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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가로 150에 세로 120. 새하얀 캔버스에 이를 가로지르는 흰색 선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가.

   

혼란스러운 와중에 친구는 나에게 해체주의니, 모더니즘이니 설명을 하기 시작한다. 근데 여긴 아무것도 없잖아, 이게 얼마라고? 친구의 입에서 아무렇지 않게 나온 가격에 놀라 자빠진다.

 

“이딴 판때기를 진짜 5억이나 주고 산 건 아니지?”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그림을 보여줬다. 작가는 앙뜨로와. 이 뛰어난 예술성에 5억은 충분히 가치 있는 소비이다. 그런데 친구 녀석의 표정과 태도가 심상치 않다. 그림을 보라니까 자꾸 캔버스 뒤를 보질 않나, 5억에만 꽂혀있질 않나, 그것도 모자라 판때기라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딴 판때기라고 하는지 알고 싶네.”

 

싸움이 커진다. 25년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IT'S NOT WH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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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아트’는 흰색 바탕에 흰색 선이 그어진 그림을 중심으로 세 친구의 관계를 그린다.

 

‘아트’라는 제목과, 어딘가 심플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포스터, 수트를 입은 세 인물의 모습은 이 작품이 마치 예술을 논할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극은 포스터 속 저 새하얀 캔버스를 두고 벌어지는 세 친구의 우정과 관계, 내면에 있는 여러 감정들을 다룬다. 100분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이 주고받는 유치하면서도 집요한 언쟁에는 서로를 향한 질투심, 경쟁의식 등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은연중에 나오는 서로를 향한 진심까지.

 

극은 인물의 방백을 수시로 활용하여 인물들의 속마음을 전달한다. 관객에게만 들리는 그 말은 그들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때때로 솔직한 감정을 털어놓음으로써 인물의 복합적인 내면을 보여준다. 중요한 점은 다른 인물들에게는 그 말들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서로의 내면을 완전히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방백이라는 장치를 통해 드러냄으로써 극의 주제의식을 강화한다.

 

 

 

“제 친구 세르주가 그림을 하나 샀습니다.”

 

흰색 배경에 흰색 무늬. 그 새하얀 캔버스가 무대 중앙에 놓여있다. 관객의 눈에도 그 선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위로 마크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비친다. 마크는 고전을 좋아하는 항공 엔지니어이다. 결혼도 했고, 세르주와는 25년지기 친구 사이다. 어느 날 세르주가 자신이 5억에 그림을 하나 샀다며 보여준다.  앞서 설명한 흰색 바탕에 흰색 줄무늬가 그려진 바로 그 그림.

 

 

“제 친구 세르주가 그림을 하나 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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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에게 세르주는 너무도 사랑하는 친구지만, 저 새하얀 그림을 5억을 주고 샀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 그는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 친구가 저런 행동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는 끊임없이 그와 그림을 조롱한다.

 

한편 세르주는 그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마크를 이해하지 못한다. 극은 내내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 이해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이해받길 원한다. 엉망진창이 된 상황 속에서도 세르주가 세네카를 읽기를 권하며 자신의 예술적, 철학적 소양을 은근히 드러내는 장면은 실소를 자아낸다.


급기야 그림에 대한 논쟁은 가족을 헐뜯고, 서로의 자격지심을 건드리며 몸싸움으로까지 번진다.

 

 

 

"나는 그저 마크일 뿐인데."


 

둘의 갈등을 더욱 가중시키는 또 다른 친구가 있었으니, 바로 이반이다. 결혼을 앞둔 문구업자 이반은 특유의 우유부단함으로 갈등을 중재하다가도, 어느새 갈등의 중심이 되기도 하는 인물이다. 그 역시 두 사람의 싸움을 이해하지 못한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태도로 마크와 함께 그림을 보며 웃다가도, 세르주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된 것 아니냐며 이도 저도 아닌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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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판이 된 그들의 관계 사이에서 이반은 말한다. “우리 왜 만나냐?” 언뜻 봐도 세 사람은 무척이나 달라 보인다. 직업도 가정도, 성격도 관심사도. 그들 사이에 어떤 공통분모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런데도 극을 보는 내내 어쩐지 그들이 정말 서로를 떠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를 아끼고 있다면 모를까.

 

아무리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 하더라도 상대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게 아무리 25년지기 친구라 하더라도 말이다. ‘타인’이라는 말은 매정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친구의 미묘하게 엇나가는 모습들, 달라진 태도와 주변 환경은 어느 순간 서로를 조용히 멀어지게 만든다.

 

하지만 세 명의 친구는 단절 대신 분출을 택한다. 그림을 매개로 서로에 대한 불만을 가감 없이 쏟아내고, 말싸움이 계속 이어질지언정 세 사람 중 누구 하나 먼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물론 몇 번이고 떠날 듯한 순간은 찾아왔다. 극 후반, 마크는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기도 한다. 세르주를 끝내 받아들이지 못하던 마크가 진짜로 말하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 드러나는 순간이다.

 

 

 

"회복기간"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세르주가 그 그림에 5억이라는 가치를 부여했다면 마크는 그 사실을 인정해주기만 하면 될 일처럼 보인다. 이반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마크에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인정은 곧 자신이 구축해온 관계성을 뒤흔드는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세르주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이 그림을 좋아하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마크의 행태를 계속해서 바로잡고자 한다. 전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달라는 간절한 외침들이었지만,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그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로 들릴 수밖에 없다. 끝내 25년의 우정이 끝날 듯한 순간이 온다.

 

그때 세르주는 마크에게 펜을 내민다. 객석에는 적막이 흐른다. 펜을 받아 든 마크는 잠깐의 망설임 끝에 그 새하얀 캔버스에 대각선으로 선을 죽 긋는다. 헉 하는 탄성이 터져 나온다. 이내 비탈을 내려오는 스키 타는 남자의 그림이 완성되고, 무대는 암전된다. 그리고 그들은 ‘회복 기간’을 갖기로 한다.

  

사실 극이 진행될수록 세르주가 그 그림을 대하는 방식의 미묘한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 초반에는 혹여 그림이 닳을까 장갑까지 낀 채 그 커다란 캔버스를 소중히 들고 다니지만, 뒤로 갈수록 어느새 장갑은 사라지고 맨손으로 그림을 붙든다. 때로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려놓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마크에게 건네는 펜까지. 무엇이든 그려보라는 그 펜은 마크가 계속 이야기하던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캔버스'에 대한 어느정도의 동의이기도 하다. 어쩌면 세르주는 말로는 꺼내기 힘든 화해의 신호를 갈등의 원인이 된 그림을 대하는 방식을 통해 조용히 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나이기 때문에 당신이 당신이라면"


 

아트를 보고 나오면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친구들이 있다. 절친한 친구, 오래 전에 연락이 끊긴 친구, 가끔 안부만 들려오는 친구, 사이가 멀어진 친구... 등등.

 

그리고 생각해본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나보다 훨씬 잘 살고 있을 때, 과연 나는 그 친구를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있을까. 은연중에 어떤 우월감이나 경쟁의식을 가지고 친구를 대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있을까. 나는 마크와 세르주, 이반 중 어느 쪽에 가까운 사람일까. 극은 우리가 평생을 살며 형성해온 다양한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얼핏 무겁게 느껴질 수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극은 이를 절대 무겁게 풀어내지 않는다. 위 과정들을 아주 유쾌하고도 속도감 있게 전개하여 정신없이 웃다 보면 어느새 감동을 한 스푼 발견할 수 있는, 이른바 블랙 코미디이다. 그림 하나가 빚은 서로 다른 세 친구의 갈등과 화해의 과정에 울고 웃으며, 친구와의 관계에서 나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어떤 불편한 감정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 것. 진지함을 유쾌하게 풀어내는 이것이 바로 연극 '아트'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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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중 이반은 상담치료를 받는 선생님이 해준 조언이라며 어떤 문장을 읊는다. 마지 수능 국어 지문을 읽는 듯 머리가 지끈이지만, 극의 주제를 함축해놓은 듯한 이 문장을 곱씹으며 연극 '아트'의 감상을 마친다.

   

 

“내가 나인 것은 내가 나이기 때문이고

당신이 당신인 것은 당신이 당신이기 때문이기에

나는 나이고 당신은 당신입니다.

또 한편으로 당신이 당신이기 때문에 내가 나라면

그리고 내가 나이기 때문에 당신이 당신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내가 아니고 당신은 당신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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