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K-POP은 더 이상 음악만으로 소비되지 않는다.
음원은 숏폼 열풍에 의해 짧은 클립으로 잘려 나가고, 무대는 패션과 무대장치, 메이크업, 표정 연출로 구성된 이미지로 회자되며, 기획사는 저마다 개성적이고 팬들의 취향을 저격할 만한 비주얼을 내놓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앨범 발매 전 공개하는 콘셉트 포토, 앨범 아트워크, 뮤직비디오, 심지어 공항 패션까지도 하나의 ‘aesthetic’으로서 작동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K-POP은 가장 시각적으로 민감한 문화 산업 중 하나이다.
이에 따라 K-POP 아이돌 그룹들은 자신들만이 보여줄 수 있는 독보적인 이미지를 확보하기 위해 가장 최신의 유행을 바쁘게 포착하여 재해석한다. 그중 필자의 눈을 사로잡는 그룹은 단연 ‘아일릿(illit)’이다.
아일릿은 데뷔 초 타 걸 그룹과의 콘셉트 유사성 의혹이 제기되어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으나 현재는 서브컬쳐, 즉 하위문화적이고 비주류적인 미학을 적극 차용하여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재창조한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 아일릿 느낌, 아일릿이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 그것들은 일명 ‘아일릿코어(illitcore)’로 불린다. 아일릿코어를 이루고 있는 미학들을 파헤쳐보자.
0. 에스테틱이란 무엇인가
‘미학(aesthetic)’이라는 단어는 본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논의에서 출발한 개념이다. 이후 미술사 분야에서는 예술가들의 창작 동기를 구성하는 일련의 원칙이자, 특정한 예술 사조를 지칭하는 용어로 확장되어 사용됐다.
하지만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에게 ‘미학’은 더 이상 철학이나 미술사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감정, 스타일, 취향을 통칭해 ‘미학’이라고 부르며, 이를 통해 정체성과 공동체 감각을 표현한다. 음악, 색감, 오브제, 사진, 글, 영상 등 감각적 요소들을 특정한 정서와 연결하고, 이를 하나의 이름으로 묶어 공유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감각적 분류는 대개 ‘~코어(core)’라는 접미사를 통해 명명된다. 예를 들어, ‘평범함’을 미덕처럼 소비하는 스타일을 뜻하는 놈코어(Normcore)를 시작으로, 발레리나의 복식을 일상 패션에 접목한 발레코어(Balletcore), 그리고 스포츠 유니폼을 일상복처럼 입거나 일상복과 매치하는 패션인 블록코어(blokecore)까지 수많은 ‘코어’들이 등장했다. 특히 2023년부터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발레코어는 리본, 토슈즈, 쉬폰 소재, 메리제인 슈즈 등을 활용하며 하나의 메가 트렌드로 자리잡기도 했다.
이처럼 미학은 이제 취향을 언어화하고 감성을 시각화하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미학적 감수성은 현재 K-POP 산업 안에서도 점점 더 전략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1. 코케트 에스테틱(Coquette Aesthetic)
![[크기변환]zhzpxm.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7/20250717000433_cgtqlhoz.jpg)
프랑스어로 ‘유혹하는 여성’을 뜻하는 코케트(Coquette)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코케트 에스테틱은 사랑스럽고 로맨틱하면서도, 어딘가 장난기 어린 태도를 지닌 스타일을 말한다. 리본, 레이스, 파스텔 색 등 전형적인 ‘소녀’의 상징 요소들이 특징적이며, 이는 아일릿의 비주얼 전반에 강하게 드러나는 미학적 축이기도 하다. 아일릿은 이를 멤버들의 실제 연령대와 어울리도록 조정해, 성숙한 유혹보다는 꿈속에 있는 듯한 소녀적 감각으로 재해석한다.
코케트 에스테틱은 최근 제니, 켄달 제너 등 글로벌 셀럽을 통해 메이저 패션 트렌드로 자리 잡기도 했지만, 아일릿은 그 표면적 이미지에만 머물지 않는다. 이들은 코케트의 스타일 위에 Y2K, 로리타 패션 등 다양한 스타일을 뒤섞고, 이후 서술할 드림코어나 마법소녀코어 등 보다 서브컬처에 가까운 정서들을 결합해 독특한 비주얼 서사를 구성한다. 특히 아일릿의 코케트는 단순히 예쁘고 꾸민 이미지가 아니라, 어딘가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공기를 풍긴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인물을 바라보는 듯한 거리감이 존재한다.
2. 드림코어(Dreamcore)
아일릿은 데뷔 앨범인 미니 1집 ‘SUPER REAL ME’부터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어딘가 몽환적이고 서늘하기도 한 비주얼을 보여주었다. 축 늘어뜨린 긴 생머리를 휘날리며 텅 빈 공간에서 춤을 추는 소녀들, 흔들리는 카메라, 꿈속을 유영하는 듯 몽롱한 화면과 음향. 이는 드림코어를 직접적으로 연상시킨다.
‘드림코어’는 꿈, 백일몽, 악몽과 관련된 모티프를 이미지, 영상, 그리고 때로는 음악 등의 매체를 통해 표현하는 초현실주의 미학으로 익숙한 요소를 몽환적이고 현실과 동떨어진 듯한 느낌으로 연출하여 아름다움과 노스탤지어, 그리고 괴리감과 혼란스러움 등의 복합적인 감정 동시에 안겨준다. 드림코어에서 파생되어 드림코어의 아련함과 향수를 자극하는 감성을 극대화한 것이 노스탤지어코어(Nostalgiacore), 그리고 드림코어의 괴이함과 오싹함을 극대화한 것이 위어드코어(Weirdcore)로 불린다.
![[크기변환]드림코어3.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7/20250719060746_wviuqmam.jpg)
이들과 마찬가지로 드림코어는 흔히 ‘꿈속에 갇힌 듯한 느낌’을 주는 공간적 연출을 동반하는데, 이는 ‘리미널 스페이스(Liminal Space)’ 혹은 ‘백룸(Backrooms)’과 같은 공포 요소가 강한 미학도 긴밀한 관련이 있다. 리미널 스페이스란 사람들이 있어야 마땅한 장소, 예컨대 학교나 수영장, 복도 등에 홀로 떨어진 듯한 정서를 자아내는 공간이다. 익숙한 배경이지만 사람이 없는 상태로 비어 있 때, 이 공간은 곧바로 낯설고 불안한 분위기를 띠게 된다.
아일릿의 뮤직비디오에서도 이러한 연출은 자주 등장한다. ‘Magnetic’ 뮤직비디오에서는 시멘트벽으로 이루어진 정체불명의 복도를 멤버들이 뛰어다니고, ‘Cherish’에서는 학교 화장실로 추정되는 공간 안에서 이로하가 방향을 잃은 듯 혼란스러워하며 헤매는 장면이 담겨 있다. 또한 텅 빈 공간에서 펼쳐지는 군무 장면들은 아일릿이 구축하는 정서적 공간이 단순히 귀엽고 명랑한 소녀의 이미지에 그치지 않음을 시사한다.
![[크기변환]8bc634bde124807e76d418cda42bd441.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7/20250719050245_izpimybf.jpg)
드림코어는 아일릿의 비주얼 미학에서 단순한 장식 요소를 넘어,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축으로 작용한다. 데뷔 초부터 아일릿은 소녀의 순수함과 사랑스러움을 전면에 내세우는 동시에, 어딘가 모르게 서늘하고 비현실적인 정조를 병치해 왔다. 이는 코케트 에스테틱의 부드럽고 낭만적인 이미지를 드림코어 특유의 불완전하고 몽환적인 분위기와 결합함으로써, 단면적인 예쁨에 그치지 않는, 보다 입체적인 시청각 경험을 만들어낸다.
특히 주목할 점은, 드림코어와 리미널 스페이스처럼 원래는 게임,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주로 소비되던 서브컬처적 미학이 아이돌 콘텐츠에 본격적으로 적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미학은 과거에는 실험적이고 비주류적인 감각으로 간주되었지만, 아일릿은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자신들의 서사와 이미지 속에 녹여내며 대중과 공유 가능한 언어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트렌디한 시각 요소를 차용하는 것을 넘어, K-POP이 수용할 수 있는 미학적 범위와 감성의 스펙트럼을 넓힌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아일릿은 단순히 ‘귀엽고 예쁜 소녀’가 아닌, 복잡한 감정과 분위기를 품은 새로운 서사의 주체로 기능하고 있다.
3. 마법소녀코어(Magical Girl-core)
아일릿은 미니 3집 ‘bomb’에서 기존의 작업물들과는 다른 결의 마법 소녀 콘셉트를 보여주었다. 검은색 세일러복, 요술봉, 화려한 머리 장식과 드레스는 TV 앞으로 어린 소녀들을 불러들였던 만화 영화 속 마법 소녀들을 연상케 한다. 특히나 3집 타이틀곡인 '빌려온 고양이'를 나타내는 듯 날개를 달고 있는 빛나는 고양이 이미지가 앨범 아트워크 곳곳 사용되었는데, 이를 보면 마법 소녀 물의 근본과도 같은 일본 애니메이션 <달의 요정 세일러 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달의 요정 세일러 문>의 미소녀 전사들은 언제나 행복하지만은 않다. 그들은 전투에서 처참히 패하기도 하고, 슬픔에 잠기기도 하는 등 어두운 내면을 드러낸다. 아일릿 역시 이와 같은 이중적 이미지를 품고 있다. ‘bomb’의 콘셉트 포토 속 멤버들은 반짝이는 변신 마법 소녀의 복장을 입었지만, 표정은 무심하고 무(無)에 가까워 그 안에 감춰진 복합적인 감정을 암시한다.
특히 'bomb' 브랜드 필름은 쓰레기차에 실려 폐기되는 요술봉과 그 모습을 본 윤아의 우울한 표정, 소녀들의 슬픈 울음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그 후 각성한 마법 소녀 아일릿은 황혼이 내려앉은 폐허에서 날아오른다.
특히나 이 영상에서는 건물 벽면에 얼굴만 내놓고 잠들어 있는 아일릿 멤버들이 깨어 젤리 몬스터를 잡아먹는 장면으로 K-POP에서는 보기 힘든 시각적 충격을 제공하였다. 여기서의 젤리 몬스터는 아일릿 멤버들이 마법 소녀로 변신할 수 있도록 하는 일종의 각성제 역할로 사용되었다. 원테이크 촬영기법, 정교한 십자수 텍스트, 디테일이 살아 있는 미술 소품 등으로 완성된 영상은 시각적인 충격과 황홀함을 동시에 선사한다. 직접 감상해 보면 그 매력을 분명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영상에서 사용된 'we were all magical girls(우리는 모두 마법 소녀였다)'라는 문구와 'Remember the magic inside you(네 안의 마법을 기억해)'라는 민주의 대사는 '마법 소녀가 특정한 특별한 존재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능성을 믿고 내면의 마법을 간직한다면 누구나 마법 소녀가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러한 긍정적인 메시지를 때로는 어둡고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는 영상미를 통해 전달한다는 점이, 필자가 아일릿에 깊이 끌리는 이유 중 하나다.
사실 아일릿의 마법소녀 콘셉트는 3집에서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다. 데뷔곡 ‘Magnetic’의 뮤직비디오에서도 멤버들이 물건을 공중에 띄우거나, 마법소녀물에서 자주 등장하는 유리구슬 같은 메타포를 활용하는 장면들이 포착된다. 이는 아일릿이 이후 전개할 독자적 서사의 복선이다. 이제 막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힌트를 주기 시작한 아일릿만의 독자적 세계관은 앞으로 점점 더 확장될 전망이다.
![[크기변환]아일릿2.jpg](https://www.artinsight.co.kr/data/tmp/2507/20250717002033_olbogyds.jpg)
아일릿은 풋풋한 사랑에 빠져 당돌하고 진취적인 면모를 보이다가도, 때로는 헤매고 우울하며 혼란스러운 양가적인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한다. 그 감정의 수단으로 공포와 불안을 내포한 미학을 과감하게 활용하는 점이 인상적이다.
특히 아일릿은 현재 비주류에 속하는 이러한 미학들을 K-POP이라는 거대한 주무대 한가운데 당당히 세움으로써, 오히려 새로운 유행을 창출하고 있다. 드림코어, 코케트 에스테틱과 같은 용어들은 대중에게 정확한 명칭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지 몰라도, 이미 이미지로서 소비되고 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Z세대는 이러한 ‘이미지 조각들’을 직관적이고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매 익숙하다. 아일릿은 그 감각의 조각들을 정확히 잡아내서,K-POP 걸그룹이라는 형식 안에서 재편집하고 재조합한 독창적인 결과물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아일릿은 음악적 완성도 또한 뛰어난 그룹이지만, 그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다루도록 하겠다. 아일릿이 말아주는 서브컬처 미학이 앞으로도 계속되기를.
*이미지 출처: 아일릿, 빌리프랩 공식 S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