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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SS] 악보 상점 혜화점은 여덟 시에 그림을 판다 - 더하우스콘서트 줄라이 페스티벌 : Debussy & Ravel Ensemble 3 - Quartet Horizons [공연]

여덟 시의 상점이 열렸습니다. 장바구니를 확인해 주세요.

by 장유진 에디터
2026.07.23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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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나는 7시 30분이 한참 되기도 전에 혜화역에 도착해 수분감 가득한 마로니에 공원 한가운데를 거닐기도, 예술가의집 계단 쪽에 서서 사진을 찍기도 하며 8시의 현악사중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가방 속에서 이제는 익숙해진 까만 디지털 카메라를 들어 그를 이곳저곳에 세워두다가, 다른 관람객들이 일찍이 하콘의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고, 우리도 그들을 따라갔다.


오늘의 출연진과 공연명이 적혀 있는 입간판에 가까운 계단에 서 있던 우리는, 프로그램을 보기도 하고 부채질을 하기도 하면서 아주 심도 있는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어디 앉을까요?”

“골라주세요.”


이제는 이 줄라이 페스티벌에 익숙해진, 그러니까 온 순서대로 앉고 싶은 좌식 의자에 앉으면 되는 이 룰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는, 공연이 시작되기 전이면 늘 다 괜찮다는 식으로 우리가 오늘 ‘어디에’ 앉을지에 대한 중요한 결정을 미루곤 했다. 많은 선택지가 있었다. 이번에는 오른쪽에 앉아보자. 맨 앞 말고, 두 번째는 어떨까. 이참에 확 뒤편에 있어볼까? 아, 모르겠다. 그냥 앞에 앉을까? 그런 얘기를 반복했다.


결국 우리의 선택지는 평소에 앉던 2열의 중반에서 아주 살짝 오른편 정도의 좋은 자리였다. 연주가들이 잘 안 보이더라도 다른 각도의 좌석에 앉아보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나 보다.


선택을 이어나간 자리, 그리 멀리 지나가지 않은 시간의 ‘계단’을 다시 떠올렸던 건 드뷔시를 건너는 와중이었다. 왜일까? 그날의 음악 때문이었다. 드뷔시와 라벨. 두 작곡가의 현악사중주를 지나온 지금에서 돌아보건대, 내가 이렇게까지 ‘고객’적인 느낌을 받은 공연이 있었나 싶었다.


그래, 22일의 나는 공연이나 전시회 따위를 구경하러 온 ‘손님’이 아니라, 상점 따위에 물건을 사러 오는 ‘고객’으로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연주가들은 그저 은은히, 작곡가도 잠시 뒤편에. 조명을 받고 있는 것은 오로지 네 대의 현악기 위에, 혹은 옆에 놓인 그림 두 점이었다. 가장 왼쪽 상단부터 맨 오른쪽 아래로 향하는 길목까지, 이 그림 안에 무엇이 놓여 있는가. 정말 잘 통제된 감정선 안에서 구경해 볼 수 있도록, 내가 저 상품에 매혹될 수 있도록 길을 걷더라.


뭔가 묘사도 아니고, 감정을 유도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들이 메마른 것도 아닌데. 나와 연주가들 사이에는 일정 선상의 거리가 있었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은 딱 회사에서, 혹은 회사의 가십들로만 이야기가 통하고 나머지 것들에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처럼. 서로가 아는, 서로가 기억하는 역할 안에서만 이뤄져야 하는, 그 순간에만 필요한 정도의 감정만 나누는.


그러니까, 드뷔시와 라벨이 아니라 그들이 남긴 작품을 탐미하러 온 당신들을 위해 우리는 ‘대리인’으로서 잠시 머물기로 한. 딱 그런 생각이 들고 나니, 나는 계단에서 했던 일을 이곳에서도 반복하게 되겠구나, 그리 생각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의 일이 공연을 지나가는 길에도 이어지니 참 신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과연 내가 오늘 무엇을 ‘구매’하게 될지, 이 상점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길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Debussy, String Quartet in G minor, L.85


 

 


오랜만에 만난 이든은 낯설도록 내밀해져 있었다.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음색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날뛰던 생명력도 땅 위에 자리 잡아 있었다. 보기 좋은 응집력이 1악장 전면을 이끌어 나가는 게 한눈에 담겼다. 한 줄로 밀어붙인다는 느낌. 드뷔시가 풍성해지고 있다.


그들보다 뒤쪽에서 끼얹어오는 소리부터 이쪽까지 닿아오는 소리까지, 모두 구경할 만한 것들로 놓였다. 일찍이 나는 네 명의 연주가의 모습을 눈에 담기보다 시선을 1열의 목재 좌식 의자 사이, 혹은 그 나무결 쪽으로 내려놓았다. 아주 작은 보석을 자세히 보려면 돋보기가 필요하듯이, 밝은 곳에 놓이는 소리를 가까이서 들으려면 시선을 그림자 속에 두어야만 했다.


물론 2악장 도입부처럼 재미난 손 움직임을 나도 모르게 따라가야만 할 때는 정면을 바라보기도 했다. 다만 그럼에도 어두워지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무엇을 따라가기 위함인가? 그들의 드뷔시를 재연하는 풍경이다.


내가 처음에 그들을 낯설게 여겼던 이유는, 소리의 장면 중심에 그들이 있기보다 음표가 있기 때문이고, 그 음표는 과하지 않을 만큼 해상도가 높은 채로 음악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주로 연주가가 내뱉는 것 안에서 그 안에 숨어 있는 사람을 보는 즐거움을 놓치지 않곤 했는데, 이날의 현악사중주 안에는 그것보다도 작곡가가 남겨놓고 간 그림을, 노래가 익숙한 이들의 손끝을 이용해 편안히 눈으로 따라가보는 시간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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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리스트 임지환

 

 

부담스럽지 않고, 감정적 흘러넘침도 없다. 떠나간 이의 스케치와 물감이 아주 미미할 정도로만, 그냥 앞에 있는 사람이 바라봐도 좋을 정도로만 웃고 있다. 나는 익숙한 장면을 떠올렸다. 이곳은 패션쇼가 진행되고 있구나.


명화가 사람 손을 빌려 우리에게 걸어오고 있으니 미술 경매 같기도 한데, 또 그런 느낌은 아니다. 그래, 오늘의 하콘은 드뷔시와 라벨로 제작된 특정 컬렉션을 은밀하게 선보여주는 프라이빗 트렁크 쇼 같다. 이 곡이 끝나고 나면, 이 소리를 집에 가져갈지 말지, 주머니 속에 들여놓을지 말지 골라야 할 텐데. 첫 곡부터 이러면 참 곤란하네 싶었다.


다시 사야 할 이유를 정리해 봐야겠다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찰하는 재미가 있다. 깊게 다가서지 않고 오히려 그 거리를 유지해주니, 언제든 다시 꺼내 들어도, 어느 구간을 살펴봐도 나를 가만히 남겨두는 악장이 이 안에 있지. 어딘가를 바라보지 않는 일에 지치는 때면 굳이 앞을 바라볼 수도 있겠지. 일렁일렁, 그들이 멀어질 때에도 가까이 다가설 때에도.

 

 

 

Ravel, String Quartet in F major, M.35



 

 

라벨이 라벨했다. 딱 그 소리가 절로 나올 수 있게 그날의 바이올린과 첼로가 한 자리씩 차지한 채 노래를 부르고, 비올라는 왼쪽부터 세 번째 자리에서 오늘의 개성을 엿보인다. 이날 인상적이었던 건 내가 생각한 라벨의 푸름보다도 다정한 표정이었다.


어디서 온 서로 다름일까? 네 개의 악기가 각자 노래할 때에도, 같은 길로 엮여들 때에도 그 선명도가 높아서, 풍요롭게 하나씩 짚어지는 저 음표의 생김새가 무척이나 분명해서, 귓가로 들려오는 그 자체로 음미해볼 선율이 보다 다채로워서. 어디 한 곳에 굳이 자리할 필요 없이, 어느 구간을 지나더라도 내가 “예쁘다” 칭찬할 수 있는 공간이 곳곳에 가득하다.


이곳에는 가사를 붙일 필요가 없구나. 잘 조율된 악기가 허밍한다. 2악장의 어느 무렵에 소리 모두가 잠시 정지한 순간이 있는데, 그때 비올라가 아주 신묘한 소리를 냈다. 짧은 틈에서도 현 두 개가 트위스트한 것만 같은 엮임을 시작으로 나타나는 장면에 나의 선택지가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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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리스트 신경식 

 

 

드뷔시를 사려고 했는데, 한층 다정다감해진 라벨이 이 정도는 별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합을 맞춰나가니 내가 아는 클래식이, 이 장르에 이만큼의 거리감을 느끼고 말다니. 뭐든 아무것도 모른다는 식으로 순진한 얼굴로 다가서면 다 이해해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스케치북 위의 하얀 면 위에서 크레파스 몇 개만 들고 서 있었는데.


저 안엔 값비싼 물감으로 그려진 그림이 이미 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내가 지금부터 손을 뻗는다고 해도 적어도 몇 년은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가 저 안에 있었다. 아, 나는 그들과 가까운 줄 알았는데, 이만큼의 간극이 있구나.


그 사실을 가만 깨달은 뒤에는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장바구니를 응시했다. 여전히 비어 있다. 노래는 갈수록 오묘해지는데, 마음 안에 알 수 없는 것들이 놓이고 있었다. 4악장에서 급속 냉방 장치가 가동되기 전까지는.


늘 붉은 채를 유지하는 왼손과 오른손이 새파랗게 식어 들어갈 정도로 세찬 한기가 바이올린을 주축으로 이곳에 물기운을 끼얹어 놓더라. 이리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 프라이빗 쇼에서 무슨 생각을 하나. 뭘 살지 말지부터 결정해야 되는 것 아닌가. 잡념은 이불 속에서나 하고, 어서 우리를 택해라!


아,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노래가 끝이 나면 나는 더 이상 고를 수가 없지. 시선을 내린 곳보다 더 낮춰버린 화살표를 들어 올렸다. 그래, 음악만 생각하자. 눈을 꼭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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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나는 무엇을 사러 왔던가? 생각하자. 나는 기쁜 초조함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을 골라야 하는가? 그렇게 가만, 차가운 바람결을 따라가다 보니 보이더라.


색채가 가득했던 물감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까만색이 있었다. 둥그런 모양이기도, 기다란 선이기도 했다. 글자도 남아 있더라. 아, 나는 그제야 눈치챘다.


나는 오늘 악보를 사러 왔구나.

그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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