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약동하는 시의 세계 - 시 보다: 2024

글 입력 2024.11.06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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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에서 펼쳐지는 시 축제

 

문학과지성사는 2021년부터 매년 동시대 시인의 작품을 모은 ‘시 보다’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다. 그리고 올해 역시 9월 27일, 『시 보다: 2024』가 출간되었다. 참여한 시인은 박지일, 송희지, 신이인, 양안다, 여세실, 임유영, 조시현, 차현준 총 8인으로 각자의 개성이 돋보이는 시가 수록되어 있다.

 

한편, ‘시 보다’ 시리즈가 보다 더 의미를 갖는 건 1년에 한 번 출간되는 연간 출판물이라는 점인데, 공식 소개 글의 언급을 빌리자면, 매년 명절처럼 돌아오는 “작은 축제”로서 동시대 시를 감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시 보다: 2024』는 각 시인의 시 다섯편과 작가의 ‘시작 노트’, 선정위원의 ‘추천의 말’로 구성되어 있고, 선정위원의 ‘기획의 말’로 마무리된다. 이제 준비가 되었다면 시집을 들어서 여덟 명의 시인 각각의 이야기를 음미하는 경험을 시작해보자.
 
 
 
박지일, 다섯 개의 『물보라』


 

네가 쓴 글 또한 너를 유지하는 까닭으로 남을 수 있을

까? 주위로 옹벽이 세워지고 사면에 문이 들어선다. 옹벽
과 문이 너를 위해 들어선 것인지, 문과 옹벽을 위해 네가
세워진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만,
 
 
맨 첫 장을 장식하는 박지일 작가의 시 다섯 편은 모두 『물보라』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그의 시는 하나의 상태가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그 이면의 상태, 그렇지만 그 하나가 다른 하나는 될 수 없는 모순율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문을 열기 위해 나도 밀고, 반대편의 사람도 민다면? 그렇다면 마치 균형이 맞은 시소처럼 양쪽에서 같은 힘이 가해져 문은 열리지 않는다. 그는 이러한 일상적 역학(e.g. 밀기-당기기)을 시 언어 속에서 생경한 느낌으로 바꾸어 낸다.

 
 
송희지, 붉어진 머릿속에서: 『루주 rouge』


 
형이 딸기를 깨물고 있다.
유리로 된 것이다.
 
 
‘나’는 유리로 된 딸기가 달았는지 물었고, ‘형’의 답은 ‘붉다’로 돌아왔다. 이어서 붉은 거리와 정육점 등의 시어가 나열된다. 이 구절을 읽은 순간 우리의 머릿속은 온통 붉게 물든다.
 
 
나는 거기서 서성이고 있는 형을 보았다.
 
 
붉어진 머릿속에 ‘형’과 ‘나’가 재차 소환된다. '붉다'라는 말 속에 다시금 초대된 둘이 어떤 연유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독자는 붉은 머릿속에서 그 가능성을 굴려본다. 과연 그게 무엇인지 정확하게 가늠할 수 없을지라도 이미지가 주는 강렬함은 『루주 rouge』의 마지막 글자를 읽는 그 순간까지(혹은 그 이후에도) 이어진다.
 
 

신이인, 글자 속에 펼쳐진 『실 낙 원』


 
글자들끼리는 사이가 좋았다
손을 잡고 몸을 맞추며 말했다
이곳은 무해합니다
테러와 전쟁과 천재지변이 없습니다
나의 말이 아니라
글자가 자기들 멋대로 사랑해서 만든 말이었다
 
 
글자가 허용된 지면 내에는 어떠한 가해도 피해도 없다. 글자 자체는 그 자리 그대로 지면 위에 멈춰 있다.
 
다만 변하는 건 그 글을 읽은 독자와, 그 독자가 모여 만든 말들과, 그 말들이 모여 생겨난 현상과, 그 현상들이 모인 세계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글자들의 공간에는 미동 없는 평화만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곳은 사람들이 잃어버린 낙원, ‘실낙원’일 것이다. 이를 통해, 시를 읽는 행위와 지면에 적혀진 글자(적혀진 시)가 갖는 의미를 가늠해볼 수 있다.
 
 
 
양안다, 빛을 삼킨 만큼을 빚진다 『서정』


 
빛이 빛을 삼킨다고 이해한다 밤은 그림자가 쏟아낸
핏덩이일까 내가 쏘아 날린 화살은 누구의 마음도 관통
하지 못한다 나는 그 사실로 인해 가슴이 아팠어요
 
 
빛은 제 몫만큼의 빛을 삼켜내는 것 마냥 중천(中天)의 정오에서 끄트머리의 일몰까지 향하며 점차 빛을 잃는다. 그동안에 그림자는 점차 제 몫을 늘려간다. 그러고 정신을 차려보면 밤이 되어 온통 어두워져 있다.
 
이처럼 양안다 작가가 펼쳐내는 이야기는 명암의 이미지 속에서 춤춘다. 해가 높아지면 그림자가 짧아지고, 그림자가 길어지면 해가 낮아지는 명암의 기묘한 관계 속에서 우리 일상의 사건을 조명한다.
 
 

여세실, 넘실거리는 바이킹처럼, 『나 원래 바이킹 잘 타』


 

눈앞에 펼쳐져 닥쳐오는

지붕들
이별의 모서리들
모두 손톱만큼 작아보일 테니까
(중략)
오늘의 너와는 한 움큼만 사랑하고
한 주먹만 이별하고
 
 
정신차려 보면 저 먼 꼭대기에서 지면까지 내려와 있는 바이킹에 탄 것처럼 '이별'과 '사랑'의 이미지가 넘실거린다. 바이킹은 오른쪽으로 스윙한 만큼 왼쪽으로도 같은 크기만큼 스윙한다. “오늘의 너와는 한 움큼만 사랑하고 한 주먹만 이별하고”라는 표현이 바이킹처럼 양쪽으로 왔다 갔다.
 
그렇게 시에서 말하는 ‘너’와의 관계가 어떤 모습인지 떠올려 볼 수 있다.

 

임유영, 『묘향산』의 향기를 떠올려 본다


 
(...) 거봉처럼 커다란 향나무 구슬은 향을 유지하기
위해선지 표면은 아무 칠 없이 사포질만 된 모습. 그게 진
짜 향나무로 만든 것인지, 다른 나무 구슬에 향나무 향기
를 입힌 것인지, 그 향기마저 향나무 향기였는지 향나무
향기를 흉내 낸 가짜 향나무 향기였는지 나는 모른다.
 
 
임유영 작가는 가본 적 없는 묘향산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독자 또한 묘향산(묘향산은 북한에 있는 산이다. 극히 드물게는 가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아닐 것이다.)에 가본 적 없다. 그래서 묘향산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정확한 모습을 알지 못하는 곳.
 
이는 존재하지 않지만, 모습을 알고 있는 '유니콘'이나 '페가수스'와는 반대의 성질로, 묘향산은 그렇게 생경한 느낌을 가져다준다.

 
 
조시현, SF의 세계로 초대받다. 『캠프파이어』


 
사람들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거짓말을 해보기로 했
다 멸망을 속여 넘길 정도로 그럴싸한 거짓말로 전부 농
담이 될 때까지
 
 
조시현 작가의 시는 SF장르에 대한 애정이 엿보이는 소재들로 구성되어 있다. 멸망 전 불 앞에 모인 사람들의 이미지. 사람들은 어떠한 연유로 마지막까지도 거짓말을 하는 것인가? 이 기묘한 상황,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상황을 독자는 어떻게 상상하고, 또 받아들여야 하는가?
 
‘만약에’라는 가능성 속에서 시 속 인물들의 사정과 그들의 이야기가 부여된다. 동시에 지면에 모인 말들의 리듬이 마치 미래에서 온 서사시를 듣는 것처럼 신기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차현준, 다대포와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에서 『DDP』


 
양손은 튜브 밑이 궁금하지 않고
양손은 8시 20분이나 4시 40분이나 만들어보면서
손끝과 발등이 없는 시간
장마를 걷어내기까지
 
 
차현준 작가의 시가 묘사하는 공간(예를 들어, DDP)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곳이다. 그는 추상적 개념으로 일상을 조명하는 방식과는 반대로 일상의 모습을 추상적인 이미지로 바꾸어 낸다. 그 과정은 마치 저 깊은 바닷속에 잠겼던 것이 부유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렇게 비현실적인 감각에 몸을 맡기는 듯한 감각을 떠올리며,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전에는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새롭게 인식해볼 수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시 보다: 2024』는 총 8명의 작가 개개의 매력이 드러나는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시 보다: 2024』가 마치 페스티벌에 온 것처럼 약동하는 시 세계를 관람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강민경 (2).jpg

 

 

[강민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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