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째 내 곁을 지키고 있는, 가치관과 성향이 비슷하며 함께할 때 누구보다 편안하고 안정적인 누군가와, 나와는 모든 부분에서 정반대인 사람이지만 나를 불같이 타오르게 하고 충동적이게 하는 누군가. 둘 중 누구를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모니아 쇼크리의 <사랑의 탐구>는 사랑이라는 영원한 난제를 직면한 한 여인이 이를 풀어내고자 기꺼이 온몸을 내던지는 이야기다.
하지만 난제는 난제인 이유가 있는 법. 나와는 아주 다르기도, 가끔은 비슷하기도 한. 그렇기에 더더욱 미지인 누군가와 함께하기를 작심하고 그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말하는 일은 대충 생각해봐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영화가 끝나고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이 있다. '사랑할수록 외로워진다.' 출처도 기억나지 않는 이 문장이 떠올랐던 이유는 아마 양극단의 사랑에서 추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얼굴 위로 떠올랐던 외로움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사랑이라는,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이며 논리로는 납득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건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또다시, 사랑이라는 안온하고 안정적이며 믿음과 신뢰로 충만한 관계를 생각해본다. 그 어느 쪽이 진정한 사랑의 ‘본질’인지는 당연히 알 수 없다. 영화 <사랑의 탐구>도 마찬가지로, 온갖 철학자들이 언급했던 각자의 사랑 정의를 끌고 오며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려 보려는, 실패가 ‘의도된’ 실험을 한다. 10년째 함께하고 있는 파트너 자비에는 소피아와 아주 닮은 사람이다. 지적 수준도, 가치관도 유사하고 대화도 잘 통하는 사람, 평생을 함께하기에 적격인 사람이다. 하지만 불혹의 나이 40은 아직 삶의 평온을 따지기엔 젊은 나이였던 걸까. 그녀는 대화는 잘 통하지만 성적으로는 전혀 끌리지 않는 자비에와의 관계에서 일종의 결핍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권태와 결핍을 느끼던 와중 만난 인테리어 업자 실뱅은 자비에와 소피아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잔잔한 호수 같던 소피아의 마음을 순식간에 불같이 타오르게 한 치명적인 타인이다. 이성과 논리로 맞춰지던 그녀의 삶은 실뱅과의 만남을 통해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인, 본능에 충실한 삶으로 변모한다. 논리의 언어를 내뱉던 식자의 입은 난잡한 음담패설을 내뱉고, 10년이라는 신뢰의 관계를 쌓아온 파트너의 몸은 굳건해 보였던 관계를 직접 허무는 것과 같은, 완전히 새롭고 도발적인 방식으로.
사실 소피아는 로맨티시스트다. 그래서 문제다. 실뱅과의 밀회를 즐기며 그녀는 벅찬 목소리로 실뱅이야말로 운명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자비에와의 10년을 겪은 그녀가 느꼈을 감정이 권태라면, 사랑은 곧 권태임을 그녀는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로맨티시스트가 납득할 수 있는 문장이 못 된다. 때문에 그녀는 자신을 이토록 들뜨고 설레고 불안케 하는 누군가가 진짜 사랑의 대상이라고, 사랑이라는 것은 이렇게 정신 못 차릴 정도로 혼란한 것이라고, 권태의 사랑에 배반당한 로맨티시스트 소피아는 그만 성급한 답을 내려버리고 만 것이다.

하지만 비이성적이고 충동적이며 논리로는 납득될 수 없는, 그런 불가항력적인 감정은 사랑이라는 사건의 ‘시작’ 단계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다. 찰나의 강렬함은 영원할 수 없고, 권태는 찾아오기 마련이다. 에로스는 무너져야 하고 플라토닉이 사랑의 진정한 본질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에로스든 플라토닉이든, 결국 사랑의 본질은 아마 지극히 누군가의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에 달려있지 않은가, 하는 거다. 사랑의 짜릿한 강렬함도 좋고, 강렬함 이후의 권태도 인정한다. 그렇다면 그 관계를 지속할지, 아니면 중단할지를 결정하는 것이 결국 사랑의 본질 아닌가. 그렇기에 사랑이라는 것은 한 사람만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오롯한 선택의 몫이라는, 돌고 돌아 결국 나라는 존재에게로 회귀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사랑할수록 외로워진다는, 그 흔한 문장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미지 그 자체인 타인을 만나 그를 ‘사랑’ 한다고 말하는 일, 그 어렵고 버거운 일은 사실 나라는 존재의 모순과 결핍, 그리고 홀로 됨을 인정하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소피아는 자비에와의 관계를 통해 지루함을 느끼고 해방되고 싶어했지만, 실뱅과의 짜릿한 관계가 시들해지고 그와의 어긋남을 발견하자 다시 자비에와의 이성적이고 편안한 대화를 그리워한다. 자비에와 재회한 후엔 다시 실뱅과의 짜릿한 섹스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개 목줄과 촌스러운 란제리를 스스로 갖춰 입고 기꺼이 불순한 모양새가 된다. 안전하고 평온한 상태를 원하다가도 저급의 타락을 욕망한다. 모순 그 자체인 그 굴레는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렇게 이성과 본능, 지성과 육체. 양극단을 오가는 소피아의 사랑 실험은 모순 그 자체인 자기 존재에 대한 탐구가 된다.
결국 그렇다. <사랑의 탐구>는 사랑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긴 하지만, 사실 사랑을 하는 ‘나’에 대한 탐구다. 이토록 모순적이고 혼란한 나라는 존재. 나와 아주 비슷하기 때문에 지루한 누군가와 나와 아주 다르기 때문에 당황스러운 누군가. 결국 그 누군가들은 소피아의 입장에 입각하여 보는 다른 버전의 자기 존재이다. 사랑하기에 외로워진다는 것, 그것은 결국 사랑의 과정에서 보이는 나의 모순들을 필연적으로 마주해야 하기에 생기는 일이다.
이성적일 때의 나와 비이성적일 때의 나. 둘 중 무엇이 진짜 ‘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를 이성적으로 만들어주는 타인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나를 충동적으로 만들어주는 타인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은 미지의 타인을 대상으로 자기 존재의 탐구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은 외로움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모순은 동일하다는 것, 나라는 모순이 결국 사랑이라는 삶에 긴요한 관계에서도 전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아마도 삶에 대한, 그리고 인간에 대한 유의미한 통찰일 것이다. 정신이 나인지, 육체가 나인지. 생과 존재의 모순은 어디서 기인하는지. 이 같은 인류의 영원한 난제를 사랑이라는 유사한 관념에 내던진 것도,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이유에서 <사랑의 탐구>가 아쉬웠다. 나와는 아주 닮은 누군가와 나와는 아주 다른 누군가. 지성을 사용하는 화이트칼라와 육체를 사용하는 블루칼라. 진보와 극우. 고급과 저급 등등. 극단적인 틀에 맞춰진 양극단의 기표들이 불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사랑과 존재의 모순과 혼란을 표현하기 위해 이토록 계산된 양 끝을 제시할 필요 있었을까? 영혼과 육체의 모순을 표현하기 위해 이토록 치우친 정신적 사랑과 육체적 사랑의 극단을 가정하는 것이 과연 온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런 가정이 과연 사랑의 '본질'을 탐구하기에 적절한 예시일까?
영화는 아마 극단적이지 않은 모순에서 발생하는 삶과 관계의 미묘한 혼란들엔 답을 내리지 못할 거다. 육체와 정신의 모순을 제외한 사랑의 이야기를 할 순 없을거다. 개인적인 감상으론, <사랑의 탐구>는 영화라기 보단 일종의 시뮬레이션 실험 같았다. 소피아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잘 짜여진 캐릭터 위에서 부유하는 ‘가짜’들 같았달까. 살아있는 소피아와 죽어있는 상대들. 이토록 다면적인 진짜 세계와 그 위를 부유하는 다양한 사랑의 형태를 다만 에로스와 플라토닉만이 존재하도록 만들어버린 납작한 가짜 세계. 그렇기에 결국 스크린에만 머무를 수 밖에 없는 이야기.
<사랑의 탐구>가 정의내린 사랑이 시린 아스팔트 땅 위에서 자신의 모순됨을 온몸으로 느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담겨 있다면, 앞서 언급한 영화의 ‘의도된’ 실패는 성공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마치 하나의 맥락을 잘 유지한 모범생의 실험 리포트를 받아든 교수가 된 기분이다. 자기가 내린 정의를 입증하고자 분투했고 이에 성공했지만, 공식을 벗어난 다른 맥락에선 통용되지 않는 가설이다. 다시말해, 이 영화는 진짜 삶엔 가닿지 못한다. 똑똑하고 유의미한 듯 보이지만, 어쩐지 조금은 답답함이 남았던. 그렇기에 더 많이 아쉬웠던, 사랑의 탐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