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살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엄마가 날 직접 씻겨줬을 정도로 어렸던 때였다. 목욕을 마치고 나서, 내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머리를 말려달라고 엄마를 찾아갔다. 어둑어둑한 안방에 TV만 켜져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단체로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엄마의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TV 화면 속 알록달록해 보이던 외국인들.
시트콤 특유의 엉뚱한 분위기와 난생처음 듣는 웃음 트랙. 다 같이 웃는 기분이 좋아서, 나도 괜히 옆에서 까르르 웃었다. 내가 소리 내서 웃는 걸 보자 엄마는 바로 소리를 음소거하며, 애들은 보면 안 되는 거라고 하셨다. 늘 어릴 땐 어려서 할 수 없는 게 많고, 나이가 들면 나이가 들었다고 할 수 없는 게 많다. 아무튼 그때 난 계속 미적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방을 나왔다. 그게 내가 훗날 영어공부를 한답시고 하루 종일 보게 될, 나의 영원한 밥친구, <프렌즈>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흘렀다. 내가 머리를 혼자서도 잘 말리게 된 중학생 때, 영어 공부를 빌미로 드디어 다시 '프렌즈'를 만났다. 아, 한눈에 알아봤다. 그때 엄마가 눈물을 흘릴 정도로 웃게 만든 그 알록달록한 사람들. 그리고 첫 화부터 프렌즈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상에, 이렇게 재밌는 게 있다니. 영화를 처음 본 것과 맞먹는 기분이었다. 왜 혼자 재밌는 거 보고 있었던 거야, 엄마!
물론 성적인 조크가 섞여 있어 아주 어릴 때 보여주기엔 어려웠을 것 같긴 하다.
그렇지만 프렌즈는 너무나 무해했다. 너무나 귀여웠고, 트렌디했고, 다정했다.
혹자는 ‘프렌즈’의 개그코드가 이제는 올드하다고 말하지만, 프렌즈의 진짜 무기는 매력적인 인물들이다. 적어도 시즌 3으로 넘어가는 순간부터는 그야말로 홀려서 보게 된다. 이들을 어느 순간 나의 진짜 친구처럼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프렌즈는 유독 웃음 트랙이 잘 어울리는 시트콤이다. 함께 웃고 싶게 만든다.
약간 철부지이지만 미워할 수 없는 레이첼, 친구들 사이 '엄마' 롤을 담당하는 친구 모니카, 순수하고 엉뚱 발랄한 피비, 기회만 보이면 바로 눈웃음과 함께 농담을 건네는 챈들러, 잘생겼지만 백치미가 있는 조이, 일이 꼬이는 만큼이나 몸개그 장인이 되어가는 로스. 그들이 모여 살면서 생기는 소소한 에피소드들. 그리고 그 에피소드들이 묶여 생기는 하나의 큰 시즌이 생기며 프렌즈들의 인생에는 큰 물결이 하나씩 새겨진다. 매 에피소드마다 나를 깔깔 웃게 했지만, 최종 화에서는 내 실제 친구를 떠나보내는 것처럼 펑펑 울었다.
내 영어는 '프렌즈'들과 함께 울고 웃다 보니 자연스레 길러졌다. 뉴욕에 사는 청춘 남녀들의 성장, 사랑, 우정으로 나는 영어를 배웠다. 내 영어 실력의 절반은 '프렌즈'에게 영광을 돌린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프렌즈는 영어 공부를 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시트콤이다. 왜 그럴까?
일단, 반복 학습이 된다. 프렌즈에서 작중 등장하는 배경은 주로 ‘센트럴 퍼크’ 커피숍이거나 6명의 ‘프렌즈’ 중 하나인 모니카의 집이다. 매일 익숙한 공간에서 같은 인물들을 보게 된다. 6명의 친구들이 만나는 사람들도 정해져 있고, 하는 말도 익숙하다. 일상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니 시즌 10개를 보다 보면 '툭 치면' 그들이 자주 쓰는 단어 하나 정도는 내 입에서 나오게 되어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프렌즈'가 영어 공부 교재로 자주 추천되는 이유는, 영미권의 사람들이 어떤 포인트에서 웃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영어 선생님은 아니지만, 영어를 아주 쉽게 재미있게 공부해 온 사람으로서 자신 있게 추천하는 방법은 바로 시트콤을 보는 것이다. 문화적 레퍼런스가 가득 녹아 있으면서도 이해하기 쉬워, '영어로 웃는 법'을 터득할 수 있다.
특히 프렌즈는 미드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이름이다. 개그씬이 나오면 관객의 웃음 트랙이 들리는 ‘정통 시트콤’이며, 장장 10년에 걸쳐 방영되며 일종의 시트콤 공식을 낳은 대히트작 이기도 하다. 영미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프렌즈의 느낌을 추구하며 만든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이 있을 정도니까. 그만큼, 수많은 대중문화에 영향을 주었으며 레퍼런스로 사용되고 있다.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자면, 우리는 왜 영어를 배우는 것일까? 좋은 대학교에 가기 위해, 좋은 곳에 취직하기 위해? 그렇다면 그 좋은 대학교와 좋은 회사는 대체 왜 계속 영어 점수를 요구하는 걸까? 바로, 많은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능력(흔히 '글로벌 능력'이라 부르는)을 보는 것이다. 즉, 영어는 '소통'하기 위해 배운다.
그렇지만 모국어로도 '소통'을 잘하는 사람은 많이 없다. 소통을 잘하려면, 상대방을 이해해야 한다. 언어 자체만큼이나 숨겨진 말을 읽어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 언어의 맥락, 즉 문화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외국어를 잘한다는 것은 그 문화권을 잘 아는 것까지도 포함된다. 문화는 '소통'의 열쇠다.
영어권의 사람과 웃고 싶다면, 그 사람의 문화를 이해하고 싶다면, 아직도 '프렌즈'만 한 것이 없다.
현재 프렌즈는 HBO에서 스트리밍 되고 있다. 넷플릭스만 구독하는 나는 예전만큼 프렌즈를 자주 보진 못하지만, 아직도 가끔 명장면들을 유튜브에 검색하곤 한다. 프렌즈 팬들에겐 너무나 익숙한 프렌즈의 오프닝송만 들어도 어쩐지 마음이 놓인다.
So no one told you life was gonna be this way
네게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겠지, 이런 게 삶인 줄은 몰랐겠지
Your job's a joke, you're broke, your love life's D.O.A.*
별 볼 일 없는 직장에, 돈은 없고, 시작하자마자 끝나는 연애사업까지
(*Dead on Arrival의 약자로, '도착 시 이미 사망'이라는 뜻을 가진 의학 용어)
It's like you're always stuck in second gear
너는 내내 2단 기어로만 달리고 있는 것 같을 거야
When it hasn't been your day, your week, your month, or even your year, but
하지만 너의 오늘, 이번 주가, 그리고 이번 달이,
그리고 너의 한 해가 네 마음대로 가주지 않았을지라도
I'll be there for you
내가 너를 위해 그곳에 있을게
When the rain starts to pour
비가 내리기 시작할지라도
I'll be there for you
내가 너를 위해 그곳에 있을게
Like I've been there before
전부터 항상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I'll be there for you
내가 너를 위해 그곳에 있을게
'Cause you're there for me too
왜냐하면 너도 그곳에 나를 위해 있어줄 테니까
프렌즈보다 조금 더 ‘레벨업’된 영어공부가 필요할 때
프렌즈의 리스닝 난이도는 초급에 속한다. 만약 프렌즈를 뗐다면, 여기 중상급 시트콤이 있다.
길모어 걸스
<길모어걸스>는 ‘시트콤’이라기보단 일일드라마 같다. 스타스 할로우라는 작은 마을에서 로렐라이와 로리 길모어 모녀가 살아가는 이야기. 그들의 소소한 일상과 사랑 이야기다. 길모어걸스만의 낭만적인 가을 분위기와 2000년대 초 스타일 덕분일까, 넷플릭스에 다시 올라오자마자 역주행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미국 작품으로서는 다소 드물게, 가족과 볼 수 있는 매우 건전한 드라마이다. 자유로운 영혼 로렐라이가 늘 엄마와 티격태격하는 장면, 그렇게 툴툴대면서도 가족의 정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것, 말 잘 듣던 딸 로리가 가끔 사고를 크게 치는 것, 미국에서도 가족은 똑같다는 걸 느끼면 왠지 반갑다.
길모어걸스의 대사량과 속도는 그야말로 엄청나다. 로렐라이는 미국 사람들이 뽑은 ‘제일 말 많은 캐릭터’ 1위로 꼽히기도 했다. 그리고 대사 속에 미국 문화 레퍼런스가 정말 많다. 딸 로리가 책을 정말 많이 읽는데, 팬들은 같이 따라 읽는 챌린지를 진행하기도 했다.
프렌즈로 영어 귀가 트였다면, 길모어걸스를 보면서 중상급의 영어를 경험할 수 있다.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
뉴욕에서 친구들이 같이 살며 생기는 에피소드의 스타일이어서, 처음엔 프렌즈의 아류작 아니냐는 말이 많이 나왔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제목부터 노선이 다르다. (흥미롭게도 프렌즈의 조연 배우들이 많이 출연하긴 한다!)
주인공 테드가 아내를 만나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자신의 딸과 아들에게 들려주는 액자식 구조로 진행된다. 그리고 이 액자식 구조가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의 독보적인 짜임새를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다. 시즌 전체뿐만 아니라 에피소드 하나하나에 ‘반전’을 매번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에피소드들은 주로 “내가 그때 00했다면 00한 결과가 나왔겠지, 그러나 난 그러지 않았단다. 그리고 난 그것 덕분에 네 엄마를 만나서 너무나 감사할 따름이야.”로 끝나는 형식을 취한다. 테드의 모든 이야기들은 삶에 대한 감사로 끝나며, 시트콤에서 쉽게 맛보기 어려운 진한 여운을 남긴다.
미국식 조크가 많아 처음엔 조금 당황할 수 있으나, 스토리텔링의 진수를 보여주는 시트콤이라 아무리 돌려봐도 지루하지 않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