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영화관에 갈까? 이미 다양한 OTT 서비스를 구독 중이지만, 굳이 외출 준비 시간과 이동 시간의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영화관까지 가는 것에는 대체되지 않는 즐거움이 있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 DVD플레이어로 영화를 봤다. 가족들과 함께 골라 산 DVD 내에서만 영화를 돌려보았다.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MP4 파일을 사서 영화를 보았다. 지금의 OTT처럼 다양한 것을 고르는 즐거움은 없을지 모르지만, 이미 잘 알고 가지고 있는 것들 내에서만 영화를 보는 것도 꽤 큰 즐거움이었다.
당시 영화관에는 친구들이나 가족들과만 갔기 때문에, 직접 골라서 본 영화는 없었고 당연히 취향에 맞거나 좋았다고 느낀 작품도 하나도 없었다.
알바를 하고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고된 상황에서 보상 심리로 영화를 보러갔다. 그러다 잠깐이나마 내가 모든 것을 잊고 골몰할 수 있다는 매력에 어느 순간부터 깊이 빠진 것 같다. 혼자 보러가는 것도 좋고 같이 보러가는 것도 좋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휴대폰을 끄는 것도 좋고 배급사의 로고 애니가 나오면 너무 설렌다.
영화가 끝나고 휴대폰을 켜서 밀린 알림들이 천천히 돌아오는 것을 볼 때면 잠깐이나마 내가 정말 세상에 없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만화가 후지모토 타츠키의 『파이어펀치』에서는 죽은 이후 영원히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세계가 등장한다. 왜 하필 죽으면 영화관에 갈 수 있다고 생각을 했을까?
그 이유는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보는 동안만큼은, 정말로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잊고 잠깐이나마 오직 영화를 보는 관람객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어쩌면 죽음의 상태와 비슷할 수도 있다.
매 순간 전신이 불타는 고통 속 살아가는 아그니와 끝이 보이질 않는 지루한 반불멸을 살아가는 토가타에게 삶이란 끝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삶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가게 되는 이유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그들에게 끝까지 삶의 지루함과 고통을 잠깐 잊게 해주는 꿈같은 순간일 뿐이다. 베헴도르그에 붙잡혀 노동을 착취 당하는 사람들에게 선이 아그니를 주인공으로 들려주던 이야기 또한 영화와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종종 사무치도록 삶이 지겹고 버거울 때 파편처럼 남는 어떤 즐거운 순간이나, 좋은 영화나 좋은 작품을 보는 것. 아, 이러니까 좀 살 만하다.라고 느끼는 것. 그 짧은 순간을 영영 머릿속에서 상영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지 않은가?
삶은 영화와는 다르다. 그러나 우리를 살게 해주는 짧은 순간들은 마치 영화처럼 아름답다.
만약 내가 죽고 나서 영영 휴대폰을 켤 일 없이 영화만을 보는 사후세계에 간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웨스 앤더슨의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본 것은 공교롭게도 밤새서『파이어펀치』를 읽은 다음 날이었다.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시 ‘애스터로이드 시티’ 이제 세상이 달라졌어요. 1955년 가상의 사막 도시이자 운석이 떨어진 도시 ‘애스터로이드 시티’ 매년 운석이 떨어진 것을 기념하는 ‘소행성의 날’ 행사에 모인 사람들은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그 곳에 옴짝달싹도 못한 채 갇히게 되고 계속해서 생각지도 못한 예측불허 상황들이 펼쳐지는데… 어쩌면 삶에는 의미가 있을지도 몰라요.- 작품 소개
영화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매우 복잡한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작중 전설적 극작가인 콘래드 어프 사후 그의 연극에 대한 방송이 흘러나오고 있다. 그 속에는 그가 그의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를 만드는 비하인드 다큐멘터리와 실제 만들어지는 과정과, 소동극 <애스터로이드 시티>가 있다.
여기서 우리가 집중해서 보게 되는 것은 소동극 <애스터로이드 시티>인데, 연극은 컬러로 묘사되지만 이외 다큐멘터리 장면은 흑백으로 묘사된다.
메타 픽션이란 픽션을 만드는 과정, 그리고 픽션 자체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말한다. 그러나 꼭 영화를 만드는 내용만 다뤄야 메타 픽션이거나, 영화를 만드는 것이 중심 메세지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메타 픽션이라 말하는 범위는 모두 다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메타 픽션'이란 결국 삶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다.
우리네의 삶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나는 어떻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말이다. 픽션을 만드는 것에 대한 창작자의 태도를 보여주면 이는 필시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삼중의 액자 구성을 취하는데, 여기서 우리가 살펴봐야 할 것은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연극, 그 바깥은 '다큐멘터리 영화'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연극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는 나사 빠진 듯한 황당한 장면이 여럿 등장한다. 사람들은 다 어딘가 고장난 듯 이상한 면들이 있고, 외계인이 등장하거나 주인공이 자신의 손을 가스 버너에 지지는 등, 황당한 일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이것이 왜 연극이어야 했을까?
바로 연극은 무대 위에서 끝이 날 때까지, 어떠한 편집도 없이 지속되는 일방향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관객이 연극을 관람하는 동안 배우들은 극을 연기한다. 무대 속에서 배우들은 배역으로서 존재하며, 연극 속에서 잠깐이나마 그 배역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
그렇다면 연극 바깥의 이 영화란 무엇인가? 여기서 극작가 콘래드는 이 세계를 창조한 신이자, 창작자라고 볼 수 있다. 편집이 가미되고 일선적이지 않은 영화는 연극과 같이 '삶'의 생동성과 시간성을 취득하지는 못한다. 다만 우리는 이 연극을 만든 창조주와, 그것을 연기하는 배우의 혼란을 통해 삶이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창작이 그것을 어떻게 담아내려 하는지 엿볼 수 있다.
연극에서의 혼란은 도무지 연극 안에서 해결되지 않는다. 연극의 주인공인 어기는 자신의 삶도, 이 이상한 세계도 이해하지 못한다.
어기 스스로는 본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기'에 대한 이해는 오직 연극 밖에서만 이루어진다.
2. 이 연극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아요


주인공 어기를 연기하는 존스 홀은 내내 자신의 역할에 의문을 가지고, 콘래드에게 어기에 대해 이런저런 것을 묻는다.
왜 어기는 버너에 자신의 손을 지졌나요? 왜 어기는.......
어기의 이상행동에 대해서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찾을 수도 있다. 아내를 잃은지 얼마 안 됐음에도 밋지에게 끌리는 자신에 대한 혐오와 가정에 대한 죄책감, 불안 등. 배역 '어기'의 보여지는 행동이나 혼란에 대해서 독자와 관객은 각자의 이유를 가지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 이유가 중요할까? 아니, 그 이유를 안다고 해서 삶의 모든 고난과 의문이 해결될까?
이 대사를 바꿔 읽으면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다.
아직도 이 삶이 이해가 가지 않아요.
상관 없어, 계속 살아가.
삶에는 이해할 수 없는 혼란이 깃들기 마련이다. 우리는 끝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 평생 살아간다.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갇힌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우주 속에서 공허에 발버둥 치고 있다. 그렇기에 이곳에 그들이 모인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단지 운석 하나가 떨어졌기에 애스터로이드 시티라고 불리는 이 사막. 이처럼 연고 없는 허허벌판의 삶에 우주라는 미지의 세계가 단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처럼 그들에게 다가온 것이다. 이 다섯 꼬마 천재들이 우주에 매료된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삶의 의미가 저 먼 우주 밖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박한 그리움과 희망과 절망.
웨스 앤더슨 특유의 파스텔톤 색감, 강박적이고 독특한 카메라 액션과 연출은 너무나도 아름답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서 영상미 이상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그가 그려내는 공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쁘게 계산된 장면 속 모든 인물은 무표정으로 해괴망측한 짓을 벌이고 해괴망측한 대사들을 서로 건넨다.
다섯 꼬마 중에는 말도 안 되는 내기를 걸며 사고만 치는 아이가 있다. 그러나 그가 내기를 거는 이유는 모두가 하찮게 여기지만 그런 내기만이 삶의 무료를 달래주기 때문이다. 그런 것조차 하지 않으면 삶이 너무도 길고, 공허하니까.

어기를 연기하는 존스 홀은 끝내 연극을 이해하지 못하고, 대뜸 무대를 뛰쳐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때 그는 연극 세트장 바깥 테라스 너머에서 원래는 사별한 어기의 전 아내 역을 맡은 마고 로비를 만나게 된다.
마고 로비의 등장이 또 메타적으로 재밌는 구성이 되는데, 동기간에 촬영하고 2022년에 방영한 메타 영화 <바빌론>에서 그가 맡은 주역과 대비되는 점 때문이다. 바빌론에서 마고 로비는 철저하게 불꽃 같은 무성 영화의 메타포이자 스타였다. 그러나 애스터로이드 시티에서는 잘려나간 스토리 속 사별한 전 아내의 역할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이 연극이 왜 계속되어야만 하는지 혼란스러워하는 존스 홀에게 마고 로비는 연극 바깥에서 어기의 삶에 이제는 등장하지 못하는 그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 이야기를 완결지은 이후 마고 로비는 다른 연극, 또 다른 삶을 연기하기 위해 떠난다. 존스 홀은 그제서야 어기가 밋지에게 품은 마음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고 다시 연극 속으로 뛰어든다. 이때 마고 로비가 서 있는 다른 건물의 테라스는, 그가 연기하는 또 다른 작품, 혹은 닿을 수 없는 사후 세계의 메타포로도 읽을 수 있다.
결국 웨스 앤더슨이 그려내는 삶은 이렇다. 혼란스럽고, 외롭고, 이해할 수 없는 것.
그러나 상관 없다. 그저 살아가라.
3. 잠에 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

영화 속에서 극작가 콘래드는 뜬금 없이 배우들에게 '잠자는 연기'를 주문한다.
그러자 배우들은 일순 쓰러져 각자 자는 연기를 펼치다가, 일순 "잠에 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는 문구를 합창하며 일어선다. 상당히 기묘한 장면이다. 무엇을 말하는 걸까?
하지만 앞서 해설했듯, 우리가 삶을 계속 이해하려 든다는 것을 상기하면 생각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삶의 혼란을 궁금해하지 않으면, 혼란스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다. 태어났으니까 살아가고, 살아야 하니까 밥을 먹고, 밥을 먹기 위해 돈을 벌고, 그렇게 살아가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혼란을 영원히 무시할 수 있는가?
결국 우리는 삶의 혼란이라는, 깊고 어두운 구멍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을 직시하는 것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다만 우리는 그 고통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얻게 된다.
끝내 그 시도는 실패하고, 우리는 영영 갈증에 시달리겠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것 자체로도 의미 있으니까.
*
보고 난 후의 메모장
1. 삶의 의미를 끝내 찾지 못하더라도!
2. 삶에서 한발짝 떨어져 생각해볼 것. 우리는 충분히 내가 나이기 위한 시간을 거쳐왔다.
3. 우주 너머 저밖에 나의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부유감. 이건 아이들이 지상에서 자신의 거처를 찾지 못했기 때문.
4. 잠에 들지 않는다면 깨어날 수 없다: 공허 속에 뛰어들지 않는다면 끝내 의미를 찾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