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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연극 '플리백'이 1인 방백을 택한 이유 - 플리백 [공연]

그녀는 누구에게 말을 건넨 것일까

by 채수빈 에디터
2026.08.07 11:26

연극 <플리백>은 1인극으로 올려져 시즌 2개의 드라마까지 제작된 작품이다. 연극과 드라마 둘 다 '제4의 벽'을 허무는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시작부터 끝까지 관객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네기에 관객 역시 이야기에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 이야기가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말이다.


사실 나는 <플리백>의 유명세에 기대를 안고 드라마를 틀었지만 1화를 본 후 더 이상 시청하지 않았다. 더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내게 주인공은 너무 불편했다. 내가 기대했던 재치 있는 방백은 세상을 비웃는 냉소 같았다.

 

그러나 며칠 전 한국에도 초연으로 올려진 원작 연극 <플리백>을 보고 나의 오해를 풀 수 있었다. 피식거리는 조소 너머에는, 애도를 다하지 못한 사람이 웃음 뒤에 숨긴 고통스러운 울음이 있었다.

 


1. 플리백Fleabag_통합.jpg

 

 

연극이 시작되면 한 여자가 무대 위에 오른다. 우리는 그녀의 이름을 모르고 '플리백'으로만 부를 뿐이다.

 

연극은 플리백의 망해버린 면접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녀가 왜 이 면접 자리에까지 왔는지 관객은 차츰 알게 된다. 그녀는 가장 친한 친구 '부'를 잃었다. 둘이 함께 열었던 기니피그 카페는 문을 닫기 직전이다. 그녀는 돈도, 관계도, 삶의 방향도 모두 잃어가고 있다. 무엇보다 그녀를 무너뜨리는 것은 친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이다.


플리백은 자신의 슬픔을 정직하게 말하지 못한다. 대신 끊임없이 농담을 던지고 웃는다. 유머는 그녀의 방어 기제인 것을 넘어 생존 방식이다. 또한 그녀는 사랑보다 타인의 욕망을 먼저 배운 사람이다. 누군가에게 재미있는 여자, 섹시한 여자, 욕망의 대상이 되는 순간에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플리백_공연사진_김규남_6.jpg

 

 

그렇게 농담을 던지고 섹스를 하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그 아래에는 감당하지 못한 슬픔이 고여 있다. 애도하지 못한 슬픔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삶의 다른 곳을 천천히 잠식해나간다.

 

플리백의 모든 행동은 조금씩 어긋나게 된다. 언니와도 멀어지고, 아버지와도 거의 단절된 상태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고 느끼는 그녀는 지나치게 솔직해지고,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는 방향으로 계속 걸어간다.


플리백이 애써 던지는 농담에 관객은 웃어 보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무거워진다. 플리백의 모든 성적 행동은 누군가에게 욕망 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고,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뒤틀리게 표현된 블랙코미디다.

 

특히 야한 셀카를 찍은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옷 단추를 하나하나 잠그는 장면은 민망하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안타까움과 슬픔이 밀려온다.

 

 

플리백_공연사진_김규남_5.jpg

 

 

플리백은 짓궂은 농담과 이기적인 행동을 일삼는다. 무책임한 그녀는 소위 말하는 '회피형'이다. 그러나 그녀는 본래 선한 사람이다. 위험해 보이는 여성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친구에게 귀여운 기니피그를 선물할 만큼 다정하다. 쌀쌀맞은 언니의 행복도 진심으로 응원한다.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이타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한 연민이다. 자기 사랑이 빠진 관계는 밑 빠진 독과 같다.


<플리백>의 가장 특별한 점은 이 연극이 처음부터 끝까지 1인 방백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왜 계속 관객에게 말을 거는 것일까? 왜 자꾸 관객에게만 진심을 겨우 털어놓는 걸까? 공연을 보다 보면 고해성사를 듣는 신부 혹은 심리상담가가 된 기분이 든다. 그녀를 변호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그녀를 혼내고 싶은 것도 아니다. 그냥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주고 싶어진다. 흥미롭게도 드라마판 <플리백>의 시즌 2에서 플리백과 사랑에 빠지는 남자의 직업 역시 신부다. 그는 허공을 향해 말을 걸고 있는 플리백에게 묻는다. "누구에게 얘기하는 거예요?" 플리백을 정말로 봐주는 사람이 이제야 나타난 것이다.


돌이켜보면 이 연극이 끝내 하고 싶었던 말도 '누군가 나를 끝까지 들어주는 일'에 관한 것인듯하다. 플리백의 카페 단골손님 조 할아버지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준다. "사람은 놀라운 존재란다. 다만 다들 언제쯤 깨달을까? 우리가 가진 건 결국 서로뿐이라는 걸." 플리백에게 필요했던 것은 조언이나 용서가 아니라 그저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줄 누군가가 아니었을까. 연극 <플리백>에서 관객은 그녀를 용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은 사람으로 존재한다. 그녀가 '관객'에게 얘기하고 있다는 것도 어쩐지 안타깝다. <플리백>의 방백은 상상 속 친구에게 얘기하는 게 아니라, 스탠드업 코미디언처럼 그녀가 자꾸 관객을 웃기려고 하는 형식이다.

 

그러나 나는 환호도, 야유도 보내고 싶지 않다.

 

 

플리백_공연사진_김규남_7.jpg

 

 

이날 플리백을 연기한 김규남 배우는 원작의 작가이자 배우인 피비 월러 브리지와는 다른 결의 인물을 만들어냈다. 월러브리지의 플리백이 매력적인 냉소와 조롱을 강하게 앞세운다면, 김규남 배우의 플리백은 연극의 시작부터 애써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불안이 한 번에 느껴진다.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기존의 이미지 덕에 내 지인이나 친구의 이야기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그 덕에 어쩌면 내가 여전히 한심하게 여겼을 수 있는 플리백을, 한층 안쓰럽게 바라볼 수 있었다.


마침 이날 공연을 대학 친구와 함께 보러 갔었다. 우리는 20대에서 30대로 함께 나아가는 중이다. 헤어지기 전 우린 이런 대화를 나눴다. 20대에는 억울한 게 정말 많았는데, 30대가 되니 조금씩 시선이 나 자신에게서 타인으로 옮겨가는 것 같다고 말이다. 어릴 수록 자기 자신에게 시선이 향하게 된다. 세상은 나를 어떻게 볼까? 나는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할까? 그러니 이상한 억울함도 많이 생긴다. 30대가 되면 조금씩 인정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시간, 기대했던 삶과 다른 현재를 받아들이고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게 된다. 플리백이 더 이상 자신을 설명해야 할, 변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신이 어떠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만 모든 것을 인정했으면 좋겠다. 자신의 과오들도, 자신이 사실은 지극히 바라는 것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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