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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걷고 걷고 걷다보니, 또 여기에서 당신과 - 연극 ‘또 여기인가’ [공연]

길을 잃고 헤매는 인생의 길치들을 위한 위로

by 양혜정 에디터
2026.06.11 17:39

 

 

〈또 여기인가〉라는 제목의, 언뜻 듣기만 해서는 내용이 전혀 예상되지 않는 연극을 보았다. 극은 혜화에 위치한 연우 소극장에서 진행되었다. 객석 의자가 1인석으로 나뉘어 있지 않아 모르는 사람과 나란히 붙어 앉아 관람해야 하는 작은 소극장이었다.

    

연극의 포스터에서도 극에 대한 힌트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가장 먼저 접한 정보는 각본가의 이름. 아역 배우들의 명연기와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으로도 화제가 되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2023년 개봉 영화 〈괴물〉. 그 〈괴물〉의 각본을 맡았던 사카모토 유지가 내놓은 각본이라기에 별 고민 없이 예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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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등장인물은 4명. 아버지의 주유소를 물려받은 젊은 점장 지카스기, 알바생 다카라이, 간호사 시메노, 그리고 지카스기의 이복 형이자 퇴물 소설가인 네모리.

 

극의 배경은 도쿄의 한 허름한 주유소. 시시껄렁한 알바생과 그런 알바생에게 쓴소리 하나 못하는 만만한 점장이 등장한다. 알바생의 실수로 흐른 기름을 점장이 닦는 묘한 광경이다. 그때 한 남성이 여성을 거칠게 밀어붙이며 가게로 들어선다. 남성은 지카스기에게 “저는 그쪽 형 되는 사람이에요”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그와 함께 들어온 여성은 다름아닌 지카스기의 아버지가 입원 중인 병원의 간호사. 지카스기의 이복 형인 네모리는 아버지가 식물인간이 된 것이 의료사고인 것으로 보고 의료소송을 제기하고자 한다. 그런 네모리의 속내는 사실 소송을 통해 받은 합의금과 아버지의 땅을 노리고 있는 것.


아버지가 식물인간이 된 것이 병원의 책임일 수 있다는 충격적인 소식에도 지카스기는 사뭇 침착하다. 아니, 침착한 게 아니라 정신이 딴 데 있는 것일까? 차는 됐다는 네모리의 만류에도 보리차를 가지러 저편으로 달려가고, 알바생과 간호사는 자꾸 대화의 흐름을 방해하고... 네 사람은 같은 공간 안에서도 따로 있는 것 같다.

 

의료사고, 식물인간, 소송, 땅문서. 심각하고 무거운 단어들이 오고 가는 상황이다. 그런데 등장인물들은 당최 심각해 보이지가 않는다. 손님에게 보리차를 내주니 마니, 건미역을 먹니 마니, 잡지 모델이 어쨌니 하는 이야기로 꽤나 긴 시간을 흘려보낸다. 심지어 지카스기의 아버지가 병원에서 사망한 이후에도 그렇다. 이 극의 장르가 일본 특유의 만담 코미디 장르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 분위기가 점점 이상해진다. 아버지가 식물인간이 된 것이 병원이 아니라 지카스기 때문일 수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지카스기가 핸드스피너를 돌리면 다카라이의 팔을 충동적으로 꺾어버리면서 극은 다른 국면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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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여러분의 직접 감상하는 즐거움을 해치지 않기 위해 자세히 적어두지는 않겠으나, 이후에는 지카스기의 충동, 돈밖에 모르는 것 같았던 네모리가 겪었던 죄책감, 시메노의 헌신적인 사랑과 같은 등장인물들의 깊은 내면이 무대를 채운다. 이와 함께 극 초반에 조금은 지루해 했던 나는 어느새 사라지고 무대에 빨려들어갈 듯 몰입한 내가 객석에 앉아 있었다. 극의 종결은 다시 시작될 나날에 대한 약간의 희망과 형제의 애정으로 마무리된다. 극이 시작되면서 뿌려졌던 모든 복선들이 억지스러운 부분 없이, 매끄럽게 회수된다. 과연, 이래서 사카모토 유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훌륭한 각본만큼이나 섬세한 연출 또한 눈에 띈다. 무대 장치는 변함이 없지만 조명의 색상과 위치로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여기는 실내인지 실외인지 자연스럽게 알게 해준다. 도쿄의 여름, 해가 쨍쨍하고 공기는 무겁고 매미는 시끄럽게 우는 공감각적 심상이 지금 내 눈앞에 구현되고 있는 듯했다.

 

연극이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깜깜한 밤이었고 소나기가 내려 공기가 시원했다.



 

또 여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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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회전, 좌회전, 좌회전해서 도착했나 보면, 아아 여기인가? 좌회전, 좌회전, 좌회전, 좌회전해서 또, 아아, 여기인가? 맨날 여기야.“
 

 

극의 후반부, 네모리의 대사다.

 

공간적으로 좌회전을 네 번 연속하면, 360도 회전해 정확히 원래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극 중 인물들은 각자 과거의 상처, 내면의 고통, 자신의 폭력성, 결핍에서 벗어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려고 처절하게 노력(좌회전)한다. 하지만 열심히 방향을 틀어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차려보면 결국 문제가 시작되었던 원래의 자리, 즉 '또 여기'로 되돌아와 있다. 나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변화할 수 없는 걸까, 나는 이렇게 실패할 운명인 걸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드민다.

 

그러나, 한 바퀴를 돌고 온 사람은 이제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 제자리에 오게 되었는지' 그 경로를 알게 된다.

 

"아, 또 여기인가?"라고 알아차리는 순간, 다음번에는 미세하게나마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내공이 생긴다. 네모리가 그랬듯이 지카스기는 인생의 선택지를 점차 넓혀갈 것이며, 네모리 역시 좌절을 딛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찾을 것이다.

 

이 연극이 주는 가장 큰 희망은, 제자리에 돌아와 탄식할 때 옆을 보니 나랑 똑같이 좌회전만 하다가 길을 잃은 또 다른 바보가 서 있다는 점이다.

 

극 중 지카스기와 네모리 형제는 자신을 감추고 억눌러야 하는 인생 속에서 각자 고독하게 헤매다 결국 주유소에서 만난다. 나만 제자리를 맴도는 고독한 패배자가 아니라, 인간은 모두 저마다의 방향과 속도로 헤매는 존재라는 것을 서로 확인하는 순간, 굴레는 더 이상 지옥이 아닌 서로를 이해하는 시작이 된다. 외롭지 않다는 것,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 그것이 다시 걸어갈 힘을 줄 것이다.

   

연극 〈또 여기인가〉는 필자가 최근 감상한 공연과 영화 등 ‘이야기’ 중 가장 뭉클하고 인상 깊은 이야기였다. 여러 번 반복해서 보면 그만큼 색다른 것들이 눈에 보일 연극인데, 아쉽게도 6월 7일부로 막을 내렸다. 네 사람의 이야기가 하루빨리 다시 관객들을 찾아오길 기다려 본다. 좋은 극을 보여 준 극단 '프로젝트 내친김에'에게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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