를 뿌듯함을 느끼고 있을까. 설령 ‘내가 바라지 않은 삶일지라도 의미가 있다’라는 것이 영화의 메시지일지라도, 그곳에 감동하여 고개를 끄덕이고 싶진 않다. 그저 그 실망의 과정을 겪어내고도 웃고 있는 프란시스라는 존재의 표정을 유심히 바라보고만 싶을 뿐이다.
![[크기변환]common (1).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410/20241015020303_csygygxh.jpg)
어른이 되는 일이 곧 ‘프란시스 할러데이’가 아니라 ‘프란시스 하’로 살아가야 하는 일이라면. 세상이 허용하고 양보하여 내어준 삶의 영역이 겨우 그 정도 너비의 이름표만 하다면. 조금 우울하더라도 뭐 어쩌겠는가. 불편한 옷을 입고 공원에서 춤을 추는 수밖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고 있는 지금이 어쩌면 먼 훗날의 정착한 내가 그리워하는 순간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런 확실하지도 않은, 철없는 낙천성을 마음껏 부려보고 싶다. 설령 바보 같고 한심할 수 있어도, 어떤 춤이라도 한번 춰 보자고.
![[크기변환][포맷변환]screencapture-netflix-watch-70257412-2024-10-15-01_43_59.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410/20241015020321_dthhafgc.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